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플로이드 시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INTERNATIONAL2]

미국에서 흑인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건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죽음은 널리 알려지기도 전에 곧 다른 죽음으로 덮이고 만다. 올해만 해도 2월 23일 조지아주의 한 주택가에서 25세의 흑인 남성 아머드 알버리가 조깅 도중 백인 아버지와 아들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알버리의 사망 장면은 영상으로 찍혔지만 두 달이 지나도록 가해자는 체포되지 않았다. 3월 13일에는 켄터키주에서 마약사범을 쫓던 경찰들이 엉뚱한 가정집에 들이닥쳤고, 22발의 총탄을 발사해 26세의 흑인 여성 브리오나 테일러를 살해했다. 이번에도 테일러를 살해한 경관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 발생한 한 흑인의 죽음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5월 25일 미네소타주의 미니애폴리스에서 위조지폐 사용을 의심받은 46세의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8분 46초 동안 경관 무릎에 목이 눌려 사망했다. 플로이드가 “숨을 쉴 수 없어”라고 말하는 영상이 공개됐고, 그의 목을 누른 경관이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가 채 끝나기도 전인 6월 13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체포에 저항하던 27세의 남성 레이샤드 브룩스가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며칠 만에 그를 쏜 경관이 해고되고 기소됐다.

2020년의 시위는 놀라울 정도로 2014년 퍼거슨 시위와 닮았다. 2012년 2월 26일 플로리다주에서 17세 흑인 소년 트레이번 마틴이 비무장 상태에서 총을 맞고 사망했다. 그를 쏜 범인은 이듬해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풀려났고,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몇몇 활동가들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구호를 만들어 항의했다. 2014년 7월 17일에는 뉴욕시에서 개비 담배를 팔던 43세 흑인 남성 에릭 가너가 경관에게 목이 졸려 숨졌다. 가너는 의식을 잃을 때까지 “숨을 쉴 수 없어”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법원은 그를 살해한 경관을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 8월 9일 미주리주 퍼거슨에서는 18세 남성 마이클 브라운이 비무장 상태에서 대낮에 경관의 총에 살해됐다. 시민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추모와 항의를 위해 거리로 나왔고, 몇 달 뒤 브라운을 살해한 경관이 가너 때와 마찬가지로 기소되지 않자 다시 뛰쳐나왔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Floyd_protests]

불의한 면책과 그 여파

사람들은 왜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에 거리로 뛰쳐나왔을까? 그것은 플로이드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영상이 특별히 더 끔찍해서가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미국 경찰과 사법 제도가 흑인의 생명을 보호하리라는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시위가 발생한 시점은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이 경관들에게 구타당했을 때가 아니었다. 사건을 담은 비디오는 1991년 3월 3일 사건 발생 직후 공개됐고, 많은 사람이 분노했지만 거리로 몰려나오지는 않았다. 사건이 발생하고 1년 1개월이 지난 1992년 4월 29일, 킹을 구타한 혐의로 기소된 백인 경관 4명이 배심원에 의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흑인들은 대낮부터 거리로 뛰쳐나왔고, 약 5일 동안 방화와 약탈을 동반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마이클 브라운의 사망이 촉발한 2014년의 퍼거슨 시위는 트레이번 마틴과 에릭 가너를 살해한 이들이 합당한 법적 처벌을 받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2020년에도 아머드 알버리를 쏜 백인 부자가 제때 체포됐다면, 브리오나 테일러를 살해한 경관들이 기소됐다면 어땠을까? 플로이드를 살해한 경관이 재직 중 18건의 문제를 일으킬 동안 견책 1회 이상의 징계가 이루어졌다면 어땠을까? 플로이드의 영상이 공개된 직후에라도 경찰 당국이 그를 살해한 경관들을 조사해 처벌하겠다고 발표했으면 어땠을까? 대규모 시위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미국 사회는 대규모의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막을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가졌고, 그 모든 기회를 놓쳤다.

