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울려 퍼지는 미얀마 청년들의 목소리

[이슈①] “군부가 존재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례

① 한국에서 울려 퍼지는 미얀마 청년들의 목소리
② 세 손가락 들어 올린 미얀마 Z세대
③ 미얀마 여성이 만드는 민주주의, 군부의 자리는 없다
④ 전두환에서 미얀마 군부까지, 독재와 손잡은 기업들
⑤ ‘미얀마가 광주와 닮았으니까’로 퉁치지 말고

칼의 법칙

그냥 들어 올릴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가 절단해야 합니다

혁명의 법칙

생각만 하지 말고, 당신은 피처럼 용감해야 합니다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혁명의 폭탄 스위치는 당신이 아니라면 나다

— ‘두개골에 대하여’ 중


  지난 3월 14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미얀마 쿠데타 반대 집회 [출처: 은혜진 기자]

3월 14일 오전 부산역 광장, 미얀마 이주노동자 한조튼(29·가명) 씨는 얼마 전 시위에서 목숨을 잃은 친척 형의 시를 낭독했다. 한조튼 씨의 친척 형인 고 케이자윈(39)은 3월 3일 미얀마 모니와 지역 시민불복종 시위에서 군부에 살해당한 9명 중 한 명이다. 시인이자 고등학교 미얀마어 교사였던 고인은 사망하기 전인 2월 23일, ‘두개골에 대하여’라는 시를 남겼다. 군부 독재를 몰아내기 위해 모두가 함께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시였다.

한조튼 씨는 형의 사망 소식을 SNS를 통해 접했다. 혁명에 앞장선 한 시인의 죽음은 영상으로 기록됐다. 한조튼 씨가 보여준 영상에서 군인들은 머리에 총을 맞은 케이자윈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케이자윈이 지나간 자리는 피로 물들었다.

“형은 총에 맞았지만 끌려갈 때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던 것 같아요. 군인들은 형을 죽이려고 머리에 총을 조준했고, 결국 끌고 가서 죽였어요. 너무 가슴이 아파요. 어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일요일마다 열리는 부산의 미얀마 쿠데타 규탄 집회는 이날로 다섯 번째를 맞았다. 미얀마 유학생과 이주노동자, 한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150여 명이 모였다. 코로나19 탓에 집회 참여에 제한을 두고자 했지만, 미얀마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는 만큼 어떻게든 참가하겠다는 이들이 많았다. 오전 집회가 한국의 연대 집회 성격이 컸다면, 오후 집회는 미얀마인이 주체가 돼 희생자를 추모하고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해 마음을 모으는 시간이었다.

이들은 투쟁에 대한 ‘열정’과 희생자를 ‘추모’한다는 의미의 빨간 리본을 손목에 묶었다. 그리고 피켓을 들고 미얀마 민중가요 ‘알로 마시(필요 없다)’를 따라 부르며 팔뚝질을 했다. 양은 냄비 뚜껑을 부딪쳐 소리를 내는 모습은 미얀마 현지에서 벌어지는 ‘소음 시위’를 연상케 했다. 참가자들은 미얀마어로 “민주주의 돌려 달라”, “미얀마를 독재에서 탈각시키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세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Z세대, 미얀마 군부와의 결전에 나서다

94년생, 미얀마의 Z세대 여성 마킨메이타(28·가명) 씨는 미얀마 거리에서 함께 시위하지 못하는 현실을 내내 안타까워했다. 한국에서 미얀마 민주화 투쟁을 위한 여러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시민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재차 말했다. 마킨메이타 씨의 가족이 사는 양곤은 미얀마 최대 도시로, ‘2222항쟁’ 같은 큰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다. 그녀의 두 동생 역시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부산에서 집회가 열린 14일에는, 양곤에서 최소 14명의 시위 참가자가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3월 14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미얀마 쿠데타 반대 집회 [출처: 박다솔 기자]

“여동생, 남동생이 있는데 동생들이 시위에 나간다고 하면 걱정이 되지만 나가지 말라는 말은 못 합니다. 군부가 죽인 시민들이 동생들 또래예요. 동생들이 안 나가면 죽은 미얀마인들의 희생이 쓸모 없어지지 않겠어요? 저희 Z세대들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시민불복종운동의 힘이 더 커진다고 생각해요.”


