쇠락한 기지촌 마을, 배제된 사람들의 기록

[3·8 세계여성의날 특별기획①] 동두천, 턱거리마을에는

<3·8 세계여성의날 특별기획>
① 동두천, 턱거리마을에는
② 기지촌 마을, 빨래하는 여성들
③ 기지촌 엄마와 마미(mommy)
④ 동두천, 여전히 배제된 여성들의 도시
⑤ 동두천의 이집트 여성 난민, 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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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가 내려다보이는 무덤

주한미군 캠프 호비(Camp Hovey)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 어디쯤에 박순자 씨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그가 캠프 인근 기지촌에서 일하던 수많은 여성들 중 한명이라고 했다. 기지촌에서 만난 미군과 미국으로 건너가려 했지만 결국 가지 못한 사연을 가진. 홀로 미국에서 돌아온 미군은 그가 죽은 뒤 이 무덤을 만들었다고 했다. 미군이 손수 넣었을 묘비명에는 ‘박순자, 가지 말아 주오’라는 글자가 어색하게 새겨져 있다.

무덤가에서 보이는 캠프 호비는 거대한 마을 같다. 마을보다 더 큰 마을, 그래서 마을을 삼켜버린 마을. 그곳은 이제 적막함으로 가득 차 있다. 차량 한두 대 정도만 들락거릴 뿐, 사람의 인기척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캠프 뒤편 건물에서 거대한 구름덩이 같은 증기가 쉬지 않고 솟구쳐 오른다. 마을 어귀에 자리한 그 곳은 2015년에 준공된 LNG복합화력발전소다.

무덤가 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오면, 캠프 호비 출입문 앞에 조그만 아파트단지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예전에는 백 가구 가까이 살았을 그 아파트에는 이제 네 가구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캠프 출입문을 따라 쭉 뻗는 골목길에는 스산한 바람이 오래 머문다. 과거 미군들이 드나들던 전당포와 트로피 제작 상점은 빛바랜 영문 간판만 매달아 놓은 채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그 골목을 가득 채웠을, 기지촌 성매매 업소와 미군 클럽 등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골목에는, 아직 과거를 지우지 못한 흔적들이 빈 허물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골목 뒤편 언덕가의 허름한 집들에도 아직 사람의 흔적이 있다.

미군부대와 발전소로 둘러싸인 마을. 모든 것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동네. 줄곧 배제됐으나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곳. 이곳의 오랜 지명은 ‘턱거리마을’이다.

턱거리마을에는

동두천 중앙역에서 동쪽으로 3키로 가량 떨어진 곳에 턱거리마을이 있다. 시내에서 마을버스를 타면 약 10정거장, 도보로는 50분이 걸리는 외딴 동네다. 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는 동두천을 따라가다 보면 미군부대인 캠프 호비가 나온다. 캠프 호비의 규모는 14.05㎢로 동두천시 전체 면적(95.67㎢)의 15%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1951년부터 동두천에 주둔하기 시작한 주한미군은, 1954년 이곳에 캠프 호비를 설치했다.

  캠프 호비 앞 고 박순자 씨의 무덤 [출처: 워커스 취재팀]

캠프 호비는 캠프 케이시(Camp Casey)와 함께 동두천에서 가장 큰 미군 기지다.1) 조그맣고 조용하던 턱거리마을은, 캠프 호비가 들어서면서 거대한 기지촌 마을로 변모해갔다. 미군부대 관련 종사자들이 마을로 몰려들었고, 미군부대 정문 앞에 기지촌 성매매 집결지가 생겨났다. 미군을 위한 클럽과 술집 등 유흥 및 서비스 업소들이 동네를 메웠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두천 전체 인구 중 70%가량이 캠프 케이시 앞 보산동과 캠프 호비 앞 광암리(턱거리마을), 그리고 생연동에 거주했다.2)

“그때는 버스에 매일 사람들이 가득 찼어. 사람이 하도 많으니 버스 기사가 일부러 덜컹, 브레이크를 밟아서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니까. 골목에서도 사람들 틈에 끼다시피 해서 다녀야 했고. 지금의 이태원보다 훨씬 사람이 많은 곳이었지. 밤에도 휘황찬란하고, 팝송이 그치지 않는.” 턱거리마을 주민 서태순 씨는 당시의 마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실제로 턱거리마을은 캠프 케이시 앞 보산동과 함께 동두천에서 가장 번화한 기지촌으로 이름을 알렸다.

턱거리마을 주민 대부분은 미군을 상대로 일을 했다. 일거리는 많았지만 일자리의 종류는 많지 않았다. 여성들은 미군 부대 안 빨래공장에 취직해 군복을 빨고 다렸고,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청소와 빨래, 육아를 대신하며 돈을 벌었다. 식당이나 가게를 운영하거나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마을의 모든 것이 미군부대로부터 형성됐고, 주민들은 미군부대로 인해 생존했다.

돈과 음악과 유흥이 넘쳐나고 마을은 번성했지만, 이곳 여성들의 삶은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매일 밤 사람들의 고성과 비명이 들려왔고, 살인, 강간, 폭력, 방화 같은 강력범죄가 끊이질 않았다. 1964년에는 기지촌 성노동자 김옥희(28) 씨가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얼굴에는 상처가 있고 목 졸린 흔적도 있었다. 살인을 저지른 이는 김 씨에게 월 5달러를 주고 동거를 해 왔던 미군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다른 여성들의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같은 해, 세 명의 미군이 택시 기사를 칼로 찌르고 현금 2천원을 강탈해가는 사건도 있었다.

