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진중공업 여성 용접공 김진숙

[인터뷰]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내 삶은 평생 떠돌다 끝날 것 같아요”

  스물네 살, 대한조선공사 용접공 시절의 김진숙 지도위원 [출처: 김진숙 지도위원]

스물여섯의 기세등등했던 조선소 여성 용접공이 예순한 살의 나이가 됐다. 맹렬하게 세상과 싸우느라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그의 모진 투쟁과, 울분에 찬 연설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미처 그 세월을 잊고 있었다. 그가 서른다섯 해를 해고자로 살아왔다는 것. 그리고 그 긴 세월 간절히 복직을 염원해 왔다는 것도. 스물여섯에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올해 환갑을 맞았다. 그리고 올해 말 정년을 앞두고 원직복직 투쟁에 나섰다. 오랜 시간 열사들을 호명하던 그가, 이제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최초의 조선소 여성 용접공이자,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자. 대한조선공사 선각공사부 선대조립과 용접 1직 사번 23733 김진숙. 그를 부산에서 만났다.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내 삶은 평생 떠돌다 끝날 것 같아요”

“세월은 영락없는 그 세월인데 저만 중늙은이가 되어 그 세월 앞에 홀로 마주섰습니다. 과거가 지속되는 걸 인정할 수도 없고 미래를 준비하지도 못한 저는 과거로부터도 미래로부터도 고립됐습니다.”

2010. 1. 19. 민주노총 부산본부 홈페이지에 올린 글 中

“35년이면 짧은 세월이 아니지요.” 그의 첫 마디는 이랬다. 까마득한 세월 앞에 기억도, 울분도 깎이고 닳았을 법한데 여전히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다. 5천 명이 넘는 노동자를 거느린 조선소 공장. 화장실 하나 없어 소변은 바닷가에서, 대변은 치구대 밑에서 해결해야 했던 시절. 그는 1981년 대한조선공사 훈련생으로 들어가 삽과 리어카로 말라붙은 똥을 치우는 일부터 했다. 이렇게 큰 조선소에 어째서 화장실 하나 없느냐고 물으면, 회사는 되려 “남자들끼리 화장실이 뭐가 필요하노? 영도 땅값이 얼만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관리직은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생산직은 공장 바닥에 앉아 650원짜리 도시락을 먹었다. 매일 아침 도시락을 가득 실은 차량이 공장 바닥에 도시락을 쏟아부었다. 쥐들이 먼저 뚜껑이 열린 채 널브러진 도시락을 파먹었다. 매번 새까만 꽁보리밥과 양파 서너 쪽, 다 말라비틀어진 김치가 전부였다. 노동자들은 공업용수에 밥을 말아 후루룩 마시고는 다시 일을 했다.

사람도 많이 죽었다. 용접하다 감전돼 죽고, 철판에 깔려 죽고, 족장 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사람이 죽어도 웅성거리는 법이 없었다. 머리가 깨져 뇌수가 파편처럼 흩어진 현장을 보고도 “또 하나 깨졌네” 그러곤 그만이었다. 가용접 된 철판이 그를 덮쳐 두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병원에 동료들이 찾아와 “삼신할매가 니는 살려주려 했나 보다”고 했다. 사고를 겪고 나서야 그들이 왜 동료의 죽음에 둔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그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곳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매일 용접 불똥을 맞아가며 일을 했다. 얼굴과 눈동자에 불똥이 튈 때마다 거뭇거뭇한 상처가 검버섯처럼 피어올랐다. 용접 불꽃에서는 자주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어용노조를 민주화시키면 죽음의 현장을 바꾸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노조 대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어용노조가 저질러온 비리를 폭로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영도조선소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직업훈련소로 출근하라는 부서이동 명령이었다. 부당한 발령이자 노조활동 탄압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회사는 명령불복종으로 그를 해고했다. 1986년 7월 14일. 입사 5년 만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기억하는 영도조선소 현장은 여전히 삼십 오년 전, 스물여섯 살 시절에 머물러 있다. 그리 좋은 기억도 아닌데, 또다시 고생할 이유가 없는데, 왜 그는 35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냥 내 삶은 평생을 떠돌다 끝날 것 같아요. 내 발로 나온 것이 아니니까. 내 잘못이 아닌데 35년간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니까요. 스물여섯 살 때. 내가 왜 해고를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저는 그때 정권이 어떤 건지도 몰랐고. 참 그때는 왜 그렇게 무식했을까요. 경비 아저씨들한테 그렇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막 인사하고 그랬다니까요. 그런 공장을 가고 싶어요. 공장에서 그렇게 끌려 나온 뒤 지금까지 출입금지 상태예요. (해고된 후) 그 공장에 들어가 본 게 박창수 장례식, 김주익 장례식, 최강서 장례식, 그리고 크레인에 올라갔을 때. 그게 다예요. 그렇게 투쟁을 해서 공장에 식당도 만들어지고 화장실도 만들어졌다는데, 나는 거길 못 가봤어요.

