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Care)

[워커스 사전]


하찮은 일, 시시한 일, 귀찮은 일. 먹고 치우고 씻고 쓸고 닦는 뒤치다꺼리 노동. 하고 또 해도 매일 이어지는 나날의 노고. 얼마 전까지 ‘돌봄’은 그런 것이었다. 인간의 자유와 발전과 진보를 제약하는 조건. 특히 그 짐을 불평등하게 나눠 진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 그래서 거기에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은 최소화되거나 사라질수록 좋은 것. 그런 ‘돌봄’이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중요한 사회적 화두로 등장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돌봄’이었기 때문이다. 팬데믹은 돌봄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과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동시에 위험에 빠트렸다. 이와 같은 상황은 돌봄에 대한 사회적 성찰을 요구했고, ‘돌봄’이란 용어는 갑자기 주목받는 개념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돌봄을 담론화하고 사유해나가야 할까?

프랑스의 마크롱 정부는 지난해 5월 의료·사회 정책 방향 제시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을 설립하면서 ‘CARE(Comité Analyse Recherche et Expertise)’라는 이름을 붙였다. 미국에서 지난 3월 코로나19 피해 구조 및 경기 부양을 위해 의회에서 통과시킨 법안은 ‘케어스 법(Cares Act)’이었다. 하지만 케어스 법이 누구를 케어 했는지는 몇 달 후에 곧 드러났다. 10월 5일 CNBC는 미국 정치자금 감시단체인 ‘책임정치센터(CRP)’의 보고서를 인용해 2조2000억 달러 규모의 부양책에 지원을 따내기 위해 3,200개의 기업과 무역협회 및 기타 단체들이 이 법안에 로비 활동을 집중했다고 보도했다. 그에 따르면 로비에 많은 돈을 쓴 기업들이 대규모 지원 혜택을 받았는데, 1억6800만 달러의 로비자금을 쓴 헬스 업계는 1,500억 달러를 케어스 법을 통해 지원받았고, 항공 업계는 2,900만 달러를 쓰고 320억 달러를 받았으며 농업 부문은 3800만 달러를 투입해 190억 달러를 받았다. 이것은 정부가 먼저 ‘케어’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인 에블린 피에에는 ‘친절의 횡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유럽에서 부상한 케어 사상의 기만성을 비판했다. (한국판 2020.12월호) 팬데믹 상황에서 강박적으로 쓰이는 ‘취약한(vulnérable)’이라는 단어는 지배층이 가진 ‘케어 사상’의 특징을 나타낸다. 취약한 상태란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마크롱은 자신이 내린 결정들을 발표할 때 “우리 아이들”, “가장 취약한 우리 국민들”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런 용어는 취약한 존재를 강자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자로 은연중에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법은 시민들을 ‘주권자 인민’이 아닌 정부의 케어가 필요한 나약한 존재로 전환한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자신의 취약한 국민이 해고를 당할 때는 해고의 가혹함을 규탄하면서도 기업에 돌봄의 의무를 강제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는 달랐을까? 노동자들이 해고당하고 죽어가도 마음만 아파할 뿐인 정부의 친절한 횡포는 한국에서도 똑같았다. 문재인 정부는 ‘해고금지’ 명령 없는 고용유지지원금으로 기업이 노동자들을 자발적으로 케어하도록 ‘친절하게’ 권고했다. 하지만 아시아나의 기내 청소와 비품공급을 맡는 하청업체인 아시아나케이오는 90%를 지원하는 고용유지지원금에서 10%의 기업부담금도 지기 싫어 보란 듯이 노동자들을 대량해고했다. 정부의 대책이나 제재 조치는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보건의료 종사자를 포함해 돌봄 노동자에게 감사를 표하는 ‘덕분에 챌린지’ 같은 전시성 캠페인을 벌였지만, 2021년 국방비 예산은 전년 대비 5.5%가 증액된 52조 9천억 원을 편성하면서도 공공병원 확충 예산은 ‘0원’이었다. 돌봄의 사회적 중요성이 증대되는 시기에 학교 돌봄 교실을 민간위탁하는 법안을 추진해 돌봄 노동자의 노동권을 위협한다. 노동법 개악으로 통과된 탄력근로제는 돌봄노동자에게 더욱 치명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노조 할 권리를 무력화하는 노동법이 여야합의로 통과되자마자 LG트윈타워 빌딩 청소노동자들은 노조 결성을 이유로 대량해고 됐다. 한편으로는 코로나 시대에 돌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돌봄을 떠받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태도는 정반대다.