마킨메이타 씨의 말대로 미얀마의 Z세대는 온·오프라인의 투쟁의 선두에 서 있다. 이들은 팔뚝에 이름과 혈액형, 연락처를 적고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시위 현장으로 나간다. 온라인에선 ‘키보드 파이터’라고 불리는 이들이 SNS를 통해 군부의 만행을 알린다. 미얀마의 휴대전화 보급률은 2018년 이미 100%를 넘어섰고 인구의 절반(2천만 명)이 페이스북을 사용한다. 군인과 경찰에 의한 폭력과 살인 현장은 거의 모든 국민에게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미얀마 군부는 통신을 차단해 뉴스의 확산을 막으려 했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에 불과했다. 마킨메이타 씨는 미얀마 군부가 영상의 진원지를 수색해 사람들을 계속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키보드 파이터들은 지워진 영상을 다시 올리며 군부의 폭력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나고 윗세대들은 쉽게 길거리로 나가지 못했어요. 또 우리가 시위에 나가면 군부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핑계를 대고 더 오래 비상사태를 유지할 테니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Z세대들은 군부를 용서할 수 없었고, 우리 후손들에겐 이러한 나라를 더 이상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월 6일부터 길거리로, 미디어로 각각의 자리에서 군부와의 최종 싸움을 선택했습니다.”


단호한 결전을 선택했지만, 미얀마 민중들이 쥔 무기는 나무 방패 정도다. 최루탄을 막아 줄 방독면이나 두꺼운 장갑 등이 필요하지만 물건을 보낼 길은 막막하다. 한국에서 모은 투쟁 기금도 태국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한국에서 투쟁 기금을 모아 전달한 미얀마인 2명을 공개 수배하기도 했다. 마킨메이타 씨를 비롯한 한국의 미얀마인들은 미얀마 투쟁의 열악한 조건을 생각하면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

2014년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 마킨메이타 씨는 지난 5년간 달라진 미얀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방학을 이용해 1년에 한 번씩 다녀왔던 미얀마는 교통이 점점 편리해졌고, 인터넷 사용도 쉬워졌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처벌받을 걱정 없이 정치인을 욕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버리듯 떠나온 미얀마에서의 삶을 처음으로 기대하게 됐다.

마킨메이타 씨는 자신처럼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된 미얀마 젊은이들과 군부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한 활동을 한국에서 벌여나가고 있다. 1인 시위를 하고 한국의 활동가 및 정치인을 만나 미얀마의 상황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한다. 한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미얀마 뉴스를 번역해 언론사 메일로 제보하기도 한다. 마킨메이타 씨는 한국인이 ‘눈물을 함께 흘려주는 민족’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군부가 만든 이상한 교육 시스템

미얀마 쿠데타가 발생했던 2월 1일 아침, 킨킨탓(25·가명) 씨는 미얀마에서 걸려온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발신자는 미얀마에 계신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미얀마 상황이 안 좋다. 쿠데타가 일어날 것 같다”라며 다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연락은 닿지 않았다. 하염없이 휴대폰만 붙들고 있다가 저녁이 돼서야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킨킨탓 씨의 사촌 언니 두 명은 가장 먼저 총파업에 돌입한 병원 노동자들을 따라 지난 2월 6일부터 파업에 동참했다. 언니들은 군부가 장악한 미얀마를 마비시켜 쿠데타를 막겠다며 일손을 놨다. 미얀마에 있는 부모님은 군부가 가정집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며 도리어 자식을 걱정하고 있다. 어머니는 음식을 만들어 시위 참가자들에게 나눠주고 밤에는 소음 시위에 참여하며 시민불복종운동에 함께하고 있다.

  왼쪽부터 마킨메이타(가명) 씨와 킨킨탓(가명) 씨 [출처: 은혜진 기자]

2013년, 킨킨탓 씨가 한국행 유학을 선택한 이유는 불평등한 미얀마 교육시스템 때문이었다. 미얀마 학교에선 군부 집안 자녀가 아니면 성적으로 1등을 할 수도, 장학금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의 친구들도 미얀마 교육제도에 불만이 컸다. 대학 입시에서의 성차별이 대표적인 예다. 여학생이 의대 같은 명문대학교에 입학하려면 남학생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했다. 600점 만점의 시험에서 여성이 500점을 받아야 합격할 수 있다면, 남성의 합격선은 450점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도 이러한 차별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소위 ‘민주화 시기’라고 불리는 지난 5년의 세월에도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킨킨탓 씨는 Z세대가 시위에 적극적인 이유에 대해 “군부의 뿌리를 뽑지 않는 이상 진정한 민주주의는 오지 않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군부가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 그리고 일상화된 부패와 부조리 등을 없애려면 우선 군부가 없어져야 했다. 킨킨탓 씨는 미얀마로 돌아가면 형법에 따라 쿠데타 반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검거될 수 있지만, 군부를 이길 수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고 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지난 11월 미얀마 총선 결과를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혀달라고 편지를 쓸 예정이다. 킨킨탓 씨는 국제 사회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 군부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혼나는 게 지겨웠던 미얀마 공대생

얀나인(29·가명) 씨는 미얀마 군부 반대 투쟁 기금에 100만 원을 보탰다. 2014년부터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미얀마에선 시민들이 목숨 걸고 시위하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건조하게 말했다. 자동차 부품회사에 다니는 그의 급여는 월 300만 원 정도. 50만 원의 생활비를 제외한 남은 금액을 모두 미얀마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고 있다. 4년제 공대를 나온 그가 미얀마에서 받을 수 있는 급여는 한 달에 15만 원, 많으면 30만 원 수준이다. 어릴 때부터 엔지니어로 일하는 것이 꿈이었지만, 미얀마의 임금은 너무 적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미얀마 건설 현장의 기사로 잠깐 일한 적도 있었다. 하루 임금은 1만 원 정도였지만 본인에게 떨어지는 돈은 절반이 안 됐다.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할 임금은 공사를 주관하는 고위 공무원에게 건네졌다.

