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기억과 코로나19의 국가주의: 국가는 과연 없었나

[사파논평]

4.15총선 전 열흘 동안 한국사회는 다량의 ‘국뽕’주사를 과다 투여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언론들, 짜깁기 해외 소식들, 담론들, 입장들. 그리고 좌우 가릴 것 없이. 우파로는 조선일보, 중앙일보까지 대한민국의 코로나19 대처능력을 인정했다고 하고, 좌파쪽(?)에서도 그에 대해선 특별히 이견이 없다 했다. 그게 지금 총선의 결과로 나타났다. 박근혜 퇴진시위 때 자유주의세력이 중심으로 서고 좌우를 거느리는 지형이 만들어졌다. 이는 이후 조국 사태로 찢어졌지만, 다시 코로나19 앞에서 봉합됐다.

한국 사회 전체는 국뽕에 젖어있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코로나19 대처를 두고, ‘국뽕’(흔히 국수주의를 세속적으로 이르는 말)에 젖어 있는 가운데, 과연 무엇이 결핍되고 지워져 있는가? 우리는 생각하고 정치화했어야 했다. 진보의 독자적인 입장이 있어야했다. 총선에도 다른 입장을 제출했어야 했다.

여기서 ‘국뽕’의 정의는 단지 국수주의적 애국주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뽕’이라고나 할까? 강한 국가주의까지 포함한 의미로 나는 썼다. 한국에서는 코로나19 국면에서 우익세력이 오히려 국가적인 노력과 국가의 강한 역할에 대해서 찬물을 끼얹고 비아냥거리고, 폄훼하였다. 자유주의 세력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통제에 대해 어떤 불편함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사민주의자들도 국가의 역할을 적극 지지하고 주장하는 국가주의자들이 되었다. 즉 국가의 더 많은 역할과 적극적인 개입에 대해 먼저 요청하기. 코로나19 확진자중 자가 격리 규칙을 어기는 자들, 신천지에 대해서 더 강하게 통제하라고 얘기하기. 왜 빨리 돈을 찍어서 어디라도 뿌려야하지 않냐고 말하기 등.

또한 전체적으로 코로나19에 대한 대처 전략을 두고 이 모두가 한국의 ‘국가’가 한 일로 치부하는 일, 나아가서 현 집권정부가 다 한 일로 치부하는 일. 이런 강한 국가의 배경이 되었던 역사를 다 미화하는 일, 사회적인 격리와 감금에 대해서 있을 수밖에 없는 ‘부대적인 사상자’로 보는 듯한 태도까지. 이 모두가 ‘국뽕’과 관련되는 사회현상들이다.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 아닌가 말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에 이 사회에서는 “국가가 없었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또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터져 나왔다. 이 두 가지의 단발마적인 의문이 바로 촛불시위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사회 화두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 박근혜를 퇴진시키면서 그를 국가가 국가답지 못하게 만든 적폐의 원흉이라고 지목했다. 과연 국가 실패의 원흉은 박근혜일까?

그리고 촛불 2년이 남짓 지난 지금, 한국은 갑자기 국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강한 국가, 잘난 국가, 전 세계에 모범이 되는 국가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다시 의문이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어떻게 “국가는 없었다”던 상황에서 이렇게 한순간에 강한 국가의 면모로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모범이 되는 코로나19 대응을 보이는 국가가 되었을까?

나는 세월호 참극이 일어난 후에 ‘국가가 없었다!’라는 한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혹은 이 사회의 전체성을 덮고 있는 “이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를 문제삼아야한다고 말했었다. 왜냐하면 한국에 국가는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한국에 국가는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만큼 ‘강한 국가’ 유형도 없기 때문에. 해서 “국가가 없었다”가 아니라, 우리가 문제화해야하는 것은 “과연 이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이다. 세월호 참사 앞에 국가 역시 무능한 국가가 아니라 잘못된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실패한 국가(the failed state)’, 국가가 국민에게 실패했다의 의미가 아닌, 국가의 성격에 관한 문제다.

지금 코로나19 앞에서 한국의 국가는 이 ‘실패한 국가’라는 테제에도 답한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견해가 그렇다. 실패한 국가는 ‘정상국가(normal state)’가 되었고, 나아가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국가가 되었다. 비정상의 정상 속에서 유일하게 정상국가인 한국의 국가. 그런데 과연 이런 반전에 근거는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국가주의, 국뽕이 넘쳐난다. 심지어 진보세력까지 국가의 부활, 그리고 국가의 강한 개입에 대해서 유보도 비판도 없이 찬사를 보낸다. 국가가 개입하여 신천지 등 교회들에 대해서 금지령을 내려야하고 엄중하게 법집행을 해야 하고. 국가가 먼저 나서서 돈을 찍어내야 하고, 국민이라면 모두에게 재벌을 포함하여 재난지원금을 살포해야하고.

근데 말이다. 과연 재난 앞에서 국가는 그렇게 중립적인가? 그리고 과연 지금 이 국가는 국민을 구별 없이, 사회집단을 구별 없이 대하고 있는가? 지금 돈이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가장 많이 흘러가는가. 지금 공권력의 위세가 어디로 향할지 가늠은 하는가.

총선 앞에서 국가주의, 국뽕. 아니 코로나19 앞에서 한국이 너무 잘하고 있고, 전 세계 국가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말들이 극에 달했다. 이 담론의 홍수가 총선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선거전야였다. 선거는 연기할 수 없다면서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치러졌다. 하지만 코로나19 앞에서 공포는 국가에 대한 의존을 강화하고, 강한 국가를 요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인 노력은 집권세력의 공이 된다. 코로나19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응 과정은 국가, 그리고 나아가 현 정부가 잘한 ‘치적’으로 된다.

그 과정에서 진짜 누가 코로나19 전선에서 일했는지, 이 사회가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작동하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 과연 그들에게 이 모든 영웅적인 투쟁의 공이나 성과가 돌아갈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정부는 그 과실을 챙길 것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은 50%를 넘었다. 1년 반만이다.

이번 총선은 코로나19 총선이 되었다. 과연 누가 전 지구적인 팬데믹이 만들어낸, 이 생명과 안전의 공포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역설이다. 6년 전 세월호 참극으로 이 사회는 안전사회 담론으로 이행했다. 사회운동과 시민사회 담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 코로나19앞에서 ‘강한 국가’의 지지 배경이 되었다. 대통령도 코로나19와 세월호를 연결해서 발언한다. 우리는 그 교훈을 배웠습니다, 라고. 이것이 이번 선거에서 현 정부와 자유주의 정치가 이긴 배경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진보세력의 차별성은 보이지 않는다. 좌파는 더욱 없다.

지금 코로나19 국면에서 고민의 한 지점은 이것이기도 하다. 계급적인 관점이 탈각된 국가주의와 안전사회담론이 결국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민총화’론으로 모든 것들의 구별선, 균열선, 분리와 배제의 선이 비가시화하고 있다. 지워지고 있다. 또다시 ‘눈먼 자들의 사회’다. 국가에 눈먼 사회. 세월호 참극의 정반대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