지금 케어의 유행은 뭔가 의심스럽다. 녹색 시장이 생태 위기를 낚아채는 것처럼 과거에도 사회적 돌봄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가장 빨리 낚아챈 것도 시장이었다. 돌봄의 사회화는 국가화에서 시장화로 이행했지만, 시장의 돌봄에는 케어 상품의 소비자와 자신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으로 그것을 제공해야 하는 돌봄 노동자 사이의 계급적 불평등이 분명 존재한다. ‘돌봄’이란 말은 아름답지만, 그것이 노동이 아닌 사랑이나 희생으로 불려왔던 기만처럼 아름답게 치장될수록 정당한 사회적 가치나 대가를 인정받는 것과는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행히 팬데믹 사태 이후 등장한 ‘필수노동자’라는 개념과 함께 필수노동의 핵심을 구성하는 돌봄 노동의 가치도 재조명되면서 돌봄의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현재의 경제체제 안에서 돌봄 노동의 처우개선이나 제도화 같은 정책 수립의 차원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으로 돌봄의 의미를 다시 사유하고 정치적으로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누가 누구를 돌보느냐는 돌봄의 관계는 그 자체로 권력의 관계를 드러낸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 사이에 성립하는 가장 오래된 지배 관계의 원형이다. 귀족과 평민, 신과 피조물, 왕과 신민, 영주와 속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보호-피호(patron-client)’의 관계는 오늘날에도 국가와 시장 및 가족 제도 내의 다양한 ‘부양-피부양자’의 관계로 변형돼 계속 재생산된다. 이런 방식의 돌봄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목자가 가축을 돌보듯 지도자가 백성을 돌보는 모델을 정부와 시민의 관계에 적용해 국민을 잘 돌보는 정부를 마치 ‘좋은 정부’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선량한 목자의 온순한 양 떼가 되는 것을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을 가축화하고 항구적으로 유아화하는 통치에 기반한 국가가 좋은 정치공동체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철학자들은 이러한 ‘보육 국가’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배치된다고 비판해왔다.

한국은 시민을 돌보는 국가를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데다 국가와 기업의 돌봄 시스템이 수립되기도 전에 IMF 사태를 계기로 돌봄이 급속도로 시장화돼버렸다. 때문에 유럽식의 ‘복지국가’에 대한 선망은 여전히 크고, 돌봄의 사회화를 생각할 때도 ‘복지제도’ 내의 한계를 벗어나 상상하기 힘들다. 시민을 학살하고 고문하고 굶게 만드는 정부는 물론 나쁜 정부지만, 시민을 배부르게 먹이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정부가 반드시 다 좋은 정부는 아니다. 게다가 그 풍요와 안전이 다른 곳의 빈곤과 불행을 대가로 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은 더욱 좋은 정치가 아니다. 나치 정부는 독일의 부국강병과 노동자에 대한 복지정책에 얼마나 힘을 쏟았던가.

그런 점에서 돌봄에 대한 보다 정치적인 관점과 해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돌봄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이나 돌봄의 사회화 요구는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보편적이고 당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돌봄을 둘러싼 젠더와 계급의 정치적 입장 사이에는 쉽게 합의될 수 없는 쟁점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성, 노동자, 민중의 관점에서 어떤 돌봄을 원하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사회화되기를 원하는가에 대한 상을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시민 일반의 ‘안전에 대한 요구’는 국가의 지배 세력에 의해 종종 내부의 적들을 퇴치하는 명분으로 사용된다. 미국에서 9·11 이후 안전한 삶에 대한 시민적 요구를 전쟁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삼은 것이나, 방역에 대한 정부의 책임성 요구가 정반대로 집회와 결사의 자유 침해를 정당화하고 안전한 삶을 요구할 권리까지 박탈하는 명분으로 이용되는 것이 그 사례다. 안전 담론이 비판자나 소수자를 내부의 위험 세력으로부터의 안보 담론으로 전환됐던 것처럼 돌봄의 요구도 정부가 시민의 자율적 삶의 권리를 박탈하는 수단으로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방역 사회는 일상화된 감시 통제를 정당화한다.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요구는 집단안보를 위협하는 반역적 주장으로 몰아붙여 진다. 우리는 이미 스웨덴 같은 대표적인 ‘돌봄 국가’에서 집합적인 인간 안보(human security) 논리가 어떻게 시민을 대상으로 ‘집단면역’이라는 공리주의적 실험으로 귀결됐는지를 확인한 바 있다. 전체를 위해 노인과 질환자 등 특정한 ‘취약자’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는 파시즘의 광기가 어떻게 차가운 합리주의로부터 태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다수의 시민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는 생각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시민과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예방해야할 다른 위험한 시민들을 분리하고 선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되며, 생명 통치 권력을 쉽게 용인한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부자를 돌보는 정부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례는 세계 도처에서 나타났다. 의료진과 약품 대신 군대와 경찰을 보내는 정부를 향해 가난한 사람들은 저 공권력이 무엇으로부터 누구를 지키기 위한 것인지 묻곤 했다. 팬데믹은 돌봄의 계급성과 차별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가장(dominus)이 식솔을 다스리는 ‘보호-피호’의 돌봄 관계는 안전을 충성과, 복지를 복종과 교환한다. 이와 같은 보호-피호 관계는 근대 사회가 새롭게 구축한 가족제도 내의 부양-피부양 관계로 이어진다. 서구 유럽의 복지국가에서 국가의 돌봄과 기업의 돌봄은 국가와 기업이 가족의 부양자를 부양함으로써 그에 예속된 피부양자들이 부양되도록 만드는 방식이었다. 국가가 시민을, 기업이 노동자를 돌본다는 거꾸로 된 돌봄 신화는 여기서 탄생했다. 남성 임금노동자(남편)가 그 돈으로 여자(아내)와 아이들을 먹여 살린다는 사고방식도 마찬가지다. 유산자가 무산자를, 부자가 빈자를 먹여 살린다는 생각은 부국과 빈국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성립한다. 돈을 벌어오는 사람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신화는 오늘날 기업이 노동자를 먹여 살리고 국가와 사회를 부양한다는 논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처럼 뒤집힌 돌봄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자와 약자 간의 지배 관계’로서 나타나는 보호-피호의 돌봄 관계를 깨고 다시 전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반다나 시바는 <이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란 책에서 인류를 먹여 살리는 자가 누구인지를 다시 묻고 다시 규정한다. 다국적 농업기업이 세계 식량 시스템을 장악했지만,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식량 생산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것은 ‘소농’이다. 그들은 대부분 여성 농민이고, 토양과 종자를 돌보고 지킴으로서 경작지의 생태적 다양성을 보존해내고 있는 것도 이들이다. 가부장제적 돌봄 관계를 전도하는 이 원리는 다른 영역으로도 얼마든지 적용되고 확장될 수 있다. 시바의 질문은 ‘세계를 돌보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답 역시 비슷하게 나올 것이다. 여성과 농민을 포함한 돌봄 노동자의 노동이 이 세계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돌봄을 떠받치고 있다. 돌봄 노동을 하는 자가 돌봄을 받는 이를, 밥을 하는 자가 먹는 자를, 노동자가 기업을, 시민이 국가를, 돌보고 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식으로 돌봄의 주체를 재구성함으로써 ‘돌봄 경제’를 자본주의 경제의 대안적 모델로 새롭게 개념화할 수 있다. 돌봄의 가치를 하찮은 것으로 격하시킨 것은 남성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엘리트주의의 결과다. ‘돌봄’을 중심에 놓는 경제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탈성장과 평화·생태주의적 탈자본주의 경로를 찾는 에코 페미니스트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자주 관리나 다양한 민중적 코뮌 사례를 통해 우리는 정치적으로 확장된 의미에서의 ‘민중의 돌봄 경제’를 이해하고 적용해볼 수도 있다.

