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폭력’과 ‘성산업’

[페미코노미] ‘성착취’라는 용어 사용과 페미니즘 경제


N번방 사건은 ‘성폭력’ 사건이다. 그리고 그 폭력의 형식은 복합적이지만 ‘디지털적’ 요소가 강한 성적 폭력 사건이다. N번방 사건의 법적 처벌은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처벌이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특징은 폭력의 플랫폼이 온라인이라는 점이다. 물론 온라인 폭력은 오프라인의 폭력과 연동돼 있다. N번방 사건은 플랫폼을 활용해 집단적으로 협박하고, 강간하고, 강제적으로 돈을 갈취한 ‘성폭력’의 사례다.

현 시대를 가부장체제의 시대라고 보는 필자에게 ‘성착취’라는 개념은 ‘성노동’과 함께 가부장적 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개념이 된다. 따라서 필자는 우리 사회가 ‘성착취’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면 몇 가지가 전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노동이 있는 곳에 착취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노동운동은 구조화된 자본의 ‘착취’에 맞서 싸움을 해 오고 있다. 그런데 성의 측면에서 보면 이 착취는 ‘자본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이다. 즉, ‘가부장적 착취’가 된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다양하게 이론화해 왔다. 필자는 ‘가부장적 경제’라는 용어를 ‘성착취’와 함께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앞으로 페미니즘 경제학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부분이다.

‘성(섹스)산업’ 또한 자본주의적이면서 가부장적인 산업이다.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성노동자들이 된다. ‘섹스 성산업’에는 현재 시점에서 ‘합법’도 ‘불법’도 있다. 그리고 성적 산업에는 성착취가 전제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착취’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는 당연히 ‘성노동’을 생각하게 된다. 필자 또한 성적 노동이 다양한 착취의 구조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성노동’은 성(섹스-젠더-섹슈얼리티)노동을 말한다.

‘성노동’은 흔히 ‘성산업’에서의 섹스노동을 호명하는 것을 넘어, 가부장적 경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필자가 ‘성노동’을 큰 틀에서 사용하는 이유는 결국 섹스노동을 포함해 다양한 성적 노동(출산, 가사, 임금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직접적으로 가부장체제를 무너뜨릴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을 ‘디지털 성폭력’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착취’와 ‘성폭력’이 구분되는 선이 있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가부장적 사회에서 구성원 대부분은 자본주의-가부장적 노동을 한다. 지식노동도, 공장노동도, 가사노동도, 출산노동도, 매춘노동도 언론노동도 자본주의적이며 가부장적 노동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현재가 자본주의-가부장적 사회라는 데 동의한다면 이 사회의 주류 경제 시스템이 자본주의-가부장적이라는 데에도 당연히 동의할 것이다. 그 시스템 속에서 임금을 받든 무임금으로 살든, 일을 한다면 자본주의-가부장적 노동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 노동은 시스템화 돼 있고 착취 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벗어나려는 다양한 운동들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노동’이라 불리지 않던 일을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시스템을 비틀어서 바꾸어 보려는 시도다. 또한 지금까지 ‘노동’이라 불리지 않는 ‘노동’을 하는 이들을 ‘노동자’라고 호명하는 것은 이 시스템에 대항할 주체로 생각하기 위해서다. 노동이 엄청나게 좋은 그 무엇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구조에 대한 싸움은 법과 제도적 처벌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구조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N번방이라는 사건을 통해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법을 만들고 처벌해야 한다. ‘성폭력’은 처벌하되 그것을 가능케 한 ‘성착취’는 착취구조에 들어가 있는 성적 노동자들이 다 함께 싸워야 바꿀 수 있다. 가부장체제,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부장적 사회의 경제체제 하에서 여성들은 ‘성노동(=젠더노동과 섹스노동과 섹슈얼리티노동 그리고 성별화된 임금 노동)’을 하게 된다.

출산노동이 그렇고 전업주부의 가사노동이 그렇고 매춘노동이 그렇다. 현재의 상품경제, 시장경제, 화폐경제 하에는 화폐를 지불받는 노동과 지불받지 않는 노동이 있다. 화폐가 중심인 경제체제에서 출산을 담당한 여성들은 자신의 일=노동에 대한 지불을 받지 못한다. 가사노동은 이제 지불받는 노동과 전업주부로 대표되는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매춘노동은 화폐로 지불을 받지만, 그 존재 자체가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많은 국가가 매춘노동을 불법으로 놓기 때문이다.

이 국면에서 다시 한 번 필자는 ‘성착취’, ‘성폭력’, ‘성노동’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폭력과 성착취의 구분이 필요하고, 성노동과 성폭력의 구분이 필요하다. 현재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서 운동 주체와 방향을 생각할 때 이 구분은 중요하다. ‘성폭력’에 대해서는 법적 처벌이 필요하다. 하지만 ‘성착취’는 착취의 구조를 살피고 그 구조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성적 착취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있기 때문에 사회를 바꾸기 위해 무엇을 문제 삼고, 어떻게 문제 삼고, 누가 움직일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 만약 성착취도 처벌한다고 하면 결혼산업 같은 성별화된(젠더) 산업을 포함해 성적 산업 전반을 처벌해야 한다.

현재 우리는 노동착취가 정상화돼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착취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오히려 여성운동이 제기한 ‘성착취’가 착취적 구조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더욱 마련했다. 이 계기를 통해 ‘성폭력=성범죄’라는 도식을 확실히 하고 그에 대해 처벌을 하는 동시에, 성노동자들에게 일어나는 ‘성폭력’까지도 처벌할 수 있는 데로 나가야 한다.

이 논의는 실상 더 많은 시간과 지면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짧은 글에서는 선언적인 측면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째, 필자가 말하는 ‘성’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포괄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몇 가지 질문만으로도 금방 드러난다. 한국사회에서 성은 혼란스럽게 사용된다. 성=섹스인가, 성착취=섹스착취인가, 성폭력=섹스폭력인가, 여성에 대한 폭력인가.

둘째, 자본주의-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노동이 있는 곳에 착취가 있으며, 성노동이 있는 곳에 성착취가 있다.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노동’은 곧 ‘임금노동’이었다. 이 통념은 여성들을 노동에서 배제하고 생산에서 배제한 결과다. 그 결과 주류 경제와 경제학에서는 여성의 노동을 포함한 다양한 성적 노동들을 배제했다. 임금노동이 자본주의-가부장적 착취 구조에 들어가 있듯이, 다른 성적 노동들도 자본주의-가부장적 착취 구조에 종속된다. 성노동의 현장에서 ‘성폭력’이 일어나기도 하며, ‘성산업’의 현장에서는 다양한 ‘성착취’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 현장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은 처벌돼야 한다. 만약 ‘성착취’를 모두 처벌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가족 내의 여성노동착취도 처벌해야 한다. 전업주부 노동을 통해 자본과 국가가 유지된다는 것은 가족 내의 주부/여성노동이 착취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자본주의-가부장적 ‘성착취’에 대항하는 여성운동, 페미니즘운동, 그리고 특히 ‘성노동자들’, ‘여/성노동자’들의 운동이 진행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