1971년에는 마을주민 150명과 미군 헌병 80명이 패싸움을 벌였다. 싸움이 벌어진 이유는, 그날 밤 한 미군이 성노동자 김순금(23) 씨를 아무 이유 없이 마구 때려 실신시킨 뒤 부대로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이날 패싸움으로 주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중상을 입었다. 2007년에는 한 미군이 새벽녘 마을을 돌아다니며 화분을 부수고, 유리창을 깨고, 가정집에 침입했으며 급기야 미용실에서 강도 및 방화를 저지르기도 했다.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은 무궁무진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성노동 여성의 시신을 실은 꽃상여가 마을을 빠져나갔다. 턱거리마을 주민 최희순 씨는 “무서울 정도로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며 “기지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친정에 돈을 보내기 위해 생활전선으로 뛰어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죽었다”고 회상했다. 서태순 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이 깨져 있기도 했고, 사고가 나도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배제된 마을, 턱거리마을 박물관

영원히 흥성할 것만 같았던 턱거리마을은 1980년대 들어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의 경제 성장으로 달러의 값어치가 하락하고, 미군부대 내 위락시설이 설치되는 등의 변화가 시작되면서였다. 그리고 미군부대 내에 캠프 케이시와 캠프 호비를 잇는 연결다리가 생기면서, 더 이상 미군들이 턱거리마을로 나오지 않게 됐다. 거기다 2004년 이라크전쟁 당시, 캠프 호비에 주둔하던 미 2여단이 이라크로 떠나면서 미군병사 수가 급격히 줄었다.3 현재 캠프 호비는 미군 주둔지가 아닌, 순환기지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출처: 워커스 취재팀]

미군이 떠나자 생계가 막막해진 주민들도 짐을 쌌다. 상점은 문을 닫았고, 빈집은 늘어갔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적막함이 내려앉았고, 마을은 더 빨리 쇠락해갔다. 떠날 곳이 없거나 떠나기에는 너무 늦은, 혹은 떠날 돈이 없는 가난한 노인들만 마을에 남았다. “목욕탕, 병원, 약국 같은 게 다 사라져 버렸어. 아프면 택시타고 동두천 시내로 나가서 약을 사야해.” 마을 주민 곽화순 씨가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아무리 마을을 돌아다녀 봐도 병원은커녕 약국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 들어설 예정이었던 1000여 병상 규모의 제생병원은 벌써 20년째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게다가 이 병원마저 영리병원으로 알려지며 논란이 일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고령의 노인인데도, 보건소 하나 들어서지 않았다. 지난해 12월에는 우체국마저 이 마을을 떠났다. 마을버스도 줄어,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조차 없다. 마을버스들은 마을 초입에 있는 버스정류장을 스치듯 지나가곤 했다.

허물어져가는 기지촌 마을을 채운 것은, 예전과 같은 듯 다른 유흥업소와 요양병원이었다. 이제 마을 골목에 늘어선 클럽에는 한국인들이 드나들었고,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도 필리핀과 러시아 등의 외국 여성들로 바뀌었다. 그리고 2012년, 삼성물산과 한국서부발전, 현대산업개발은 턱거리마을 일대에 LNG복합화력발전소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모든 것이 쇠락한 마을에도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는 법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더 이상 마을이 망가지고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마을 노인들은 투쟁에 나섰다.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고, 시위와 농성을 했으며, 경찰에 연행이 됐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정부와 기업에 맞선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2015년, 예정대로 마을 어귀에 LNG복합화력발전소가 준공됐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게는 32억여 원의 마을발전기금이 주어졌다. 그때부터 마을 주민들 간에 갈등과 반목이 시작됐다. 마을발전기금으로 지은 빨래공장은 비리 의혹과 적자에 시달리다 매각됐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서로 상처를 입고 등을 돌렸다. 수십 년간 쌓여온 그들의 공동체는 그렇게 허물어졌다.

  턱거리마을박물관 [출처: 워커스 취재팀]

2019년 11월 30일, 개울 앞 ‘카페 상제리에’ 자리에서 턱거리마을박물관 개관식이 열렸다. 예술가들과 마을주민들, 지역연구자, 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공간이었다. 그동안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던 턱거리마을의 이야기를 쌓아나가 보자는 취지였다. 주민들의 사랑방이 될 이곳은 주민간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주민들과 예술가, 활동가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마을 음악회를 열고, 마을 창작교실을 운영하며, 주민들의 생애사를 기록해나가고 있다.

턱거리마을박물관 관장인 이혜진 작가는 “턱거리마을은 여성, 군인, 마을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의식이 있다. 이곳이 이들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장소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옛 기지촌 선술집을 복원해 놓은 박물관에는 턱거리마을의 역사와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와, 주민들이 그린 마을 그림들이 오밀조밀 전시돼 있다. 쇠락한 마을 끝자락에 조그맣게 자리한 박물관에는 매일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미군부대와 발전소로 둘러싸인 마을. 줄곧 배제되고 사라졌지만 반드시 기록되어야 할 곳. 턱거리마을에 대한 기록은 이제 첫 발을 내딛었다.

<각주>

1) 캠프 케이시의 면적은 14.15㎢다.
2) 기지촌 다시 부는 ‘봄바람’, <동아일보>, 1981.2.3
3) 땅과 기억: 동두천 턱거리마을과 공동체 아카이브, 경기문화재단 북부문화사업단,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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