  지난 3월 14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미얀마 쿠데타 반대 집회 [출처: 은혜진 기자]

그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에서 문서를 발급받을 때, 시험을 치러야 할 때, 이런저런 핑계로 주머니를 털어가는 군부 치하의 미얀마가 지긋지긋했다. 명분 없는 돈을 거두기 위해 군인과 고위 공무원들은 사람들을 꾸짖고,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처벌했다. 얀나인 씨 역시 수시로 혼났다. 한국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치러야 했던 한국어 능력 시험에서도 괜한 꼬투리를 잡혀 오랫동안 혼났던 경험이 있다. 심지어 한국에 오기 전, 남은 가족들이 기존의 집에 거주하려면 보증금을 내야 한다는 황당한 요구도 있었다. 후진 정치와 경제는 미얀마 젊은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미얀마는 빈부격차가 심해요. 누구는 1억짜리 차를 타고, 누구는 200만 원짜리 차를 사기도 어렵죠. 미얀마에 계속 있으면 점점 더 힘들어질 것 같았어요. 집은 낡아가고, 부모님은 늙어가니까요.”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 취업을 선택했다. 친구들 역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폴 등 주변 국가로 향했다. 그는 임금이 높고, 노동권이 보장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행을 택했다. 첫 직장은 화학물질을 다루는 회사였는데 1년 정도 다니다 그만뒀다. 심장이 안 좋은 편인데 독한 화학제품 냄새를 맡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다. 미얀마 건설 현장에서 돈보다 목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였다.

그는 한국에서 착실하게 돈을 모은 뒤, 민주주의를 되찾은 미얀마로 돌아가 건설과 관련한 조그만 회사를 차리는 것이 꿈이다. 그런 상상을 하면 한국에서의 고된 장시간 노동도 견딜 만하다. 그는 지금 회사에서 주야 2교대로 일을 한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10시간 반을 일하는 셈이다. 노동시간이 길다 보니 고향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모임을 하기도 어렵다. 이날 집회에도 야간작업을 마친 뒤 한숨도 자지 못하고 급하게 달려왔다. 충혈된 눈에 피로가 가득했지만, 그는 미얀마 상황을 알리겠다며 늦은 시간까지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삶은 곧 차별이었다

아응칸(30·가명) 씨는 지난해 미얀마로 돌아가려 했지만, 코로나19에 이어 쿠데타까지 발생하면서 발이 묶였다. 그는 한국에 있던 5년 동안 두 번 회사를 옮겼다. 미얀마에 쿠데타가 발생한 후에는 마지막 직장을 나왔다. 시위가 날로 격화된다는 소식에 가족들이 걱정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응칸 씨는 미얀마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어 부산역 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밖에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약 100만 원을 미얀마 시위대에 전달했다.

  지난 3월 14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미얀마 쿠데타 반대 집회 [출처: 은혜진 기자]

그는 2016년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왔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우리 지역뿐 아니라 미얀마엔 일자리가 없다. NLD 집권 후 해외 기업의 투자가 확대됐지만, 대학을 나온 청년들조차 일거리가 없는 상황”이라며 쿠데타 전 상황을 설명했다. 2011년 노동법이 개정됐지만, 노동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최저임금, 휴일 등 노동자의 권리는 여전히 사장의 선의에 달려있었다. 철도와 제조업 등 최저임금을 받는 미얀마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 군부와 싸우는 이유는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임금도, 일도 더 많았다. 마지막 직장인 자동차 부품회사에선 주야 2교대로 주 6일을 근무하며 월 230만 원을 벌었다. 물론 다른 이주노동자들처럼 한국에서의 삶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공장에서 포장 업무를 할 때도, 건설 현장에서 형틀 목수로 일할 때도 궂은일은 언제나 이주노동자의 몫이었다.

“사장이 외국인에게는 위험하고 더러운 일을 시켰어요. 주말, 야간 근무 때도 수당을 주지 않았고요. 명절엔 한국인에게만 선물을 줬어요. 휴일이 따로 있었는데, 이주노동자들은 언제든 일할 수 있어야 했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매일 인사하듯 욕을 했고요. 욕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응칸 씨의 꿈은 미얀마로 돌아가 마트를 차리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군부가 장악한 미얀마를 되찾아 누구나 평등하고 박해받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아응칸 씨는 “쿠데타가 없어질 때까지 시위에 참여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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