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주의를 없앨 ‘진짜’ 대안

[가방끈이 싫어서]

사회: 공현
패널: 피아, 따이루, 윤서
정리: 김한주 기자

“우리는 바랍니다. 하루하루 피 마르는 경쟁 교육이 아닌, 다양한 가능성을 꽃 피울 수 있는 교육을, 학력과 학벌이 행복의 척도가 되는 지금의 잘못된 기준이 사라진 사회를. 학벌, 학력이 어떻든 차별받지 않고 정당하고 충분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 사회를”

2011년, 투명가방끈은 출범 선언문에서 이 같이 밝혔다. 지금껏 학벌주의, 입시경쟁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대안학교, 혁신학교 등의 대안이 나왔지만 갈 길은 멀다. 여전히 학벌에 따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되고, 생존권을 보장받거나 위협받는다. 교육의 결과가 사회 권력, 생존의 문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대학 입시를 거부한 투명가방끈이 이야기를 나눴다.


공현 한국 사회에서 공부는 모두가 ‘시험 치기 위한 공부’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학벌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대학 입시를 강요하는 공부죠. 과연 공부가 그런 존재일까요? 먼저 각자가 생각하는 공부, 배움은 무엇인지 얘기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공현

피아 저는 착실한 공부파였어요. 시험 2개월 전부터 계획을 짰어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도심에서 떨어진 곳이었어요. 언덕을 올라야 하고, 근처에 산도 있었어요. 학교에 도착하면 휴대폰을 반납했어요. 게다가 기숙사에 사니까 접할 수 있는 게 한정적이더라고요. 사회를 볼 기회가 모두 차단됐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촛불 집회에 갔어요. 그때 이런 게 세상이구나, 하면서 사회를 접했어요. 돌이켜보면 고립될수록, 사회와 등질수록 성적이 올라가는 느낌이었어요.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이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를 사회 밖으로 고립시키는 것 같아 회의감이 들었어요.

윤서 공부는 독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어요. 스타강사의 ‘현강’(인터넷 강의가 아닌 현장 강의의 줄임말)을 기다리는 줄이 새벽부터 학원 문밖까지 이어져 있잖아요. 착실하고, 독해져야 하는 것. 잠을 깨기 위해 가혹한 행위를 하는 것. 참으면 얻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 모든 게 질렸었어요.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이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를 사회 밖으로 고립시키는 것 같아 회의감이 들었어요.”

따이루 유튜브를 보면 ‘누구누구의 공부법’ 콘텐츠들도 많아요. 이걸 보면서 ‘공부 자극’을 받는다고 하면서요. 누구는 밥 먹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밥을 갈아서 먹고, 긴 시간 앉아있기 위한 온갖 방법들도 소개하죠. 먹고, 자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데, 그것조차 사치스럽다고 여기는 사회예요. 독하게 버티는 게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거라고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강해요. 비인간적인 삶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어요.

윤서 신체적으로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공부를 위한 ‘최상의 컨디션’을 강조하는 게 더 싫었어요. 집중하기 위해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치료제까지 들이대죠. 인형이 된 느낌이에요. 학교 공부를 생각했을 때 저는 지겨움만 생각나요. 어느 순간부터 공부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시험공부 하려면 배운 걸 다시 복습하고, 예전 것을 계속 보는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저는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제게 필요한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확신이 없다고 느꼈죠. 학교 공부를 배워서 어디에 쓰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래서 전망을 찾을 수 있는 다른 교육을 원했어요.

  윤서

공현 그런 점에서 교육의 본질을 언급해야 할 것 같네요. 저 같은 경우 공부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문제풀이가 주는 쾌감이었어요. 사실 퍼즐 게임을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결과로 나오는 점수가 인생을 좌우하니 스트레스가 되는 것 같아요. 잘 배우면 성공해서 잘 살고, 아니면 돈도 못 벌고 못 산다는 스트레스죠. 교육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으려면 교육에서 얻는 것과 삶에서 얻는 행복이 분리돼야 하지 않을까요?

따이루 학교가 ‘교육’이란 단어를 오염시켰다고 생각해요. 제가 인권 활동을 하면서도 ‘교육’이란 말을 쓰면 사람들이 부담스럽게 느끼죠. 교육이란 말 자체를 싫어하는 거예요. 교육에 대한 표현도 마찬가지예요. ‘교육을 받는다’는 말은 교육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을 내포해요. 반면에 학생을 교육의 주체로 명명하는 ‘교육에 참여한다’는 표현은 잘 쓰지 않아요. 이런 문화는 교육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어요.

