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반민정의 7년, “피해자의 삶이 망가지면 안 되잖아요”

[3·8 여성의 날 특별기획 인터뷰⑤]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2차 가해’와의 싸움

“조금 더 단단해지려고요. 피해자들의 인생이 가해자들 때문에 망가지면 안 되잖아요.”

배우 반민정 씨가 말했다. 갑자기 무너져 내린 일상 속에서 마음을 다잡고, 그러다 절망하고, 또 한 번 용기를 내고, 그렇게 걸어온 시간이 7년이 돼간다. 사건의 발단이었던 성폭력 사건, 그로부터 파생된 2차 가해 사건과 명예훼손 사건 등 무수한 소송에서 완벽하게 승리했지만 거짓된 비방과 왜곡, 가짜뉴스들이 그의 일상을 다시 끌어내렸다. 이제는 끝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다시 출발점에 섰던 그 절망감은 어떠할까.

지난 1월 15일, 일명 ‘조덕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조덕제 씨가 명예훼손과 모욕 등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2018년 대법원이 성폭력 사건에 유죄판결을 내렸음에도, 지속해서 피해자인 반 씨를 비방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해 왔기 때문이다. 원 성폭력 사건만큼 반 씨를 괴롭혀 온 것은 가해자와 그의 측근들, 그리고 언론의 2차 가해였다. 조 씨가 구속된 후 반민정 씨는 자신의 SNS에 “이제는 과거에서 나아가 현재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밝혔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최초의 판결과, 언론과 가해자 및 측근들의 2차 가해 역시 엄벌에 처해질 수 있다는 판례를 남긴 그의 싸움은 이제 온전히 기록될 수 있을까. 이제는 스크린과 브라운관, 그리고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만나게 될 ‘배우 반민정’을 만났다.

  배우 반민정 [출처: 반민정 인스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저는 그저 피해를 인정받고 일상을 온전하게 회복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법적으로 피해를 인정받았음에도, 처음에는 판결문이 마치 백지 조각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해자의 행보가 굉장히 전형적이었으니까요. 가해 행위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을 동원해 피해자에게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우고 가짜 뉴스를 퍼트려 피해자를 도려내는 방식이지요. 이 때문에 많은 여성이 피해 호소를 망설입니다. 저 또한 가해자로부터 똑같은 피해를 입었고요.”


사건이 발생한 건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15년 4월이었다. 영화 촬영장에서 조 씨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으나 조 씨는 사과를 번복했다. 촬영 기간 내내 제작사 대표와 소속사 대표, 영화 관계자들은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결국 그해 5월, 반 씨는 홀로 경찰서를 찾아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하지만 조 씨는 오히려 반 씨를 명예훼손과 무고혐의로 고소했다. 반 씨를 상대로 5천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이듬해 12월, 검찰은 조 씨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지만, 1심 법원은 조 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 행동이 ‘업무상 행위’이므로 성폭력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최악의 오판이었다.

하지만 사건 발생 2년 뒤인 2017년 10월,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1심과는 달리 사건 영상을 심리한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재판부는 조 씨의 행위가 ‘정당한 촬영으로 이뤄진 행위라 보기 어렵다’라며 유죄를 인정했다. 조 씨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4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2019년 9월 대법원도 조 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2심 확정판결을 내렸다. 그해 5월 민사소송 재판에서도 조 씨가 제기한 5천만 원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고, 반 씨에게 3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무려 4년간의 법적 싸움에서 반 씨는 완벽히 승소했다. 그렇게 일명 ‘조덕제 성폭력 사건’은 마무리됐어야 했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에서 파생된 무수한 2차 가해들이 반 씨의 발목을 잡았다. 조 씨의 측근들은 아예 언론사에 취업해 반 씨에게 갈취, 갑질, 사기, 만행 등의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한 가짜뉴스를 만들었다. 조 씨는 인터넷에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반 씨가 허위 진술을 한 것으로 몰아갔다. 언론은 이 모든 가해 행위들을 받아쓰기하며 여론재판을 주도했다. 인터넷 댓글 창에는 반 씨에 대한 모욕과 인신공격들로 넘쳐났다. “달라질 수 있을까요?” 반 씨가 묻는다.