플로이드 죽음 이후 발생한 시위의 규모와 파급력을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번 시위는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2014년 퍼거슨 시위와 1992년 로스앤젤레스 시위, 1980년 마이애미 시위의 규모를 넘어선다. 그리고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이후의 전국적 시위와 비교된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 안전과 경제적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 시위 확산의 한 배경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미국의 인종 문제에 대해 전 세계에서 크고 작은 연대 시위가 발생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에서도 연대 집회가 열렸고, 심지어 미래통합당 의원들도 국회에서 무릎을 꿇고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었다.

또한 주목할 점은 이번 시위가 플로이드의 죽음에 대한 항의를 넘어 인종주의적 역사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주로 노예제와 결부된 남부의 유산이 대표적인 공격 대상이 됐다.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남부군 사령관 로버트 리, 노예소유주였던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등 여러 인물의 동상이 곳곳에서 훼손되거나 철거됐다. 남북전쟁 시기의 미국 남부를 그린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HBO맥스에서 온라인 서비스가 중단됐고,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돼 온 남부연합기는 주한미군을 비롯한 곳곳에서 사용이 금지됐다.

유럽에서는 영국 노예상인 에드워드 콜스턴, 콩고에 대한 잔혹한 통치로 악명 높았던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인도 수탈에 앞장선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19세기 말 남아프리카의 식민화를 주도한 세실 로즈 등의 동상이 대표적인 공격 대상이 됐다. 여기서 언급된 인종주의적 유산 가운데 이번에 새롭게 밝혀지거나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점은 오랫동안 철거를 요구해 온 동상들이 드디어 끌어내려졌다는 사실이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Floyd_protests]

시위를 둘러싼 쟁점들

플로이드 시위와 관련해 한국인들은 인종 차별을 근절해야 한다는 당위에 동의하면서도 몇몇 부분에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대표적인 의문 중 하나는 플로이드가 무고한 시민이 아니라 중범죄를 저지른 전과자이므로 동정하기만은 어렵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그는 마약 소지, 절도, 무장강도 등 여러 혐의로 아홉 차례 수감된 전력이 있고, 그의 범죄행위를 옹호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그를 숨지게 한 것은 그의 전과나 위조지폐 사용 혐의가 아니라 대부분의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경찰의 과잉 진압이다. 과잉 진압은 흑인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간주하는 미국 경찰의 인종적 프로파일링의 산물이며, 인종적 프로파일링에 내재한 인종주의가 이 사건의 핵심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하지만 이 의문에는 다시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조지 플로이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전과자이자 사소한 문제로 경찰의 검문을 받다 사망했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평범한 미국의 흑인 남성을 대표했다. 미국의 사법 제도는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가 내세운 ‘마약과의 전쟁’이 대표하듯 점점 더 많은 수감자를 발생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미국 사법통계국(BJS)에 따르면 1970년 35만 명이었던 미국의 수감자 수는 2014년 230만 명으로 급증했다. 마약 소지 혐의로 여러 차례 수감된 흑인 남성인 플로이드는 늘어난 교도소 자리를 채운 전형적인 수감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활동가들은 더 많은 사람을 가둘수록 교정시설을 운영하는 민간 기업이 더 많은 이득을 보는 감옥산업복합체(prison-industrial complex) 구조를 폐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 이번 시위에서 널리 알려진 ‘경찰 예산 삭감하라(defund the police)’는 구호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대량 구금 자체가 구조적인 인종차별이라는 문제의식은 특히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 경찰의 강경한 현장 대응은 총기 소유 국가의 불가피한 방침으로 이해되며, 미국 사법부의 높은 형량은 정의 구현을 위해 필요한 것이자 한국에서도 본받아야 할 관습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진보적인 정치세력일수록 더욱 소리 높여 여러 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전과자를 양산하는 사법 구조가 존재하고, 그것이 특히 소수인종에게 불리하게 적용돼 왔다는 사실은 이번 시위를 이해하기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플로이드는 전과자인 동시에 다섯 아이의 아버지였고, 트럭 기사와 안전요원으로 일해 온 노동자였으며,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였다. 그의 시신에서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플로이드의 삶에 일어난 여러 일은 다른 어떤 흑인 남성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기에 흑인들은 그의 죽음에 더욱 분노했다.

