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추 먹고 싸우는 비건 페미니스트 래퍼

[3·8 여성의 날 특별기획 인터뷰①]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

재난지원금 받고 양배추 사는데 썼지
non vegan들 listen 양배추 소화에 좋지
파란소년이 말해 공황 장애가 왔대
boy welcome to the hell 지옥원탑
이름 SLEEQ
돈이랑 여자 얘기 좋아하니까 좀 해줄게
2017 성별 임금격차 36.7
양성평등 얘기 좋아하니까 좀 해줄게
젠더퀴어 non binary 내가 엠넷에 이식
이제 알겠냐 이게 real flexin
내 다음 목표는 zero plastic
-슬릭 ‘미안합니다 판사님’ 중


[출처: 민영영]

슬릭은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거의 유일한 래퍼다. 여성과 성소수자 등 약자 혐오를 반복하는 게 힙합이라면 ‘한국 힙합’ 안 하겠다며 울타리를 벗어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얼굴은 2016년 데뷔 싱글을 발매한 후부터 내내 신선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019년에는 “공장식 축산업에 일조하지 않겠다”라며 비건의 삶을 선언했다. 그 후로 ‘GO VEGAN’이라는 구호와 함께 비건의 삶을 널리 전파하고 있다. 지난해 출연한 엠넷 프로그램 <굿걸: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굿걸>)에서도 매일 비건 도시락을 싸다니며 비건의 삶을 미디어로 알렸다. 더불어 그는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페미니즘 조류에 “누군가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학문은 없다”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슬릭의 신곡 ‘미안합니다, 판사님’이 사운드 클라우드에 공개된 지난 2월 16일, 서대문 모처에서 그를 만났다.

이틀에 한 번씩 무너지지만, 휘청이는 삶도 하나의 삶인걸

“‘이제 아무도 내 노래는 안 듣겠지’라며 자신감이 바닥을 치는 시기가 있었어요. 다른 일로 돈을 벌고 음악은 취미로만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굿걸>에 출연하게 됐고 제 음악을 처음 들어보신 분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셨어요. 이제 음악으로 돈을 벌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복권을 산 것에 비유하고 싶은데요, 우선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제게 주어진 거죠. 아직 복권을 긁진 않았답니다. 음악 작업을 많이 하면 당첨률이 올라가겠죠?”


<굿걸> 종영 후 반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향한 의심은 계속된다. 그는 여전히 이틀에 한 번씩 ‘나는 망했어’ ‘나는 끝났어’라고 절망한다. 하지만 슬릭 자신도, 그의 팬들도 이제는 안다. 계속 휘청이겠지만 곧 추스르고 원래의 템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런 식의 불안한 삶도 다양한 삶의 모습 중 하나라는 것을. 그래서 그의 팬들은 지나친 걱정보다 ‘슬릭님 제가 오늘 이태원에 갔는데, 글쎄 크림 커피가 너무 맛있는 거 있죠’라는 말들로 슬픔에 빠진 그를 위로한다.

“우리 사회엔 우울한 사람을 비정상적인 상태로 여기고, 건강한 상태로 돌려놔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그런데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도 이야기하듯 ‘질병권’이라는 게 있거든요. 아파도 살아가야 하고, 아픈 몸으로 계속 살 수도 있고요. 완벽한 건강이 없다는 사실을 저와 제 팬분들은 이해하고 있죠.”


슬릭은 2011년에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시작해 2012년 믹스테입을 발표하고, 2013년에 싱글 앨범을 발매하며 공식 데뷔했다. 2016년과 2018년 각각 ‘COLOSSUS’, ‘Life Minus F IS Lie’라는 2개의 정규 앨범을 냈다. 데뷔 9년 차를 맞은 슬릭에게 그가 꼽은 성취와 실패의 경험을 물었다.

