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마을, 빨래하는 여성들

[3·8 세계여성의날 특별기획②] 배제된 여성들의 도시

<3·8 세계여성의날 특별기획>
① 동두천, 턱거리마을에는
② 기지촌 마을, 빨래하는 여성들
③ 기지촌 엄마와 마미(mommy)
④ 동두천, 여전히 배제된 여성들의 도시
⑤ 동두천의 이집트 여성 난민, 모나


  턱거리마을 [출처: 워커스 취재팀]

미군부대 빨래공장

턱거리마을에 사는 여성들은 빨래를 했다. 미군의 군복과 속옷을 빨았고, 기지촌 여성들의 옷을 빨았으며, 가족들의 옷을 빨았다. 미군부대에 들어가 빨래를 했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동두천에 모여 빨래를 두드리기도 했다. 지난 60년간 그들의 손에서는 물기가 마를 날이 없었다.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최희순(75) 씨가 턱거리마을로 이주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 큰 불이 나면서 집안 사정이 곤궁해졌다. 부모님은 언니가 출가해 살고 있던 동두천 턱거리마을로 그를 보냈다. 그의 오빠는 집에서 조카를 돌보느니, 일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1960년대 초, 열일곱의 나이에 미군부대인 캠프 호비(Camp Hovey)의 빨래 공장에 취직했다.

빨래 공장은 미군부대 안에 있었지만, 사장은 한국인이었다. 미군이 한국인 부자에게 하청을 준 것이라고 했다. 공장 안에는 최 씨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공장은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갔다. 60명의 여성들은 30명씩 조를 짜서 12시간 씩 2교대로 일을 했다. 새벽 6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을 했고, 다음날 오후 6시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6시에 퇴근했다. 빨래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수백 벌의 군복이 매일 공장으로 들어왔고, 노동자들은 그 세탁물들을 세탁기에서 짤순이로, 다시 건조장으로 옮긴 다음 다림질을 했다. 와이셔츠는 빳빳하게 다렸고, 군복에는 각이 딱 떨어지는 주름을 냈다. 손이 빠른 사람은 하루에 이백 벌이 넘는 군복을 다렸다.

노인 여성들은 미군의 러닝셔츠와 팬티, 양말을 빨고 갰다. 공장에는 항상 미군들의 속옷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노인들은 일을 하다 고되거나, 추위를 견디기 힘들 때면 말려놓은 속옷 더미 속에 들어가 선잠을 청했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은 고단했다. 하지만 그들은 고단한 줄 몰랐다. 고단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고, 무엇보다 고단해 할 시간도 없었다. 그나마 최 씨의 유일한 낙은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를 그만둔 그에게 친구만큼 그리운 것이 또 없었다. 그들은 가끔씩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고개를 넘어 영화관 구경을 다녔다. 그것은 그들이 부릴 수 있는 최대의 사치였다.

최 씨는 빨래 공장에서 받은 임금의 대부분을 친정에 부쳤다. 최 씨만이 아니었다. 미혼의 여성노동자 대부분은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돈을 벌었다. 빨래를 하는 여성들도, 기지촌에서 성노동을 하는 여성들도, 처지는 고만고만했다.

  캠프 호비 앞 기지촌 골목 [출처: 워커스 취재팀]

