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엄마와 마미(mommy)

[3·8 세계여성의날 특별기획③] 배제된 여성들의 도시

<3·8 세계여성의날 특별기획>
① 동두천, 턱거리마을에는
② 기지촌 마을, 빨래하는 여성들
③ 기지촌 엄마와 마미(mommy)
④ 동두천, 여전히 배제된 여성들의 도시
⑤ 동두천의 이집트 여성 난민, 모나


  턱거리마을의 유흥주점과 각종 클럽 [출처: 워커스 취재팀]

마미(mommy)와 엄마

밤이 되면 턱거리마을에 홀로 남겨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엄마가 일을 나가고 나면, 이들은 마을 주민들 손에 맡겨졌다. 마을 여성들은 기지촌 여성의 아이들을 돌보며 돈을 벌었다. 아이들은 보모와 같았던 주민들을 잘 따랐다. 그 아이들도 이제 나이를 먹어 쉰을 훌쩍 넘긴 나이가 돼 있을 터였다.

턱거리마을 주민 이순옥(78) 씨는 1962년에 이 마을로 왔다. 당시 그는 갓 결혼식을 마친 스무 살의 어린 신부였다. 이 씨는 스물여덟 살 먹은 용산 제8군 소속 군인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남편 근무지가 동두천으로 바뀌면서 시어머니, 시동생과 함께 턱거리마을로 이주했다.

이곳으로 이사한 뒤 3년간은 아픈 시어머니의 병간호를 했다. 어느새 네 명의 아이도 낳았다. 남편이 군인이라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벌이만으로 아이 넷을 키우기에는 항상 돈이 모자랐다.

이 씨는 살던 집을 여러 개로 쪼개 5개의 작은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방들에는 기지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들어와 살았다. 캠프 호비 앞 기지촌 거리가 일 년 삼백육십오일 불야성을 이루던 때였다. 이 씨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월세 5천 원을 받았다. 여성들은 저녁이 되면 캠프 앞 번화한 거리에 있는 ‘홀’로 출근해 접대를 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질 즈음 미군과 함께 월세 방으로 돌아왔다.

시어머니가 사망한 후 이 씨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턱거리마을 여성들은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기지촌 여성들의 집안일을 하며 돈을 벌곤 했다. 이 씨도 그들의 집안일을 봐주며 돈을 벌었다. 집안일과 함께 아이를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100일된 아이를 안은 여성이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 미국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끝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기지촌 여성이었다. 이 씨는 돌이 갓 지난 아이를 맡아 키웠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들은 이 씨의 조그만 방들 중 한 곳에 살았다. 아이는 자신의 엄마를 ‘마미(mommy)’라고 불렀고, 이 씨를 ‘엄마’라고 불렀다. 친엄마에게 혼이라도 나는 날이면 그 아이는 베개를 껴안고 이 씨의 방문을 두드렸다.

꽃상여

미군들에게 인기가 있는 기지촌 여성은 가사노동비를 집주인에게 지불할 만큼 돈을 벌었다. 그래서 돈이 필요한 외지의 젊은 여성들이 이곳으로 많이 몰려들었다. 미군을 만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기지촌으로 들어온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어서, 벌어들인 돈을 다시 친가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돈이 없는 여성들은 종종 집주인에게 돈을 꿨다.

전 집주인에게 돈을 갚아야 하는 여성은 현재 살고 있는 집주인에게 다시 돈을 꿨다. 이 씨의 집에 살던 기지촌 여성들은 쉴 새 없이 일을 했다. 재수가 좋은 날이면 서너 명의 미군을 데려오기도 했다. 미군이 밤새 자고 갈 경우 20불을, 저녁 시간만 머물다 가면 10불을 받았다. 그 돈이 고스란히 그들의 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들은 미군에게 받은 돈 전부를 포주에게 줘야했다. 포주는 달마다 일정 금액을 제한 후, 여성들의 몫을 지급했다. 포주가 얼마의 돈을 떼어 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돈을 주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70~80년대 기지촌의 번화함과는 대조적으로, 기지촌 여성들의 삶은 늘 불안했다. 여러 위협과 폭력에도 노출됐다. 미군이 돈을 주지 않아 실랑이하는 과정에서 살해된 여성도 있었다.

턱거리마을에는 시시때때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을에 살던 사람이 사망하면 기지촌 여성 자치단체인 ‘민들레회’가 ‘꽃상여’를 만들어 장지로 운구했다. 꽃상여에는 흰 종이꽃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하얀 상복을 입고 꽃상여를 멘 채 캠프 호비 앞을 도는 모습은 장관을 이뤘다.

마을에는 크고 작은 범죄가 밤낮으로 벌어졌으나, 미군을 처벌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들은 미군 헌병이 유일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질러놓고 부대로 들어가 버리면 범인이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었던 주민들은, 비공식적인 보복을 감행하기도 했다. 마을 청년들은 ‘청년 방범대’라는 조직을 만들어, 범행을 저지른 미군을 골목으로 끌고 가 폭행했다.