[출처: 민영영]

“음악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저의 가장 큰 성취입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고, 악기도 못 다루거든요. 악기를 다루려면 진득하게 훈련해야 하는데 저는 그걸 못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컴퓨터로도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시대가 열린 거죠. 저 자신을 음악 만드는 사람, 노래 만드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해요.”


페미니즘 리부트는 각 분야에서 일련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표면적으로라도 성평등은 중요한 과제로, 성차별과 여성 혐오는 뭇매를 맞을 수 있는 이슈로 확대됐다. 하지만 대표적 여성혐오의 장으로 꼽히는 한국 힙합에선 여전히 여성 혐오가 쏟아졌다. 한국 힙합의 대중적 지지를 끌어낸 <쇼미더머니>에선 시즌마다 여성 혐오 래퍼들을 등장시켰다. 2019년 11월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은 쇼미더머니 노래 가사를 수집해 혐오 표현을 분석했다. 시즌 2부터 시즌 7까지 국내 음원사이트에 등록된 111곡을 분석한 결과 절반(56곡·50.45%)에서 문제 표현을 발견했다. 숱하게 지적된 ‘여성 비하’ 표현은 19개(17.11%) 노래에서 발견됐다. 민언련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거나, 성공한 남성이 쟁취하는 대상으로 표현해 성적 대상화했다. 심한 경우 여성을 성을 판매하거나 외도를 저지르는 주체로 묘사했다”라고 설명했다. 후자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은 성적으로 순결하고,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특정 성별을 향한 혐오표현이기 때문이다.

슬릭은 페미니즘을 사이비 사상으로 매도하며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 래퍼들을 디스하고, 쇼미더머니를 필두로 한 한국 힙합씬의 문화를 지적해왔다. 이 밖에도 행정자치부가 ‘가임기 여성’ 분포도를 써넣은 ‘출산지도’를 발표했을 땐 노래 ‘내꺼야’를 내놓으며 “헛돌아가는 나라에선 여자를 공장으로 봐놓고 월급이라고는 한 푼도 안 줘”라고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국가의 가부장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슬릭에게 한국 힙합이 달라진 것 같냐고 묻자 “한국 힙합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만큼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혐오와 자본주의적 특정 가치가 우선인 한국 힙합씬에 대안적인 흐름은 나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제 클럽하우스(오디오 기반의 새로운 SNS) 아이디는 ‘힙합관둠’이에요. 저는 한국 힙합씬 그리고 한국 힙합 커뮤니티와 절연했습니다. 쇼미더머니에 나오거나 주류 미디어에 등장하는 한국 힙합 아티스트들과 스스로 리스너를 자칭한 사람들과 절연을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몰라요. 잘 끊고 살았거든요. 최근 알페스 사건 정도만 아네요. 그래도 힙합 한다면서 어떻게 하나도 안 들을 수 있어, 라고 누군가 비난할까 봐 구몬 학습지 하듯 겨우 듣고 황급히 끄는 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물론 블랙넛, 산이 음악은 ‘구몬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쇼미더머니>, <고등래퍼 >시리즈가 주춤하는 듯하다가 다시 크게 흥행하는 모습을 볼 때 기존 힙합의 방정식들이 여전히 유효하지 않나 싶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찾는다면 이영지 님 같은 분이 나온다는 것이죠.”


트랜스젠더 혐오에 ‘그건 페미니즘이 아니다’ 따끔한 목소리도

인터뷰 며칠 전 슬릭은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최근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과 오래된 인연을 끊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글을 올렸다. 슬릭에 따르면 이러한 교차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그의 발언은 ‘3천 번째’ 정도 된다. 슬릭의 글에 한 트위터 유저는 ‘그냥 흐린 눈을 하고 응원해온 것일 뿐’이라는 글을 게시했다. 이 밖에도 슬릭은 비슷한 내용의 수많은 DM을 받았다. 슬릭은 그러한 DM에 답한 메시지를 보여주며 요즘 그는 사랑만을 말하고 있다고 웃었다.