시위대가 평화 시위가 아닌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 폭도이므로 그들을 지지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자주 제기된다.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한인 상점들의 피해를 기억하는 한국인들이 이 문제에 민감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이번 시위에서도 여러 한인 상점이 약탈 피해를 입었기에 특히 그렇다. 게다가 한국의 집회 문화에서 방화나 약탈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지역 단체나 활동가들이 약탈행위를 선동했다는 증언은 찾아볼 수 없다. 공권력의 강한 대응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다. 약탈은 공권력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시위가 격화되었음을 드러내는 징후일 뿐 결코 이번 시위의 본질이 아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Floyd_protests]

미국 사회에 폭력 시위를 막을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2016년 인종차별에 반대해 경기장에서 국민의례를 거부하고 무릎을 꿇은 미식축구 선수 콜린 캐퍼닉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엄청난 비난만큼이나 많은 사람의 지지와 존경을 얻었지만 그의 선수 경력은 그 사건으로 끝났다. 이번 시위와 흔히 비교되는 1968년의 폭력적 시위는 누구보다도 비폭력적인 저항을 강조했던 킹 목사의 암살 이후 발생했다. 그때도 복싱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해 3년 6개월 동안 링에 오르지 못했고, 멕시코시티 올림픽 시상대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해 주먹을 든 육상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더 이상 선수로 활동하지 못했다. 폭력 시위는 이런 모든 비폭력 시위가 좌절된 다음 발생했다.

인종 차별의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다른 소수인종인 아시아계 미국인을 차별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일정 부분 사실이며 특히 미국 한인은 로스앤젤레스 폭동 당시 흑인 커뮤니티와 직접적인 갈등을 빚은 바 있기에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은 흑인에 대한 차별과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의 오랜 문제다. 그 사례는 19세기 후반의 중국인 배척과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의 강제 격리, 코로나19 상황에서 나타나는 아시아인에 대한 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흑인이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사례는 실제 존재하지만, 동시에 아시아인이 흑인에게 갖는 편견 역시 함께 지적돼야 한다. 그리고 한 소수인종이 다른 소수인종을 공격하는 방식으로는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를 결코 끝낼 수 없다.

플로이드의 죽음이 미국과 세계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는 아직 예상하기 어렵다. 플로이드를 살해한 경관들의 처벌을 요구하던 대중은 이제 브리오나 테일러를 살해한 경관들을 처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에서는 ‘흑인 트랜스젠더의 생명이 중요하다’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당연하게도 ‘팔레스타인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라는 구호를 만들어 낸 세 명의 흑인 여성 활동가 중 한 사람인 패트리스 컬러스는 팟캐스트 ‘피플스 파티’에서 자신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공부하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플로이드의 죽음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국인들은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민중이 단결해 항의한다면 큰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세계적인 인종차별 반대 움직임이 한국에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환기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된 한국전쟁 영웅에게 어떤 예우를 허용할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고질적인 산업재해 희생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이 대단히 한국적인 문제의 해결은 플로이드의 죽음에 연대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이주 노동자가 한국의 가장 위험한 일터들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Floyd_prot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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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 흑인 , 조지 플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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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진제

    써지나

  • ㄱㄱㄱ

    너무나 큰 울림이있는 글이다 잘 읽었어요

  • 이해가안되네요

    '그는 전과자이자 사소한 문제로 경찰의 검문을 받다 사망했고,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도 평범한 미국의 흑인 남성을 대표했다' 라고썼는데 대체 총기무장강도범이 어떻게 '평범한' 흑인남성을 대표하는지 이해가 안가네요. 정책적인 면이전에 조지플로이드는 세간에 공개된 내역처럼 총기강도사건을 수차례 일으켰습니다. 그만큼 위험인물이라는 부분은 배제시켜놓고 마약과의 전쟁이니 이런부분만 쏙 골라서 써놓으니 공감이 안가네요

  • 이혜순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잘못된 지식을 습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인종차별을 이길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전 미국인종차별단체 KKK단원인 Johnny Lee Clary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생각하게 됬어요. 이분은 나중에 KKK에서 나와서 인권운동을 죽을때까지 하셨거든요. 영상 링크 걸어놓을게요

    https://youtu.be/zmCCKjEiy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