  배우 반민정 [출처: 민영영 작가]

“2심 재판 끝나고 가해자가 마치 피해자인 양 언론에 기자회견을 했을 때, 저는 성범죄피해자로 신변 보호를 받고 있던 상태였어요. 심리적으로 불안했고, 직접 나설 수도 없었어요. 그때 언론에서 가해자 측의 주장을 실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여론은 호도됐고, 사실관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악플에 시달렸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수년간 정말 많은 악플에 시달렸습니다. 악플을 볼 때마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쿵쿵 때리는 것 같은 고통에 시달렸어요. 이보다 심한 악플은 없을 거다, 그래서 나는 단단해졌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뒤돌아보면 그 수준을 뛰어넘는 또 다른 악성 댓글이 저를 공격했어요.

언론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언론은 사실관계가 증명된 내용만 보도한다고 생각했어요. 심도 있게 검증한 기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론에 보도된 모든 것을 믿었지요. 그런데 가짜뉴스 피해자가 돼 보니, 이제 언론을 신뢰하기 힘들더라고요. 심지어 일부 언론은 성범죄 피해 사건에 대해서도 오보를 냈어요. 사건이 심각해지자 언론인권센터에서 언론피해 공익소송을 진행하자고 했고요. 소송 때문에 신중해진 건지, 수년이 지나 관심이 떨어진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만큼 자극적인 보도는 줄었어요. 그럼에도 저는 언론과 대중들이 바뀔 것이라 믿고 싶어요. 여전히 문제의식을 느끼고 심도 있게 취재해주시는 언론사들이 있으니까요.”


“일터에서 생존할 겁니다. 여전히 내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줄 거예요.”

반 씨는 가해자와 그의 측근들, 언론, 악플러 등 수많은 2차 가해에 대한 피해도 인정받았다. 2018년에는 가해자의 측근으로 허위 기사들을 유포해 온 이재포와 그의 운전기사 출신 김 모 기자가 구속됐다. 사건을 왜곡 보도한 언론사들은 기사들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게시했다. 2020년 11월에는 법원이 기사에 허위사실을 적시한 5곳의 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의 책임을 물었다. 그해 6월에는 대법원판결 후에도 반 씨를 지속해서 비방해 온 조 씨에게 ‘2차 가해 게시물을 올리지 말라’는 법원 판결도 나왔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 씨는 유튜브 등을 통해 반 씨에 대한 비방과 허위사실을 유포했고 결국 1월 15일 법정 구속됐다.

반 씨는 수많은 2차 가해의 피해자였다. 7년의 세월동안 2차 가해에 맞서왔던 것은, 그것이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온갖 허위 사실과 비방들은 ‘배우 반민정’이라는 이미지를 훼손시켰다. 십 년 넘게 쌓아왔던 배우로서의 이력에 회의감이 쌓였다. 피해를 신고한 대가는 너무 컸다. 업계에서 고립됐고, 일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배우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으로 IT 회사에 취업도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잘못한 건 자신이 아니니까. 자신의 인생이 가해자 때문에 망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배우 반민정 [출처: 민영영 작가]

“저는 이제야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어요, 그런데 제가 사실관계를 이야기하면 ‘이제 듣기 싫다’고 해요. 용기 내서 얘기하려고 하면 ‘너는 재판에서 이겼잖아’라고 해요. 반면 가해자의 자극적인 이야기는 재미있어하죠. 그렇게 가해자의 거짓말들이 저에 대한 선입견과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어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일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미팅도 하기 전에 안 된대요. ‘왜 안 된대요?’라고 물으면 ‘그냥’이래요.