복직투쟁을 다시 시작하고 나서, 가슴 아픈 전화를 몇 차례 받았어요. 우리 사회가 모두 민주화된 것처럼, 예전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복권되고, 제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얘기하지만, 해고된 노동자들은 여전히 그대로 살더군요. 노태우 정권 당시 해고되고 구속된 (부산 풍산금속) 노동자 33명 중 단 한 명도 복직된 바가 없다는 사실을 저도 잊고 있었습니다.

제가 출근 투쟁을 하는 새벽에 두 명의 여성 노동자가 옵니다. 옛날 신발공장 해고자들. 한 사람은 삼화고무, 또 한 사람은 지양고무. 이름도, 고향도, 삶도, 자존감도 없었던 노동자들. 주는 밥, 주는 옷 입고, 그날 저녁 토큰 나오면 잔업을 하고, 식권 나오면 철야를 했던 노동자들.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노동조합 하겠다고 다 해고됐어요. 그때는 구사대들이 다 깡패들이었거든요. 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코뼈가 내려앉고, 똥이 담긴 비닐봉지에 맞고, 노동자 한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성폭행당하고, 옷이 다 벗겨진 채 봉고차에 실려서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지고. 그런 노동자들 중 아무도 복직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예순이 다 된 사람들이 새벽에 복직투쟁을 하고, 다시 비정규직의 삶을 살기 위해 출근을 합니다. 그런 노동자들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요. 영원히 버림받은 노동자 수천 명이 아직도 어딘가에 떠돌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둘이나 죽어서 복직이 된다는데도, 심장이 막 뛰더라고요”

이북 사람이던 그의 아버지는 명절만 되면 술을 마시고 울었다. 예전에는 그 모습이 그렇게 궁상맞아 보였는데, 해고자로 35년을 살아보니 이제 그 마음을 가늠할 수 있다. 너무나 돌아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금기의 땅이 존재한다는 것. 가만히 생각만 하고 있어도 눈물 나는 일이었다. 2003년 김주익, 곽재규 열사 사망 후 남은 3명의 해고자 중 두 명이 복직을 했다. 자신도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해고자로 남겨진 세월이 벌써 17년이다. 사람들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그는 복직의 기대와 좌절을 몇 차례 경험하며 가슴앓이를 했다. 2009년 11월에는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김진숙의 해고가 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회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3년과 2010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광풍 속에서 그의 복직은 매번 후순위로 밀려났다. 언제 어디서나 기세등등하던 그가, 돌아갈 수 없는 공장을 이야기하며 속수무책 눈물을 흘린다.

“왜 나만 (복직에서) 빠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저한테 제대로 설명하거나 납득할만한 근거를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2003년 10월, 김주익 지회장이 크레인에서 목을 맸고, 2주 후 곽재규 동지가 도크에서 투신했습니다. 두 사람이나 그렇게 됐으니, 회사가 급박하게 움직였어요. 그때 지부장이 나를 부르더니 ‘해고자들이 복직 될 것 같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사람 마음이 참 그런 게, 심장이 막 뛰더라고요. 사람이 둘이나 죽어서 복직이 된다는데도 좋더라고요. 복직이 되면 공장에 들어가서 주익 씨나 재규 형 몫까지 일해야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좋은 티도 못 내고 있는데, 지부장이 하는 소리가 ‘근데 김 지도는 안 된다요’ 그러데요. 한참 말을 못 하다가 왜요, 라고 물었더니 ‘경총에서 반대한다요’ 라고 하더군요. 나는 경총을 알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왜 경총에서 나를 반대하는 걸까. 왜 반대하냐고 물으니 모른대요. 회사에서 그냥 그렇다고 하더래요.