그들은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을에서 돈이 나오는 곳은 미군부대가 유일했다. 미군부대에서 빨래를 하는 여성들은 부대 식당에서 커피나 소시지, 고기 같은 식료품을 사서 공장 안에 숨겨 두었다. 그리곤 퇴근 무렵엔 그것들을 한복 치마춤에 감추거나, 망태기에 담아 부대 담벼락 밖으로 던지곤 했다. 부대에서 사들인 식료품들을 되팔면 꽤 쏠쏠한 돈이 됐다. 물론 매번 부대 정문을 무사히 통과한 건 아니었다. 검문소를 지나다 적발되는 날이면 그들은 부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곳에서 식료품을 빼돌린 또 다른 동료들의 이름을 대라고 추궁을 받았다. 동료들은 그들을 빼내기 위해 돈을 모았다. 동료 언니들이 잡혀갈 때면, 최 씨도 수 개월 치의 월급을 마련해 그들의 석방을 도왔다. 하루아침에 목돈이 허망하게 날아갔지만, 그저 자신의 이름을 순순히 대지 않은 언니들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열일곱 살부터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까지, 최 씨는 18년간 매일 빨래 공장에서 일을 했다. 멋모르고 시작했던 일이 힘에 부칠 때쯤, 그도 적지 않은 나이가 돼 있었다. 아등바등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모이라는 돈은 안 모이고 이런저런 골병만 쌓였다. 최 씨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부당한 일을 겪어도 그것이 부당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하소연을 하고 싶어도 하소연을 할 곳이 없었다. 미군부대로 인해 형성된 마을이었고, 마을이 곧 미군부대였다. 미군이 많이 들락거리는 ‘홀’(유흥업소)을 운영하는 사람이 곧 마을의 지주가 됐다. 그들의 눈 밖에 나면 마을에서 더는 살기가 어려워졌다. 종종 간밤에 끔찍한 사건이나 소란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마을사람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최 씨는 일주일간 무단결근을 한 뒤, 공장을 나왔다. 미군부대를 나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일자리라고 해봐야 주로 기지촌 여성들의 옷을 빨고, 그들이 낳은 아이를 돌보고, 청소를 하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 미군부대 내 위락시설이 설치되고 캠프 호비와 케이시 사이에 연결 통로가 생기면서 마을 상권이 쇠락해가고 있었다. 최 씨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것을 멈췄다. 대신 동생이 낳은 조카를 키우며 가사노동을 전담했다. 그리고 마흔 살이 되던 해, 미군부대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남성과 혼인을 했다. 그와 같이 일을 했던 동료들도 진즉에 결혼과 동시에 공장을 떠난 터였다. 공장을 떠나 가정에 정착한 여성 노동자들은, 빨랫감을 한 무더기씩 들고 나와 마을 개천에서 또 다시 빨래를 두드렸다.

기지촌, 여성, 빨래, 그리고 배제된 마을

마을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던 1984년. 곽화순(65) 씨는 남편을 따라 턱거리마을로 이사를 왔다. 동두천 시내 셋방에서 연탄가스 때문에 꽤나 고생을 한 터였다. 남편은 공기 좋은 곳에 살자며 이삿짐을 쌌고, 생면부지의 마을에 짐을 부렸다. 이삿짐을 들여놓은 날, 곽 씨는 짐을 풀지 않겠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생전 처음 맞닥뜨린 턱거리마을은 무법천지의 환락가였다. 집밖에 나가려면 겁부터 났다. 미군부대의 경비 노동자였던 남편은 일 년만 이곳에서 살아보자며 곽 씨를 달랬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세월이 겹겹이 쌓여, 어느덧 서른여섯 해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편의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미군은 경비 업무도 한국인에게 하청을 줬다. 중간에서 하청사장이 돈을 떼어가니, 임금이 넉넉할 리 없었다. 두 아이를 키우려면 곽 씨도 일자리를 얻어야 했다. 곽 씨의 사정을 어디서 들었는지, 근처에 사는 할머니가 그를 불러 세웠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월세 방을 내주는 집주인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곽 씨에게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기지촌 여성들의 집을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해볼 테냐고,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저 우리 집 빨래, 청소하는 것처럼 하면 되겠지요. 곽 씨는 그렇게 일자리를 수락했다. 처음에는 무섭기만 했던 동네 풍경도 점점 눈에 익기 시작했다. 곽 씨가 집안일을 돌보던 기지촌 여성이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그는 그곳에서 일을 했다.