상권이 번화하고 눈먼 돈들이 넘쳐나는 마을이어서 종종 흉측한 사건들도 일어났다. 언젠가는 ‘양키물건’이라는 미국산 물건을 판매하는 남성이 아내와 함께 칼에 찔려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은 흔한 ‘믹스커피’조차 미군과 결혼을 해야 살 수 있는 물건이었던지라, 미군으로부터 물건을 받아 되파는 장사꾼들이 차고 넘쳤다.

무법천지의 동네이다 보니, 해가 저물면 아이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첫째 자녀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이 씨는 순댓국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3개월 만에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가 출근하자 젊은 남성들이 그의 집 담벼락을 넘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 탓이었다. 이 씨를 비롯한 주민들은 필요한 일은 최대한 낮에 해결하려 했고, 밤에 급히 필요한 것이 있어도 자녀들에게는 절대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

  턱거리마을에 건립된 LNG복합화력발전소 [출처: 워커스 취재팀]

훼손당한 마을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들 정도로 번화했던 턱거리마을은 80년대 들어 쇠퇴의 길을 걸었다. 특히 2004년 이라크 전쟁 당시 이곳 주한미군이 차출되면서 마을 상권도 완전히 저물었다. 살길이 막막해진 기지촌 여성들과 상인들은 하나둘 이 곳을 떠났다.

그렇게 쇠락한 마을에 2012년 LNG복합화력발전소가 세워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번화했던 시절, 마을에 부동산 투자를 했던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시행사는 평당 1만5000원도 안 되는 땅을 100만 원에 사들이겠다며 사람들을 부추겼다. 하지만 정작 마을사람들은 발전소 설립에 반대했다. 그것은 마을 앞 동두천과 동네의 산과 나무, 그리고 꽃들을 아무렇게나 훼손시킬 것이었다.

2013년, 마을의 여성 노인들은 발전소 공사장에 출입하려는 건설 차량을 여름 내내, 밤낮으로 막았다. 공사장 앞에 차려 놓은 농성장에서 뜨거운 해를 견디며 그해 여름을 보냈다. 농성장에서 잠을 자다 장맛비에 떠내려갈 뻔한 적도 있었다. 경찰이 진압을 시도할 때면 몸에 인분을 끼얹으며 저항했다. 사지가 붙들려 꼼짝 못 한 상태로 연행되기도 했다. 발전소 부지의 땅 주인들과 일부 주민들은 그들의 싸움을 비난했다.

결국 지난 2015년, 턱거리마을이 속해있는 광암동 일대 25만6500㎡ 부지에 LNG복합화력발전소가 준공됐다. 시행사는 발전소 설립의 대가로 32억5000만 원을 마을에 지급했다. 이 돈으로 주민위원회는 마을기업 세탁공장인 ‘오랜지라운드리’를 지었다. 하지만 이 공장은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2016년 세탁공장 사장과 주민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던 A씨의 비리 사건이 터진 까닭이었다. 당시 A씨가 페이퍼컴퍼니를 세워놓고 호텔과 계약을 맺은 뒤 세탁공장에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수익을 챙겼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마을은 크고 작은 갈등에 시달렸다. 발전소 측 사람이라고 알려진 인물이 주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또 한 번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수십 년을 형님 동생하고 지내던 주민들이 서로 등을 돌렸다. 쇠락을 거듭하던 턱거리마을은 결국 마을 공동체까지 붕괴되고 말았다.

바깥세상은 그들의 60년의 세월을 지워버렸다. 턱거리마을은 더 이상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동네가 돼 버린 지 오래다. 약국도, 병원도, 보건소도 하나 없는 동네에는 매일 적막감만 감돈다. 그들을 ‘마미’라 불렀던 아이들의 목소리도 이젠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들을 기억할 사람들조차 이젠 몇 남지 않았다. 바깥세상은 더 이상 남은 자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원래 그런 모습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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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앞으로는 한미 긴장관계를 싣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실 한미관계를 정부와 거대양당, 민중당 외에는 잘 모르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런 부분이 있지만 일반인은 수박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을텐데요.

  • 아저씨

    봄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위축되었다.

    미국이 너무나 대단해서 "높은 사람들"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그렇지, 미국은 한국의 위에 있는 것만이 아닌, 한국이 쉽게 넘보지 못하는 일본 등의 강대국들도 지배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단지 위가 아니라 한국의 위위이다.

    시진핑은 폭군+한만 있는가. 더군다나 아베가 인물론에서 앞설 때는 한반도가 심각하다.

    이 봄은 어떤 봄이 될 것인가! 경제는 어떤 정부도 주기를 다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서 "걱정도 팔자"에 머물 뿐.

    자연의 봄은 간다. 미국의 봄이라니. 인류의 봄은 제각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