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연대 정치의 진면목을 드러낸 장례식

[페미코노미] 그리고 성의 정치-경제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최근 두 장례와 관련해 선명한 이견을 드러냈다. 이는 사회 지배계급에 속했던 안희정 전 지사의 모친상과 박원순 전 시장의 장례였다. 안희정 전 지사는 성폭행으로 감옥에서 형을 치르는 중이고, 박원순 전 시장은 성추행 의혹을 뒤로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경우 모두 성폭력이나 성추행과 연루돼 있었다. 문제는 두 장례식 모두 대통령 명함으로 된 화환이 전달됐다는 점과, 박원순 전 시장의 경우 성추행 의혹에도 ‘서울특별시장’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여기서 묻게 된다. 국가는 누구의 국가이고, 도시는 누구의 도시인가? 정치는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두 장례식은 ‘정치권’의 남성연대와 남성중심성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오래전 영국의 한 페미니스트는 여성에겐 나라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죽음에 대한 애도는 인간사회의 의례이자 삶의 일부를 차지한다. 그런데 그 애도의 형식은 넓은 의미의 정치적 문제다. 장례는 인간사회 삶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에 윤리와 정치적 입장이 드러나는 장이기도 하다. 첨예하게 윤리와 윤리가 경합하고, 정치와 정치가 경합하는 장이 될 수 있는 장이 장례와 조문이다. 이 두 장례의 경우 한쪽은 윤리가 있고 다른 한쪽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윤리가 경합하는 장이 됐던 것이다. 그리고 윤리는 늘 입장의 문제이며 넓은 의미의 정치 문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는 동물을 포함해 국가나 (인간)사회로부터 무시당하는 많은 죽음들 위에 살고 있다.

안희정 전 지사의 경우 화환에 적힌 이름이 그냥 ‘문재인’이었던 것과 ‘대통령 문재인’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박원순 전 시장의 장례가 ‘서울특별시장’으로 치러졌다는 것은 국가정치가 누구를 지원하는지를 보여준다. 최근 연속적으로 있었던 장례와 애도에서 ‘남성’ 중심의 ‘정치’가 또 다시 드러났다. 이 국가와 서울이라는 도시에는 김지은 씨도 살고 있고, 성추행 피해자로서 어렵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도 살고 있다. 그리고 서울시청은 박원순 씨와, 피해사실을 말한 전직 비서가 함께 일했던 공간이며, 성추행 문제가 제기된 공간이다. 피해자가 있는 상황에서 서울시의 이름으로 장례가 치러진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누구의 도시로 여기는지를 드러낸다.

성의 정치는 성의 경제와 연동된다. 성희롱, 성폭력, 디지털성폭력, 스토킹, 여성 살해, 여성과 성소수자 혐오는 성적 주체들의 경제적 상황과 연결된다. 남성중심 정치는 남성중심 경제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이렇게 성의 정치경제가 형성된다. 남성 중심적 경제는 이성애중심적으로 돌아가며 그 틀 내부에서 남성이 권력을 갖고, 여성의 경제권을 제한하며 노동권을 제한한다. 경제권과 노동권을 제한하는 방식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활용된 성(섹슈얼리티)의 통제를 통해서도 일어난다. 여성과 성소수자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함으로써 경제권과 노동권을 제약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전당대회준비위원회에서 최고위원 여성 30% 할당제를 도입하지 않기로 했다. 여성, 노동, 장애인, 여러 직능 단체가 당대표의 인사권에 제한을 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연합뉴스 2020.7.14.)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등장했지만, 2020년 현재까지 밤길과 몰카에 대한 한국 여성들의 두려움은 크고, 여성 살해는 계속되며,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러한 폭력들은 여성들의 공간 감각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경제적 공간 또한 위축시킨다. 여전히 굳건한 가부장적 성의 정치와 경제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정치적 영역에서도, 경제적 영역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정의당의 류호정, 장혜영 의원들은 그러한 정치적 움직임을 보였다. 성폭력에 대한 정치적 움직임과 함께 그 성폭력이 노동권 침해였음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경제 영역에서도 여성의 생산과 노동을 확실하게 가치화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것 또한 달리 말하면 정치적 움직임, 정치경제적 움직임이다. 성폭력에 대한 투쟁은 경제적 영역에서 임신, 출산, 가사 등을 가치화하려는 움직임과 연결돼 있다.

여성에게 일어나는 성폭력은 가부장적 구조와 연결돼 있다. 필자는 사건으로서의 성폭력과 가부장적 구조가 만들어 내는 구조적 조건(혹은 폭력)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부장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자본주의-가부장체제가 형성하는 구조적 조건/폭력에 동참하고 있다. 필자 또한 구조적 조건에 민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그 구조 속의 일원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가부장적 구조의 변혁이 가능한 것은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생각과 노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여성운동과 퀴어운동을 포함하는 페미니즘운동은 사건으로서 성폭력과 구조적 조건/폭력을 구분하며 이 둘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구조적 조건은 가족을 위시한 성적 장치들과 이데올로기들이 형성했고, 지금도 형성하고 있다.

성의 정치와 경제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은 성폭력과 구조적 조건을 바꾸는데 일조할 수 있다. 미투와 데이트 폭력에서 드러나는 상징적이고 물리적인 힘과 권력의 사용은 거리에서나 직장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이러한 성적 침해는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에게 노동권 침해로 이어진다. 성적 대상으로 성애화되는 순간 자신의 생존권과 노동권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일과 일터를 잃어버리게 될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오래전 현대차 아산공장 여성노동자가 상사의 성희롱 문제를 제기해 ‘산업재해’ 인정을 받은 경우에서도 드러나듯 성희롱은 노동권 침해가 될 수 있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 속에서 현재형 혹은 미래형이 아닌 과거형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들이 겪는 모든 고통은 이 시간차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는 분명 남성들이 일방적으로 성폭력을 행하든, 성희롱을 하든 큰 문제가 아니었고,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으며, 남자라면 그래도 되는 것이라 여기는 ‘강간문화’, ‘남성중심문화’, ‘페니스문화’, ‘이성애중심문화’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등장 이후 다양한 성투쟁으로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이제 과거에 머무는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를 사는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게 된다.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그리고 그동안 미투의 대상이 됐던 많은 인사들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 여성/페미니즘 운동이 성의 정치가 성의 경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더 확실히 하면서 성폭력 사건을 넘어 여성 노동자성에 대한 관심을 확장해 나갔으면 좋겠다. 자본주의-가부장체제적 경제의 착취구조에 들어가 있는 여성노동자들에 관심을 확장하는 것으로 이 국가와 도시를 바꾸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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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망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필수노동을 도외시하지 않고 제도적으로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단계라 생각합니다. 과한 몫을 차지하는 자에 거품이 부조리와 폭력의 원인인 것 같습니다.

  • 문경락

    성의 정치와 경제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은 성폭력과 구조적 조건을 바꾸는데 일조할 수 있다. 미투와 데이트 폭력에서 드러나는 상징적이고 물리적인 힘과 권력의 사용은 거리에서나 직장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이러한 성적 침해는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에게 노동권 침해로 이어진다. 성적 대상으로 성애화되는 순간 자신의 생존권과 노동권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일과 일터를 잃어버리게 될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 오래전 현대차 아산공장 여성노동자가 상사의 성희롱 문제를 제기해 ‘산업재해’ 인정을 받은 경우에서도 드러나듯 성희롱은 노동권 침해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