이런 이야기도 들었어요. ‘조덕제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그럼 저는요? 피해자는 죽어야 하나요? 피해자 보고 ‘너는 죽은 채로 살라’고 말하는 게 맞는 건가요? 가해자가 살아남는 방법은 피해자를 비방하는 것밖에 없는 걸까요? 범죄를 일으킨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지는 않잖아요. 저는 가해자의 공격에 대응했을 뿐이에요. 가해자 때문에 제 인생이 망가진 채로 살 수는 없으니까요. 제 지나온 삶들이, 망가진 일상이 너무 아까워요. 이제 가해자에게서 벗어나 일상을 회복하고 내 삶을 살고 싶어요.”


어렸을 적부터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연기를 통해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작품에서는 주로 개성 있고 강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맡았다. 나와 다른 인물의 삶을 표현하는 것은 무척이나 즐겁고 매력적인 일이었다. 대학 시절까지 포함해 20년간 쉬지 않고 연기를 했다. 더불어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연기지도를 하며 또 다른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그러다 성폭력 사건을 겪었다. 첫 번째로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두 번째로는 학생들이 떠올랐다. 피해에 침묵하면 앞으로 이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피해를 당했을 때 참으라고, 그리고 침묵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건 이후, 영화 현장에 성범죄나 성교육과 관련한 교육 매뉴얼이 갖춰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가 반 씨에게 말했다. 당신 때문에 촬영 전에 리허설과 교육 같은 것을 다 해야 한다고. 그는 이런 과정이 귀찮다는 듯 비꼬며 말했지만, 반 씨는 “너무 다행이네요. 잘 됐어요”라며 기쁘게 대답했다.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나긴 싸움을 버텨낼 힘이 됐다. 이제 반 씨는 조금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변화된 현장으로 돌아가려 한다. 수년간 잃어버린 그의 일상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그리고 한동안 잊혔던 ‘배우 반민정’이라는 이름을 스크린과 브라운관과 무대에서 더욱 자주 만나게 되기를.

“지난해까지만 해도 ‘나는 왜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새해에는 많이 울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제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려고 해요. 긴 시간이긴 했지만, 진실은 밝혀졌고, 또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가끔 여성분들에게 메시지가 와요. 피해 여성들은 저로 인해 용기를 낸다고 해요. 또 누군가는 ‘살아있어 줘서 감사하다’고 해요. 남성분들에게도 더 많은 응원의 메시지가 와요. 감사한 사람들이 많아요.

대법원판결 후, 배우 이재용 선배님이 ‘더 나은 영화 현장을 위해 영화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촬영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기자회견에 직접 참석해 영화계 현장에 대한 발언을 해주셨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성범죄 사건에 대한 편향적인 기사와 여론이 많았을 때여서 쉽지 않으셨을 텐데. 선배 배우로서, 또 남성 배우로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용기 있는 발언을 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소중한 사람들과 나의 시간을 잃고 싶지 않아요. 내 삶이 가해자에 의해 망가지거나 자살 당하게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해자 때문에 피해자가 일터에서 쫓겨나서도 안 되고요. 나는 내 일터에서 생존하는 사람이 될 겁니다. 내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보여줄 거예요. 아직 가해자와 2차 가해 관련 사건 소송이 남아있어서,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다닐 수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조금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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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대법원판결 후, 배우 이재용 선배님이 ‘더 나은 영화 현장을 위해 영화계의 변화가 필요하다: 촬영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기자회견에 직접 참석해 영화계 현장에 대한 발언을 해주셨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성범죄 사건에 대한 편향적인 기사와 여론이 많았을 때여서 쉽지 않으셨을 텐데. 선배 배우로서, 또 남성 배우로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용기 있는 발언을 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 종이비행기

    여성의날을 맞이하여 반민정씨께 응원과 경의를 보냅니다. 정말 억울한 고통스러운 날을 잘 이겨내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드라마에서 자주 보았으면 좋겠어요.

  • 현동훈

    힘든 일 딛고 다시 일어서서 다행이고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꽃길만 걸으시길 응원드립니다.^^

  • 정현지

    용기내 주시고 버텨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