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가 불러올 미래

[레인보우]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전기 공급을 하루 두 시간으로 줄였다는데요.”

“압니다. 하지만 저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해서 신경 조또 안 씁니다. 세계 각지에서 헤드라인이 빗발치는데 저는 우리 집 쓰레기만 매주 수거되면 바랄 게 없어요.”

영국의 한 지역구 하원의원 선거 후보자 TV 토론에 출연했던 비비안 룩 후보의 답변이다. 각자의 집에서 이 장면을 시청하던 이들은 황당하면서도 통쾌해했고, 선거에 처음 등장한 룩은 순식간에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첫 선거에서는 참패했지만 몇 년 후에는 의회의 캐스팅보트가 되고, 이후 꾸준히 자극적인 주제로 대중의 지지를 모아 몇 년 후 총리가 된다.

영국 드라마 〈이어즈&이어즈(Years and Years)〉의 이야기다. 기술의 발달로 일자리에서 밀려나고 금융위기까지 겪으며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게 된 사람들은 끊임없는 국가 간 분쟁이나 난민 등의 문제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삶이 피곤하고 괴롭다. 비비안 룩의 말처럼 당장 나에게 닥친 문제 말고는 조또(f***) 신경 쓰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 발언을 모티브 삼아 비비안 룩이 창당한 사성당(****)이 대중의 지지를 모아가는 과정은 전혀 낯설거나 우습지 않고 오히려 현실적인 우려로 다가온다.

문제는 그 ‘조또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일들이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는 미래라는 사실이다. 복잡한 뉴스는 쳐다보기도 싫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모두가 자기 앞에 닥친 삶을 살기에 바쁠 뿐이지만 바로 그 태도가 모두의 미래를 결정짓고 있는 것이다. 국제분쟁의 여파로 인한 금융 대란, 기후변화, 바이러스, 난민의 문제는 곧 각자에게 닥친 현실이 된다. 비비안 룩처럼 대중 앞에서 광대인 척하는 정치인들은 대중이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일들을 미루고, 거슬리는 존재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죽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그들의 이해관계를 완성한다.

지금 한국의 현실은 과연 다를까? 한국 정부의 코로나19 대처가 각국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으면서 그 어느 때 보다 ‘국뽕’이 차오른다 말한다. 하지만 가장 먼저, 가장 취약한 죽음을 맞이했던 정신병원, 요양병원, 시설에 갇힌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한 총선 후보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타국에서 한국인들이 겪은 인종차별에는 분노하지만, 한국에서 일어나는 중국인과 이주민 차별은 외면하고, 국내에 거주하는 미등록 이주민에게 재난소득을 지급하는 일은 ‘지나치다’고 비판한다. 코로나 이후 우리의 일상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말하지만, 이전의 일상을 포기하는 것 외에, 우리가 책임져야 할 코로나 이전 세계에 대한 성찰은 어디서부터 시작돼야 할까.

〈이어즈&이어즈〉에서의 2029년 미래. 그곳에서 가장 오래 세상을 살아낸 할머니 뮤리얼은 손주들에게 “이 모든 일은 다 너희 잘못”이라고 말한다. 1파운드짜리 티셔츠를 기쁘게 살 때 가게 주인은 그 값에서 5펜스를 받고, 밭에서 일하는 어떤 농부는 0.01펜스를 버는 현실을 외면하는 우리. 슈퍼마켓에서 계산원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자동계산기가 대신했을 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던 우리가 지금의 현실을 만들었다고.

성소수자들은 국민 정서, 사회적 합의를 핑계 삼아 ‘나중에’ 만을 반복해 온 정치인들을 지겹도록 보아왔다. 그런데 ‘나중’으로 밀리는 사람들은 성소수자들만이 아니다. “국민이 먼저다”를 외치는 난민 반대 요구에서, 재난소득 지급 대상에서 ‘당연히 제외해도 되는’ 사람들을 따지는 계산 속에서, 코로나가 야기할 미래를 걱정하지만 기후위기에 대한 근본적 성찰은 미뤄지는 세계 속에서, ‘나중에’의 정치는 계속해서 힘을 얻는다. 이번 총선에서 포퓰리즘이나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만을 내세운 정당들이 소수 진보 정당들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지표로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시급히 변화시켜야 할 현실에 대한 정책보다는 여전히 반복되는 숱한 개발 공약과 비례연합정당이라는 꼼수로 절반 이상의 의석을 가져간 여당은 과연 ‘나중에’의 정치를 그만둘 수 있을까?

‘나중에’의 정치는 누군가를 권리 밖에 내버려 두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정치다. 이미 전 세계 코로나의 현실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지금 외면하는 현실이 몇 년 후 더 심각한 우리의 미래로 도래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가장 먼저, 가장 쉽게 ‘나중’으로 밀리는 존재들을 향해 눈길을 돌려야 한다.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복잡한 이슈는 미뤄두자는 이들, 웃으며 기만하는 정치인들을 경계해야 한다. 더 이상 핑계는 필요 없다. [워커스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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