김주익 지회장 죽었을 때만 해도 조합원들이 밥을 먹었어요. 그런데 재규 형까지 그렇게 되고 나니 아무도 밥을 안 먹는 겁니다. 그냥 술만 마셔요. 구석구석에서 울기만 하고. 그때 회사와 합의를 했는데 다른 요구들은 대부분 수용이 됐어요. 해고자 복직도 관례대로 안건에 들어갔고, 일방중재조항(파업권을 침해하는 대표적 독소조항)까지 해결이 됐지요. 결국 내 복직 하나가 남았는데, 거기서 ‘나도 복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수가 없더라고요. 노조에서 ‘내년에는 꼭 복직시켜줄게요’라고 하기에 ‘알겠습니다’ 그랬어요. 그리고 2006년에 복직된 두 사람이 공장으로 들어간 뒤 정문이 닫혔고…그날 혼자 걸어서 영도다리를 건너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도 내년에는 복직시켜 준다니까, 그랬는데 15년이 흘렀네요.

2008년 노사 교섭 당시에는 노조 간부에게 전화가 왔어요. 노사가 임단협 잠정합의를 했다는 소식이었는데, 일부러 저에게 전화할 이유가 없거든요. 뭔가 잘됐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 또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어요. 그가 하는 말이 ‘사측에서 월 200만 원씩 생계비를 주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소’라고…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았어요. ‘사측에서 왜 200만 원을 준대요?’라고 물으니 그 사람이 당황했나 봐요. 내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라도 회사가 책임지는 거라고 하대요. 그래서 ‘그 돈은 복직을 피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복직을 시키려면 지금 시키면 되는데, 왜 200만 원을 줍니까. 나는 그 (합의)안 못 받습니다’, 그랬어요. 그럼 그 돈을 받아서 비정규직 기금으로 내래요. 나는 2백이든 2천이든 필요없고 복직하겠다고 했고, 그 잠정합의안은 폐기가 됐습니다. 이후 사측은 제가 복직을 거부했다고 소문을 냈어요.”


  스물한 살, 직업훈련소 수료 당시의 김진숙 지도위원 [출처: 김진숙 지도위원]

노사 교섭에서 해고자 복직은 늘 관행처럼 다뤄졌다. 1988년에는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노조가 파업도 벌였다. 해고 당사자인 그는 파업 현장에서 조합원들에게 해고자 복직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했다. 곧 그에게 ‘제3자 개입금지’ 위반 혐의가 씌워졌다. 그리곤 1990년 구속돼 145일을 감옥에서 살았다. 1988년에는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도 벌였다. 그를 포함한 3명의 해고자와 5명의 노동자들이 공장 앞에서 라면박스를 깔고 단식을 시작했다. 회사는 즉시 공장을 폐쇄했다. 노동자 가족들이 그들을 찾아와 ‘공장 문 닫으면 우리 애들은 어떡하느냐’며 하소연했다. 결국 8일 만에 단식을 접었다.

2009년 겨울, 민주화운동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부당해고 인정을 받은 후에는 다시 1인 시위에 나섰다. 24일간 단식도 했다. 매서운 한파에 몸이 얼어붙고 손가락이 곱아들었지만 당시 노조는 노조사무실에 한 번 들어오질 못하게 했다. 1인 시위 피켓을 들여놓는 것조차 막았다. 전기장판이라도 깔아보겠다고 발전기를 돌리면, 기름이 아깝다며 그것마저 빼앗아 갔다. 그를 차가운 거리로 내몰았던 노조 집행부는, 훗날 금속노조를 탈퇴하고 기업노조를 세웠다. 김 지도위원은 그렇게 1년 2개월을 꼬박 싸웠다. 그리고 그즈음, 회사가 정리 해고를 발표했다. 김주익, 곽재규 두 동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대규모 구조조정의 망령이 또 한 번 드리워지고 있었다. 2011년 1월 6일 새벽. 그는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35m 높이의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8년 전, 김주익 열사가 구조조정 철회를 요구하며 129일간 농성을 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소였다. 그렇게 그는 복직의 반환점에 다다르지 못한 채, 또 한 번 구조조정이라는 광풍과 맞서야 했다.

