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이천 참사 유족 없이 ‘특례법 제정’ 추진

‘다중인명피해범죄 특례법’ 제정...유족 요구안 7개 중 1개 수용

38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이천 물류센터 화재 참사가 발생한 지 51일, 정부는 다중인명피해범죄 처벌 특례법을 제정하고, 현장 안전기준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노동계는 그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통해 산업재해에 대한 기업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정부는 ‘다중인명피해범죄 특례법’으로 답한 셈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18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건설현장 화재안전대책’을 발표했다. 대책 발표에 앞서 이 장관은 “이천 화재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근로자분과 유족분들에게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천 참사 유족을 대리하는 김용준 변호사에 따르면 정부는 이날 대책 발표에 유족을 초대하지는 않았다.

  2020년 4월 29일 오후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경기 이천시 모가면의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 현장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출처: 경기도소방재난본부]

공공 및 민간 공사 모두 적정 공사기간 산정 의무화

정부는 계획단계부터 건설공사 안전성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공공 및 민간공사 모두 적정 공사기간 산정을 의무화하고, 안전관리가 불량한 건설업체 명단 공개를 통해 적격업체가 선정될 수 있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또한 대형사고 발생 시 노동자에게 적정한 보상이 이뤄지도록 근로자 재해보험 가입을 의무화한다.

정부는 건축 자재의 화재 안전기준을 대폭 강화한다고도 했다. 이천 사고는 용접 불티가 단열재에 붙어 ‘화재 참사’로 커진 바 있다. 정부는 600㎡ 이상 창고, 1,000㎡ 이상 공장에만 적용되던 마감재 화재안전 기준을 모든 공장·창고까지 확대하고, 샌드위치패널을 사용하는 경우 준불연 이상의 성능을 확보하도록 했다. 화재 안전 기준이 없던 우레탄폼 등 내단열재에 대해서도 난연 성능을 확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가연성 물질을 다루는 작업과 화기를 쓰는 작업을 동시에 하는 걸 금지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감리에게 공사 중지 권한을 부여한다. 또 인화성 물질을 다룰 때 가스경보기, 강제 환기장치 등 안전설비 설치를 의무화한다. 이에 필요한 비용은 정부가 지원한다. 안전 전담감리를 도입해 공공 공사는 모든 규모, 민간공사는 상주감리 대상 공사에 배치한다. 원청엔 사전에 위험한 작업의 일시, 내용, 기간 등 정보를 파악해 하청업체들의 작업조정 의무를 부과할 계획이다.

다중인명피해범죄 특례법 제정 추진

정부는 기업과 경영책임자의 노동 안전 경각심을 제고하도록 다중인명피해범죄 특례법 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법무부 공공형사과는 이날 브리핑에서 “다중인명피해범죄 특례법과 관련해서는 법무부 자체 T/F를 가동해 현재 해당 주문들을 검토 중”이라며 “올 연말까지 국회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계가 요구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두고는 “고 노회찬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나 최근 강은미 의원이 발의한 법안 등을 충분히 검토해 특례법 제정에 참고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대체해 ‘다중인명피해범죄 특례법’을 만들겠다는 셈이다. 법무부는 해당 특례법의 구체적 내용까지 밝히지는 않았다.

또한 기업의 경제적 제재와 경영자 책임을 강화하도록 산업안전보건법의 실효성을 확보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현재 산안법은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사망 사건을 계기로 지난해 전면 개정된 것이다. 산안법 개정에도 산재 사고가 줄지 않자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는 비판 받은 바 있다. 이 장관은 “현재 산안법 개정안에 신설돼 있는 가중처벌 규정이 양형기준이나 구형 기준에 반영돼야 한다”며 “최근 양형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협의했고, 양형위원회는 내년 4월까지 (산안법) 양형기준을 논의하겠다고 전했다”고 했다.

이 장관은 “기업의 경영책임자들이 안전을 외부의 규제 때문에 지키는 게 아니라 경영의 핵심 가치라는 인식을 가진다면 우리의 일터는 획기적으로 변할 것”이라며 “정부는 관계기관 합동으로 이번 대책을 차질없이 이행하고, 현장에서 실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유족도 부르지 않고 대책 발표…현재 산재 처리는 엉망”

김용준 변호사에 따르면 유족이 제도적으로 요구하는 사항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특별법을 통한 선보상 후구상 ▲일정규모 이상의 공사에 근재보험 의무가입 ▲증명책임의 완화 및 전환 ▲징벌적 손해배상 ▲안전 관련 정보공개 의무화 ▲수사 및 조사 과정에서의 유족 참여권 보장이다.

7개 요구안 가운데 정부가 대책으로서 수용한 사안은 근재보험 의무가입 정도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다중인명피해범죄 특례법으로 대체됐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대책에 없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 장관이 “전체적인 민사상 손해배상제도, 형사법 체계와 관련해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안전 관련 정보는 정부 대책에서 ‘위험 현장 정보를 자동 추출할 수 있는 안전보건정보 빅데이터를 구축한다’는 정도로 명시됐다.

김 변호사는 <참세상>과 통화에서 유족 의견을 듣지도 않고 정부가 이 같은 대책을 발표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정부가 대책을 발표한다면 유족에게 명확히 알리고 참석을 권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현재 산재 처리도 원만히 되고 있지 않다. 근로복지공단은 최말단 도급 업체 소속 노동자를 그 위 협력업체 노동자로 거짓 신고했는데,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또한 유족은 발주처 등 임직원과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다. 사고부터 제대로 처리하고 정부가 거대 담론으로 얘기해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한편 오는 20일 이천 참사 희생자에 대한 합동영결식이 이천시 창전동 서희청소년문화센터 내 합동분향소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