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인찍힌 이들의 재난

[레인보우]


재난 앞의 낙인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전화에 경보창이 뜬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나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 생활 실천에 동참해 달라는 호소와 함께, 몇 번째 확진자가 나왔다거나 웹에 확진자 동선을 공개했다는 공지가 날아든다. 내가 사는 지역의 구청은 물론이고 인근 구청, 이따금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시청에서 보낸 것도 있다. 처음에는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정보를 찾을까를 생각했지만 수신이 반복되면서 생각이 옮겨갔다. 메시지에는 어느 아파트에서 앞선 확진자와 함께 살고 있는 그의 아들이 확진 판정을 받았더라는 식의 상세한 정보가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동선 정보를 열어 보니 성별, 연령, 근무지나 거주지, 그리고 접촉자가 없는 곳을 포함한 시간별 방문지 전체가 공개돼 있었다. 가까운 이라면 쉽게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감염 대비를 위해 확진자가 다녀간 장소, 시간을 공개하는 것을 넘어, 확진자의 개인 정보를 이만큼이나 공개하는 것에 대한 효과는 뻔했다. 그것들이 ‘비상한 시국’에 곳곳을 누비며 ‘민폐’를 끼친 이들을 비난하는 데에 쓰일 것이 뻔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런 식의 비난이나 조롱뿐 아니라 사생활 공개에 대한 비판도 일었다. 그러자 국가인권위원회는 3월 9일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확진환자의 이동경로를 알리는 과정에서 내한 사생활 정보가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노출되는 사례가 발생하는 데 대해 우려를 표”한다는 위원장 성명을 냈다. 며칠 후에는 보건당국이 확진자 개인정보 보호를 염두에 둔 새 동선 공개 가이드라인을 전국 지자체에 배포했다. (내가 사는 곳의 구청은 그 후에 낸 확진자 알림에도 가족 (내 접촉자) 구성과 근무처 등을 명시했다.)

경험해 본 적 없는 바이러스는 경험해 보지 않은 속도로 퍼졌고, 경험해 보지 않은 대책들이 시도되고 있었다. 그 혼란과 불안이 뒤섞인 가운데 질병과 함께 낙인이 번졌다. 최초 발견지가 중국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중국인 및 중국계 한국인이 경계의 대상이 됐다. 대규모 집단감염이 일어난 대구경북 특별재난지역 선포에 신천지 교인을 (교단의 공무 방해 의혹을 수사하는 것과 별개로) 지원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마스크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므로 누구든 마스크를 갖지 못한 상황에 처할 수 있는데도 맨얼굴로 다니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적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재택근무든 거리두기든 예방 수칙을 준수할 수 없는 노동환경에 처해 있어 바이러스에 노출된 이들을 마치 사회악처럼 묘사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낙인찍힌 이들의 재난

그동안 한국사회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동의 실천 대신, 누군가를 낙인찍음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는 길을 택해왔다. 그런 사회에서, 전염을 방지하고 감염자를 치료하는 데에 동참하는 대신 ‘코로나 인간’쯤 되는 것을 찾으려 드는 모습은 새삼스럽지 않다. 신종 바이러스의 위력은 여전히 일종의 미지수지만 공공연히 낙인을 받는 일의 무서움은 다들 이미 잘 알고 있다. 자조 섞어 말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효과적인 전염 방지책이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를 위해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자는 호소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방식으로 사회적 활동을 차단하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 낙인이 사회적 활동을 차단한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공동체의 작동을 파괴한다는 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다. 이미 낙인을 안고 있는 이들, 낙인을 막아줄 아무런 방벽도 갖지 못한 이들의 삶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하다. 동선 공개가 곧 아웃팅이 될 것이므로 게이바, 레즈비언바 등에 드나들지 못하게 될 성소수자들이 있다. 여타의 식당과 전혀 다를 바 없거나 심지어는 더 안전한 곳이었다 하더라도 훨씬 강력한 비난이 가해질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성매매 종사자라면 사회적 낙인과 사법적 처벌을 동시에 받게 될 위험에 처하므로 생계를 포기하거나, 만약의 경우에는 적절한 치료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 것이다.

전용 공간이 아니라고 해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일상이 통째로 무너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등록 이주민이라면 어떨까. 인종차별과 단속 위험 등으로 기댈 곳이라고는 서로 뿐인 이들이 안전한 만남의 공간은 잃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안전한 삶의 가능성을 잃는 것이 될 수 있다. 외국어 안내물이 충분히 제공되지 않아 정보에서 배제되고, 주민등록증이나 건강보험증 같은 서류가 없어 공적 마스크 구매에서도 배제된다. 주류 사회로부터 차단된 채 겨우 가꾸어 온 이주민 공동체마저 단숨에 해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애초에 물리적 공간을 가져 본 적 없으므로 잃을 것도 없는, 다만 통째로 격리되는 시설 생활 장애인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리를 둘 수 없는 자리들

타인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대면 접촉이 필요한 경우에도 마스크를 착용하며, 2m 간격을 유지하기. 전염 예방을 위한 이 ‘사회적 거리’는 나를 비롯한 어떤 이들에겐 생필품을 구매하는 경우 정도를 제외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주류 매체를 통해서는 삶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마스크로 입을 가린 상태에서는 의사소통이 어려운, 활동지원 없이는 현관문 너머의 택배 상자를 열 수 없는, 빼곡히 앉은 직장에 나가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수많은 이들에게 이 거리는 사회와의 거리, 삶과의 거리가 되고 만다.

이들이 불가피하게 ‘침범’해야만 하는 이 ‘안전거리’가 낙인과 비난의 빌미가 된다면 이들은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테다. 혹은 이들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누군가가 또 다른 무언가를 감수하고 끼니와 마스크와 약과 말을 건네는 수밖에 없을 테다. 적어도 아직까지 이 침범은 온전히 애타는 개인들에게 맡겨져 있다. 이렇게 서로의 삶을 지키는 이들이 다행히 바이러스로부터 스스로를 지킨다 해도 다른 어딘가를 다치지 않으리라고는 결코 단언할 수 없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자기 공간을 갖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낙인의 거리 끝에 움직일 틈 없는 점 하나만을 겨우 가진 이들은 갖지 못한 공간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그저 국가의 안녕, 혹은 특정한 누군가의 안녕이 아니라 서로의 안녕을 위한 것이라면, 거리를 두라는 말보다는 각자의 삶이 가능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먼저다. 이 공간은, 낙인이 차지한 거리를 되돌려 받음으로써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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