윤서 엄기호 사회학자는 ‘공부 중독(엄기호, 하지현 저, 위고, 2015.12)’에서 “어느 순간부터 공부가 삶의 문제를 푸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식민화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어요. 삶의 가치라는 측면에서 현재의 교육을 비판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떤 걸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부에 ‘학문으로서의 공부’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성교육에 참여하는 것도 공부고, 삶의 기술을 배우는 것도 공부죠. 깊이 있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모두가 가볍고 쉽게 이해하는 공부도 좋다고 생각해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채사장, 웨일북, 2019.12)’이 흥행한 이유도 삶에 필요한 교양적 지식을 쉽게 전달하기 때문이죠. 학교에서도 가볍고 쉬운 공부가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교육을 받는다’는 말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을 내포해요. 반면에 학생을 교육의 주체로 명명하는 ‘교육에 참여한다’는 표현은 잘 쓰지 않아요”

따이루 저는 한편으로 ‘지대넓얕’이나 ‘책 읽어 드립니다’ 같은 콘텐츠가 ‘보여주기 위한 교육’이라는 잘못된 흐름으로 갈 것 같아요. ‘책 읽어 드립니다’라는 프로그램은 한 시간 만에 책의 내용을 다 알고, 어디 가서 아는 체해주는 게 핵심이에요. 다양한 정보를 주고, 접근할 수 있다는 취지라기보다 ‘이런 교육 받았다’며 으스대는 사회 분위기를 따라가는 거죠. 학벌주의에 편승하지 않는 교육은 비효율적으로 이뤄져야 해요. 지금 교육은 압축적으로 핵심만 전달하면서 진도에 맞춥니다. 따라가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는 ‘수포자(수학포기자)’ 같은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죠. 그들에게 사회적인 차별이 가해지고요. 비효율적이라 해도, 사람들 각자의 속도에 맞춰갈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공현 저는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내가 잘 모르는 것과 만남’이라고 봐요. 강사나 교사의 역할은 사람이 잘 모르는 생각이나 정보를 만나게 해주는 거죠. 그 만남에서 혼자일 때 얻지 못했을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어요. 강사나 교사의 얘기를 받아쓰는 것이 아닌, 그 얘기를 통해 내가 어떤 변화를 얻을 수 있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그런 점에서 혁신학교, 토론식 교육 등 여러 교육 방식들이 이미 시행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대안 교육’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얘기해 볼까요?

따이루 제가 다닌 중학교에도 대안적 학습, 토론식 교육이 많았어요. 그런데 입시라는 문제의 핵심에서 교육 방법을 토론으로 바꾼다고 교육권이 온전히 보장될까요? 토론도 어차피 ‘수행평가화’하더라고요. 수행평가 점수를 잘 받도록 만들어진 토론이라는 거죠. 저는 ‘그런 식으로 토론하면 좋은 점수 못 받는다’고 혼난 적도 있어요. 나는 내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답에서 벗어난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교육의 내용이 정해져 있는데, 이에 반대되는 얘기를 못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해요. 학교에서의 평가는 교육 위계의 핵심으로 작용해요. 평가가 교육에 참여하는 학생을 위해 최소한의 필요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통제하기 위한 방식으로 쓰이고 있어요.

공현 저 역시 학교에서의 평가가 나를 위해 이뤄진다는 느낌은 없어요. 그런데 옛날 이명박 정부 때 평가에 대한 비판으로 소위 ‘우열반’이 폐지됐죠. 저는 한편으로 혼란스러웠어요. 각자 수준에 맞는 교육에 참여하는 건 중요한데 말이죠. 수준별 수업이라는 취지가 아니라 우와 열을 나누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문제 아닌가요. 대학에서도 외국어1, 외국어2 강좌를 나눠서 스스로 수준에 맞게 선택하도록 해요. 맞춤형 교육이 가능하게 하려면 기존 학교 교육의 학년제나 빡빡한 교육과정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학년에는 따라가야 하는 교육이 있고, 받아야 하는 등수가 있고, 뒤처지면 부끄럽다고 여겨지잖아요.

“학교에서의 평가는 교육 위계의 핵심으로 작용해요. 평가가 교육에 참여하는 학생을 위해 최소한의 필요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통제하기 위한 방식으로 쓰이고 있어요.”

피아 그래서 ‘교육을 누린다’는 관점이 중요한 것 같아요. 교육의 목표가 진로든 취업이든 실질적인 목표를 내세우는 한편, 인문학적 소양 등 맹목적 목표를 설정하기도 하죠. 여기에 도달하는 게 교육인 것처럼 얘기해요. 그런 교육은 권리로서 말하고, ‘누릴 수 있는’ 교육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 대안학교도 문제가 있어요. 부산의 한 대안학교 졸업생들이 성폭력 문제로 법적 대응을 진행하고 있어요. 대안 교육을 하겠다는 교사들은 성폭력을 저지르든 무엇을 하든 다 교육의 일종이라고 해요. (지난 3월 해당 사건 졸업생들은 교사들이 성폭력 피해 학생에게 ‘다 추억이 될 것’이라며 말하는 등 사건을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무엇을 위한 대안인지 모르겠어요. 또 어떤 비인가 대안학교는 한 달 학비만 50만 원에 달해요. 한 학기가 4개월이면 200만 원이에요. 대안학교도 결국 여력 있는 집안만 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어요.

  피아

따이루 경기도가 대안학교를 지원하면서 학비가 내려갔는데, 그전까지는 성공한 ‘86세대’ 자녀들만 갈 수 있는 학교로 치부되곤 했어요. ‘86세대, 그들만의 교육’이란 느낌을 받았죠. 어떤 대안학교에선 처벌이라면서 108배를 시켜요. 심성이 좋아진다면서요. 대개 대안학교는 ‘우리 학교는 성적이 아닌 인성을 가르친다’는 목표를 세워요. 교육 목표가 입시만 아니면 모두 교육적인 것으로 생각할 때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아요.