“주익 씨가 버텼던 129일이 희망이었습니다”

“저는 주익 씨가 못해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2011. 1. 7. 85호 크레인에 오른 다음 날, 김진숙의 편지 中

그해 겨울, 부산은 96년 만의 강추위로 얼어붙었다. 짙은 어둠에 잠긴 새벽 3시, 그는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앞으로 조심히 숨어들었다. 크레인 입구는 굵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미리 챙겨 온 커터기로 자물쇠를 자르기 시작했다. 매서운 바람에 손끝이 아려왔지만, 자물쇠는 쉽게 잘려 나가지 않았다. 군데군데 배치된 경비초소를 살펴 가며 쉬지 않고 쇳덩이를 자르고 또 잘랐다. 적어도 동트기 전에는 크레인에 올라야 했다. 등에서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 시간 이십분 만에, 단단한 자물쇠가 툭 하고 잘려 나갔다. 그 길로 그는 35m 높이의 크레인에 올라 309일간의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400명의 정리해고 명단을 보는데, 기가 찼습니다. (명단에 오른) 한 친구는 2003년도에 노조 간부였는데, 그해에 딸이 태어났어요. 척추가 휘어진 심각한 장애를 갖고 태어나서,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씩 수술을 해야 하는 아이였어요. 태어나서 자기 발로 서 본 적이 없는 아이. 그 친구는 지금 눈에 황반변성이 와서 시력을 점점 잃고 있어요. 그 친구 이름도 보이고. 또 한 명은 아버지가 한진중공업 마산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정년퇴직 후 촉탁직으로 일하기로 했었지요. 그런데 회사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아버지가 목을 맸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죽고 나니까 회사에서 아들을 취업시킨 거예요. 그 아들도 명단에 들어가 있고. 아버지 명예퇴직을 조건으로 해고하지 않겠다던 아들의 이름도 들어가 있고.

정말 이런 것들도 인간인가. 2003년에 두 사람이 죽고 정리해고하지 않기로 약속한 특별 단협을 어긴 것도 분노스러웠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 노동자의 생존과 아이들의 미래까지 걸린 일을 아무렇지 않게 결정한다는 것이 용서가 안 됐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크레인에 오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고, 정말 올라가 죽어야 할 지도 몰랐고, 살아 내려와도 구속인데 누구보고 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참 편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을 살았던 85호 크레인에 올랐던 날. 여지없이 2003년의 비극이 떠올랐다. 크레인에서 김주익 열사의 시신이 내려오고, 도크 바닥에서 곽재규 열사의 시신이 올라오던 죽음의 공장. 한 공장에서 두 명의 노동자가 합동 장례식을 치르던 그 날의 장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그리고 이후 최강서 열사까지. 동지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쌓이고 쌓였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그의 삶을 짓눌렀고, 깊은 상처와 자책은 치유되지 못했다. 크레인에 오른 그는 김주익 지회장의 이루지 못한 염원, 살아서 85호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해내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사가 보던 세상을 보고, 그가 겪었을 아픔을 경험했다. 크레인 밑을 서성이던 조합원이 어느샌가 보이지 않을 때. 집회 규모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볼 때. 세상과 고립돼 간다는 불안감이 덮칠 때. 그는 딱 129일까지만 버티자며 이를 악물었다. 그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있을 무렵, 희망버스가 그를 찾아왔다.