  턱거리마을 [출처: 워커스 취재팀]

마을 풍경이 눈에 익었다고, 일상의 고단함에도 익숙해진 건 아니었다. 골목 곳곳에 넘쳐흐르는 환락과 광기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남자들은 일이 끝나면 노름을 하고 술을 마셨다. 밤에 더 빛나는 거리에서 사람들은 밤새 뒤엉켰다. 거리가 풍요로울수록 가난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곽 씨는 남편에게 미군부대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홀로 이곳을 떠나겠노라며 악을 썼다. 미군부대 경비 노동자로 10년간 일했던 남편은 곽 씨의 채근에 못 이겨 다른 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번화한 마을길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 쇠락한 거리로 전락했다.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됐던 상권과 일자리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도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었다. 곽 씨는 일거리를 찾아 전전했다. 마을의 농지를 빌려 5년간 농사를 지었고, 전자공장 노동자로도 일을 했다. 마트 캐셔와 횟집 서빙, 산모 도우미 등 일자리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살아도 삶은 언제나 최악으로만 치달았다. 공장에 들어간 지 채 5년도 되지 않아 남편은 병을 얻었고, 곽 씨가 45세 되던 해 사망했다. 당시 함바집에서 일을 하던 곽 씨는 아이를 키우고, 남편의 병간호를 하고, 가사노동을 하고, 함바집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리고 남편이 결국 세상을 떠났을 때, 이 마을은 분명 원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하고, 병들고, 쇠락해가는 마을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 많던 미군과, 기지촌 여성과, 상인과, 외지인이 자취를 감췄을 무렵. 그래서 더 이상 거리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됐을 무렵. 동네에 LNG복합화력발전소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미군을 위해, 미군에 의해 흥망성쇠의 길을 걷다 버려진 곳에, 그래서 이제는 노인만 남겨진 마을에 또 다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군이 점령군처럼 들어왔던 만만한 마을이라고 또 다시 이럴 수가 있는가. 마을 노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과 터전이 거대한 무엇인가로부터 좌지우지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2013년 여름. 최희순 씨와 곽화순 씨, 그리고 그들을 비롯한 100여명의 턱거리마을 주민들은 LNG복합화력발전소 건설부지 앞에 농성장을 차렸다. 아이 둘을 앞뒤로 둘러업은 여성들과, 마을의 노인들은 매일 농성장에서 외쳤다. 모든 것이 쇠락해간 이 마을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 이곳의 자연을 훼손하지 말라. 지자체와 시행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건설공사 차량은 매일 흙먼지를 내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결국 그해 7월 2일, 수십 명의 노인들은 발전소 건설현장 흙바닥 위에 나란히 누웠다. 그들은 건설부지로 진입하려던 공사 차량을 몸으로 막아 세웠다. 여경 100명을 포함한 400명의 경찰 공권력이 그들을 덮쳤다. 경찰의 강제진압 과정에서 2명이 실신했고, 5명이 업무방해로 연행됐다.

  캠프 호비 앞 성우아파트 [출처: 워커스 취재팀]

이듬해 1월 말, 지난했던 투쟁이 일단락됐다. 시행사는 발전소 가동에 따른 질소산화물 배출농도 측정치를 분기별로 제출하고, 법정 규정치를 위반할 시 주민위원회와 공동 조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발전소 일자리에 주민을 우선 채용하고, 32억 원의 마을 발전기금을 내놓기로 했다.

그리고 주민들은 32억여 원의 기금으로 마을에 빨래공장을 지었다. 평생 빨래를 업으로 삼아온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최희순 씨는 이곳에서 다시 동네 주민들과 빨래를 했다. 미군부대 빨래 공장 시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신분이라는 것이었다. 최 씨는 매일 두 시간 씩,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을 했다. 하지만 곧 공장운영 비리 문제가 터져 나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각한 적자 운영이 이어졌다. 최 씨는 18개월 만에, 두 달 치 월급과 퇴직금을 받지 못한 채로 공장을 나왔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세운 공장은 외지인에게 매각됐다.

마을 어귀에 세워진 LNG복합화력발전소에서는 매일 엄청난 양의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발전소 일자리에 주민을 우선 채용하겠다는 약속도, 마을의 전기와 가스를 제공하겠다는 약속도 어느 하나 지켜진 것이 없다. 거대한 캠프 호비와 발전소로 둘러싸인 턱거리마을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 또 다시 배제와 고립의 마을로 쇠락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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