공현 비인가 대안학교의 경우 공적 관리나 통제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죠. 교육 철학이라는 미명 아래 휴대폰을 압수하고, 처벌하고, ‘스쿨미투’가 제기돼도 처리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점에서 교육 공공성이 더욱 필요하죠. 그렇다면, 우리 투명가방끈이 제시할 수 있는 올바른 대안 교육의 방향은 무엇이 있을까요?

따이루 핵심은 교사가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 문화 시스템이에요. 실제 그런 시스템을 가진 교육기관을 봤는데, 일방적인 주입이 아니라 교육 주체들이 서로 소통하는 구조였어요. 지식이든 학교 운영이든 권력이 교사에게 독점되지 않을 때 새로운 교육, 관계가 만들어지는 느낌이었어요. 교육과정이 빡빡한 곳은 교사와 학생의 위치가 명확히 나누어져 있는 반면에 유연하게 운영되는 곳은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더 얘기하고 반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근본적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겠죠. 교육에서 대가를 기대하는 행위는 없어야 해요. ‘열심히 공부했으니 너는 정규직 될 자격이 있어’, ‘넌 그렇지 않으니 차별받아도 마땅해’라는 인식은 대가성에서 기인해요. 제도적 측면에서는 평생교육을 더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요. 교육에 대한 기회가 확장되고, 이를 위한 공공 지원이 확장될 때 다양한 교육권을 보장하는 방식이 나타날 것 같아요. 교육이 가진 무게를 줄이자는 뜻이에요. 공부하는 나이가 꼭 10대일 필요는 없잖아요. 모든 사람이 다양한 교육에 참여하고, 그 기회와 공간이 많아지면 학벌에 대한 히스테리도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피아 저는 어제(6월 8일) 충남학생인권조례 공청회를 다녀왔어요. 그곳에서 학생이 책임과 의무는 다하지 않는다는 말이 계속 나오더라고요. 이것도 대가성 측면에서 나오는 거예요.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겐 권리를 주고 대우를 하는데, 그렇지 않은 학생은 이 정도 대우를 받아도 참으라고만 하죠. 대가와 차별적 대우를 만드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벌에 따른 대우와 차별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인권으로부터 접근하고, 사람으로서 누려야 한다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교육에서 대가를 기대하는 행위는 없어야 해요. ‘열심히 공부했으니 너는 정규직 될 자격이 있어’, ‘넌 그렇지 않으니 차별받아도 마땅해’라는 인식은 대가성에서 기인해요.”

윤서 저는 나이별로 교육과정을 나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아닌 개인의 취향, 배우고 싶은 것을 온전히 배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공부에 때가 있는 게 아니라 언제든 할 수 있어야죠. 한글 배우러 오는 고령을 위한 자리가 많아야죠. 지금 학교는 대학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요. 사람이 뭘 하고 싶을지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데, 대학 입시라는 획일화된 진로가 이를 막는 것 같아요.

피아 저도 교육이 동질성의 집단을 만드는 걸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교육은 나이로, 성적별로, 경제성으로 집단을 나눠요. 그런 학교에서 오래 지냈던 저는 서울에 와서 지적 장애인을 보고 놀랐던 창피한 기억이 있어요. 동일성의 집단에서 겪어보지 못한 것을 보니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거죠.

공현 교육의 결과가 사회 권력의 격차로 벌어지는 문제를 중요하게 지적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교육의 결과가 생존을 위협해서는 안 되죠. 자격이나 학력이 권력을 얻기 위한 필수 여건으로 여겨지지 않으려면 제도와 구조를 바꿔야 해요. 먼저 대학가는 게 쉬워져야 하겠죠. 돈이든, 경쟁이든 따지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이 되면 졸업장의 가치는 자연스럽게 떨어져요. 그래서 대학평준화 제도는 여전히 중요해요. 자사고 폐지도 마찬가지예요. 동시에 학교에서 성적을 내는 행위 자체를 금지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만 평가라든지 입시교육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따이루 투명가방끈은 2011년 출범하면서 교육의 결과와 사회안전망의 연결 문제를 지적했어요. 지금의 교육은 먹고사는 문제, 그 염려에서 배워야 할 것을 따라가게 만들어요. 교육을 독립적인 별개의 문제로 보는 게 아니라 경제·사회적 안전망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죠. 이런 인식에서 벗어나고, 핵심적으로는 교육의 결과와 상관없이 모두가 누리는 사회안전망이 갖춰져야 한다고 봅니다.

  따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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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좋은 의견들이 속히 교육현장에서 빛을 발하는 날을 기대합니다......늘 건강하시길........

  • 소망

    사회곳곳 어디서나 교육이 바뀌어야 합니다.
    급행열차 타고 가는 느낌의 교육, 강사 훈련을 위해수십명 중의 한 명으로 앉아 있어 주는 교육 숱하게 받아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