“주익 씨가 버텼던 129일이 희망이었습니다. 129일만 버티면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그때가 되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욕을 덜 먹지 않을까 하는. 경찰이나 회사가 도발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소속된 노조 집행부가, 민주노동당 당원이기도 한 그 사람들이, 조합원들이 크레인 근처에 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김진숙이 자신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크레인에 오른 것이라 이야기를 했어요. 크레인 밑에서 집회도 못 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노조 간부라는 사람이 나를 끌어내리겠다며 오함마를 들고 오기도 했어요. 모욕감, 그걸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내 상태를 아는 동지들은 밤에 몰래 나를 끄집어내려 했다고 하더군요. 마취총까지 생각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 제 발로 걸어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야 했어요.

크레인 위에 있으면 오감이 열려요. 마치 눈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샅샅이 보입니다. 조합원이 1200명에서 60명이 된 날, 주익 씨가 목을 맸다는 것을 아니까, 나는 그냥 연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죽을힘을 다하는데도 상황이 점점 힘들어지니까. 그리고 나도 사람이니까, 내가 여기 버티고 있는 게 조합원들을 더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조합원들의 선택을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고. 그런데 그때 희망버스가 온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와 봐야 몇 명이나 오겠나, 그랬어요. 집회라고 하기 뭣해서 희망버스라 하나보다, 그랬지요. 그런데 1차 희망버스가 오고 2차, 3차로 연결되면서 희망버스를 기다리게 되더라고요. 뭔가 싸우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들은 크레인 밑에서 웃으며 춤을 췄어요. ‘엄근진’의 역사가 있는 85호 크레인에서 웃고 춤을 춘다는 게 얼마나 발칙해요. 김여진 씨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이라는 문구를 써서 크레인에 올려줬을 때, 무언가 열리는 느낌이었어요. 크레인에서 두 번째 장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5차까지 연결된 희망버스는 역사의 담을 새로 넘었어요. 한진중공업의 담을 넘었던 건, 우리에게는 돌파의 역사였지요. 민주노총 조합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새로운 연대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어요.”


“나는 얼마나 무지하게, 그것들을 외면한 채 살아왔던가”

“그 시절을 생각할 때 스스로에게 가장 부끄럽고 화가 나는 일은 열여덟 시퍼런 나이에 어찌 그리 모든 걸 빨리 체념하고 왜 그리 당당하지 못했을까 하는 거다...(중략)...결국 난 그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되어 주지 못한 채, 내 스스로에게도 아무것도 되어 주지 못한 채...”

- 김진숙 《소금꽃나무》 中

309일을 고공에서 살다 내려왔다. 동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8년간 보일러도 켜지 않은 채 한뎃잠을 잤다. 5년간 수배생활도 했고, 단식도 했다. 세 차례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두 차례 수감생활을 했다. 고난으로 굴곡진 세월을 넘고 건너기 바빠, 정작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잊고 있었다. 그 시간을 버틴 맷집이 곧 건강이라고 과신해, 내 몸 돌보는데 그렇게 인색했다. 자고 일어나면 몸무게가 줄어 있었고, 그만큼 기력과 의욕도 줄어들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무력감과 불안감이었다. 홀로 병원을 찾아 조직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그에게 유방암이라고 했다. 대학병원을 가야 한다기에,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아도 되는 동아대병원으로 갔다. 수술과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끔찍한 육신의 고통은 정신까지 갉아먹었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왔다. 두문불출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다 지난해 겨울, 느닷없이 대구에서 부산까지 100km가 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영남대병원 옥상에서 고공농성 중이던 오랜 친구 박문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출처: 박다솔 기자]

“암이라는 것이 한없이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것이더군요. 1차 항암이 끝나고 열흘 뒤 샤워를 하는데, 머리카락이 계속 흘러내리는 겁니다. 두 시간 동안. 끔찍하고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내 의지로 삭발을 한 게 아니니, 부끄럽고, 숨기고 싶고. 항암 후에 약을 복용해야 하는데, 골다공증과 관절통 같은 부작용이 나타나요. 그래서 물병도 못 들고 걸레도 못 짭니다. 끊임없이 부작용을 겪어야 하면서도 약을 끊을 수 없으니,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고. 수술 후 한동안 씻지를 못하니 목욕탕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러다 목욕탕에 갔는데, 조그만 아이가 제 몸을 보더니 엄마 뒤에 숨더라고요. 이런 몸을 처음 봤겠죠. 그때 내 몸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었어요. 트위터도 못 했어요. ‘암’이라는 말을 못 보겠어서요. 사람들이 ‘암 걸릴 것 같다’, ‘발암물질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상처가 되더라니까요.