인간 존재에 돌봄이 갖는 근원적 의미를 알려주는 오래된 서양의 우화가 하나 있다. 라틴어로 돌봄은 ‘쿠라(cūra)’인데, 이 우화 속에서 인간은 남성 신의 ‘명령(logos)’이 아니라 여신 쿠라의 ‘손’에서 빚어진다. 쿠라가 빚어낸 흙덩어리에 혼을 불어넣는 것은 유피테르지만, 그의 몸은 땅에서 왔다. 이렇게 해서 땅의 흙과 하늘의 숨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탄생한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은 그는 땅도 하늘도 아닌 쿠라에 속한다. 시간의 신인 사투르누스는 인간의 이름을 둘러싼 신들의 분쟁을 중재하여 판결하기를 이름은 ‘후무스(humus:흙)’로 하고 이 형상이 죽을 때 숨을 준 유피테르는 숨을 가져가고 몸을 준 텔루스는 몸을 가져가되 형상을 만든 것은 쿠라이므로 살아있는 동안은 쿠라의 것이라 한다.

이 우화가 뜻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평생 끊임없이 염려하며 살아야 하는 약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들이 만들어낸 노예의 교육학이다. 인간이 쿠라(돌봄, 염려)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생로병사의 시간을 겪는 존재로서 인간이 타인과 스스로를 살피고 돌보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경제와 신자유주의는 돌봄의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이윤을 쌓지만, 타자와 세계를 염려하고 돌보는 것이 인간의 근본 조건이다. 흙에서 태어난 민중에게는 대지와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자주적 역량이 있다. 노동자 민중을 무력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국가와 시장의 돌봄 대신 자율과 자치의 역량을 강화할 돌봄의 경로를 찾아야 한다. 지금도 수많은 쿠라의 신들이 우리를 돌본다. 노동자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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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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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이 우화가 뜻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평생 끊임없이 염려하며 살아야 하는 약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들이 만들어낸 노예의 교육학이다. 인간이 쿠라(돌봄, 염려)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생로병사의 시간을 겪는 존재로서 인간이 타인과 스스로를 살피고 돌보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경제와 신자유주의는 돌봄의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이윤을 쌓지만, 타자와 세계를 염려하고 돌보는 것이 인간의 근본 조건이다. 흙에서 태어난 민중에게는 대지와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자주적 역량이 있다. 노동자 민중을 무력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국가와 시장의 돌봄 대신 자율과 자치의 역량을 강화할 돌봄의 경로를 찾아야 한다. 지금도 수많은 쿠라의 신들이 우리를 돌본다. 노동자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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