‘제가 언제 남자를 챙겼는지, 저한테 과연 어떤 성별을 챙길 권리가 있는지, 선생님 멘션 속 남성에 해당하는 사람 중 왜 트랜스젠더가 자동으로 포함되는지, 왜 페미니즘을 성별 이분법적으로 세상에 여성과 남성만 존재하고 그중에 여성을 챙기는 학문으로만 알고 계신지. 궁금한 게 많지만, 답은 안 주셔도 됩니다. 제가 열심히 공부해 보겠습니다.’


트랜스젠더, 게이 등 성소수자 인권에 배제적인 입장을 취하는 TERF(터프: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즘)는 여성 운동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이들은 차별과 억압의 복합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교차 페미니즘을 ‘쓰까 페미(여성 문제를 다른 소수자 문제와 함께 해결하려 하는 입장을 낮추어 일컫는 속어)’라고 비난한다. 이에 반해 교차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이들은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에서 출발했지만, 페미니즘의 도착점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간이라는 급진적 사상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TERF야말로 스스로 ‘래디컬 페미니즘’을 표방하지만, 생물학적 여성 담론을 통해 가부장제의 기반인 성별 이분법을 사실상 수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라고 지적한다.

슬릭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에 대해 “누군가를 혐오하고 배제하는 학문은 없기 때문”이라 말했다. 다층적 억압, 차별을 조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슬릭이 2019년 비건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큐멘터리 <몸을 죽이는 자본의 밥상>(What the Health, 2017)을 본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이 다큐는 식습관과 건강의 관계를 밝히는 것에서 시작해 정부와 축산 및 제약업계의 결탁이 결국 대중의 육식을 조종한다고 폭로한다. 다큐에 따르면 정부-낙농업계- 육류업계-의료계-제약업계는 부패한 카르텔로 연결돼 있다. 슬릭은 비건이 된 이후 “모순 없는 삶고 있다는 기분을 조금 더 자주 느끼게 됐다”라고 말했다.

[출처: 민영영]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비건이 됐어요. 그런데 전 실천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계속 미루다가 이 다큐를 보게 됐죠. 공장식 축산업과 거기에 일조하는 육류산업, 제약산업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나를 가난하게, 나를 병들게 만드는 게 저놈들이구나’ 싶었어요. 인간에게 육식을 강요하면서, 육식은 당연하다는 메시지를 퍼뜨리고 있고, 고기 먹어 병든 몸을 고기로 돈 버는 회사가 치유하고 정말 충격적이었죠. 그 체계에 도저히 일조하기가 싫었어요.”


슬릭은 실패를 말하는 것은 우울한 일이라고 했다. 슬릭은 자신이 꿈꾸는 세상으로의 변화는 그렇게 이른 시간 안에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세상에 변화를 기대하는 건 한숨만 나오는 일”이라고. 하지만 슬릭에겐 눈이 반짝거려지는 흥미로운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400명이 함께한 하루 한 끼 채식 프로젝트, 깨알 같은 글씨로 하루 4시간씩 하는 필사들, 마음을 다해 참여하는 약자와의 연대, 그가 쓴 가사로 채워지는 공연들. 변화를 기다리는 것은 지루한 일이지만, 변화의 주체가 되는 것은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흥분되는 일이다.

“더 뻔뻔해지지 못한 게 아쉬워요. ‘한국에 이런 음악하는 사람 나밖에 없고, 이런 내 가치를 그렇게 폄하하지 말고, 칭찬도 해주고 진지하게 고찰도 해줘요’라고 말하지 못했어요. 비난 말고 비판을 해달라는 말을 못 했어요. 열심히 해주면 누군가 알아주려니 하면서 혼자 방구석에서 방망이를 깎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다행히 이 실패를 만회하고자 존경하는 뮤지션분들께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저의 음악을 여쭤보고 있습니다.”

《워커스》 창간 5주년...'싸움의 기술' 특별호 텀블벅 후원(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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