그때 박문진이 고공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전화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더라고요.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안 되겠구나. 내가 겪어보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알잖아요. 저쯤 되면 어떤 상태라는 걸. 언론에 보도조차 잘 안 되고 있고. 저렇게 200일. 300일, 1년이 지나면 어떡하나, 답답했어요. 그래서 고공농성 187일째 되는 날, 대구로 무작정 걷기 시작한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박문진이라는 친구를 구하러 간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구원을 받았죠. 그때는 휴대폰이 오래돼서 추운데 나가면 배터리가 나가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지도하나 없이 나서서 산속을 헤매고. 그러다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전화가 와서 ‘내일은 우리랑 같이 가입시더’ 그러더라고요. 둘째 날에 노조에서 왔는데,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요. 셋째 날에 하루 종일 비가 왔는데, 밀양 상동역에 도착하니 어르신들이 과일이랑 뜨거운 차를 끓여놓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넷째 날이 크리스마스였는데 80여 명이 왔다고 하더라고요. 일주일을 그렇게 걷고, 박문진을 만나서 막 눈물의 상봉식을 했잖아요. 그러고 나니 마음이 좀 놓이더라고요. 하여튼 제가 치유를 받은 느낌이었어요. 한 달여 후에 영남대의료원도 합의를 했고, 이제 내 싸움이 남은 거죠.”


정년을 4개월 앞둔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자지만, 그는 자신이 마지막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역시 삼십여 년 전 해고돼 세상에서 잊힌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 중 한 명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열여덟에 만난 가정집 공장 순이, 대우실업 여공들, 그리고 시내버스 안내양 시절의 자신까지. 숱한 폭력과 차별을 겪었던 그들이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있다. 어째서 그 시절엔 그들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무것도 되어주지 못했을까. 예전에는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그들의 삶이 큰 부채감으로 가슴에 내려앉는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자신과 그들의 겪은 폭력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가장 반성하는 것은, 당시 순이에 대한 저의 감정이 혐오였다는 거예요. 왜 쟤는 그걸(성폭력을) 강하게 거부하지 않을까. 왜 그냥 당하고 있을까. 그게 순이 책임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때는 반장이라는 놈들이 10대 여성 노동자들 가슴을 주무르고, 월급봉투를 줄 때도 엉덩이를 만지고, 재단실에서 남자애들이 성기를 내놓고 흔들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 너무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이었어요. 시내버스 안내양 시절에는 산 속 종점에 있는 사무실에서 배차 주임들이 안내양을 데리고 가서 그 짓을 하고. 그들은 합의된 성관계라고 얘기를 하겠죠. 그런데 안내양들을 그렇게 해야 한탕이라도 덜 뛸 수 있는 거예요. 나는 그런 애들을 혐오했었어요. 경멸하면서 살았죠. 그게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몰랐어요. 한진중공업에 입사해서는 저한테 음담패설, 성희롱하는 아저씨들한테 더 센 농담을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게 나의 처세이자 삶의 요령인 것처럼. 그런데 페미니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끄러워졌어요. 얼마나 나는 무지하게 살아왔던가, 얼마나 그것들을 외면한 채 스스로를 강자로 포장하며 살았던가. 그걸 깨닫게 된 거죠.”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이 무뎌지지 않기를 염원한다. 해고된 채 오랜 세월 세상을 떠도는 유령 같은 노동자들이 잊히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오랜 두문불출을 끝낸 김진숙 지도위원은 다시 한번 복직투쟁에 나선다. 인생의 가장 큰 업이자 과제, 그리고 소망인 원직복직을 이루고 나면 이제 정말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서른다섯 해의 세월을 거스르는 싸움. 대한조선공사 선각공사부 선대조립과 용접 1직 사번 23733 김진숙이 또 한 번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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