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고자 투쟁했던 곳, 여기만 오면 슬퍼요”

[르포]민주노조 사수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투쟁, 구로 2·3공단 기행

  금천 순이의집에 마련된 쪽방 체험관 [출처: 연정]

5.16쿠데타 지원의 대가로 설립된 면세 공단

6월 5일 오후, 가산디지털단지역 1번 출구를 나섰다. ‘가리봉 역’에서 ‘가산디지털단지 역’으로 역 이름이 바뀐 지 16년. 공식 명칭처럼 불리던 ‘구로공단’이라는 비공식 명칭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된 지 21년이 지났다. 최근에는 구로공단을 구로·가산·금천의 첫 이니셜을 따서 ‘G밸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20층짜리 아파트형 공장 대륭포스트타워6차가 눈에 들어온다. 현재 구로디지털단지 역 부근 1공단에는 아파트형 공장과 ‘지식산업센터’라고 불리는 고층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다. 이곳 2공단에는 패션 아울렛 등 도소매업이, 3공단에는 기존 굴뚝 형 공장과 지식산업센터가 병존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 ‘꿀잠’이 주최하는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투쟁, 구로 2·3공단 기행’ 참가자들이 첫 번째 기행 장소인 ‘구로공단 노동자생활체험관 금천 순이의 집’으로 이동한다. 이날 기행은 ‘금천 순이의 집’에 이어 3공단 ‘중원전자’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구로동맹파업 현장인 2공단 사거리의 ‘대우어패럴’, 마지막으로 ‘기륭전자’ 공장부지 순으로 이어진다.

구로공단(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은 재일 동포의 국내 투자유치와 수출산업의 효율적인 육성을 목적으로 하는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64년)의 제정으로 10년에 걸쳐 조성됐다. 정부는 국유지가 많고 땅값이 싸며, 한강·안양천이 있고, 1번 국도와 경부선 등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이곳을 공단 지역으로 선정했다.

“일본계 기업, 그중에서도 재일교포들에 의해 공단이 구성됐습니다. 재일교포 사업가들이 박정희 군사정권에 세금을 내지 않는 값싼 조건으로 OEM 제품을 생산해서 수출할 수 있는 면세 공단을 요구한 거죠. 5.16쿠데타 당시 돈이 많이 들어갔는데, 그 돈이 재일교포들을 통해 들어온 겁니다.” (문재훈, 서울남부노동상담센터 소장)


당시 구로공단 설립을 주도했던 한국경제인협회 내 수출산업촉진위원회는 지금의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으로 이어진다.

3백 명이 살아도 화장실은 한두 개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왠지 맘이 설레인다

강 건너 공장의 굴뚝엔 시커먼 연기가 펴오르고
순이네 뎅그런 굴뚝엔 파란 실오라기 펴오른다
바람은 어두워가고 별들은 춤추는데
건너 공장에 나간 순이는 왜 안 돌아오는 걸까


가수 김민기 씨의 <강변에서>를 듣고, ‘금천 순이의 집’을 둘러본다. 1967년 말 2,000여 명이었던 구로공단 노동자는 1978년 11만4천 명까지 증가했다. 봉제·섬유와 가발 등 노동집약적인 상품이 구로공단 전체 수출액 중 80% 이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생산을 담당한 노동자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지방에서 온 15~19세 여성노동자였다. 1980년 18억7천만 달러 수출의 원천은 이 여성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에 있었다.

“우리 공단 본부에 가면 여성노동자가 횃불 들고 있는 상이 있는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라졌어요. 그러다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서 여성 대통령이 됐다고 다시 동상을 복원시켰어요. 동상 세우는 걸 찬성해야 될 지 반대해야 될지 곤혹스럽죠.” (문재훈 소장)


지방에서 올라와 살 집이 없는 여성노동자들은 1.5~3평가량 되는 방 하나와 부엌 하나,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 쪽방(벌집)에서 살았다. 2~3층 되는 주택에 기억(ㄱ)자나 디귿(ㄷ)자 형태로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백여 개의 방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옛날 쪽방에는 화장실이 한두 개밖에 없었어요. 출근 시간에 죽어나는 겁니다. 가장 극단적으로는 저런 벌방이나 쪽방을 2부제로 했다고 해요. 한 방을 오전 오후 교대로 쓰는 거죠. 구로동맹파업 때 2공단 사거리에서 6일 동안 점거 농성을 했는데, 물 전기 식량을 다 끊었거든요. 그때 노동자들이 제일 힘들었던 게 뭘까요? 화장실이었어요. 배고픈 것도 더운 것도 참을 수 있는데, 화장실이 끊겨버리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죠.” (문재훈 소장)


정부는 60만 평 땅에 10만 명 이상이 일할 공단을 만들면서 이들이 거주할 공간과 복지 시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공장 기숙사들도 노동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연장근무와 특근 등 노동력 동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통제의 도구였을 뿐이다.

“15만 공단을 만들면서 종합병원 하나 만들지 않았다는 건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수출의 다리를 넘으면 수영장도 있는데, 그것도 현대로 넘겼다가 지금은 어디로 넘어갔는지 모르겠어요. 공공 영역이 민영화와 사양화를 이유로 자꾸 사유화되고 이윤에 희생당하고 있는 거죠.” (문재훈 소장)


화려한 겉모습, 공동화되는 산업과 생산 영역

최근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총 고용인원은 14만2천 명이다. 입주업체 수는 1만2천 개로 1개 업체당 고용된 노동자 수는 12명 정도다. 한 업체당 평균 250명이었던 1987년보다 업체당 노동자 수가 1/20로 줄었다. 그리고 그들 상당수는 파견과 도급이다. IT·SW 업종이라고 하는 아파트형 공장에 들어가 보면 실제로는 다단계나 부동산 같은 곳이 많다. 최근에는 파견이나 도급 형태로 운영되는 콜센터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 1차 정규직은 소수이고, 노동자들은 하청의 재하청, 갑을병정으로 이어진다. 문재훈 소장은 기급 노동자까지 봤다고 했다. 이른바 프리랜서의 형태다. 층층시하 착취구조가 지금의 구로공단의 모습이다. 문재훈 소장은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빈곤해진 구로공단을 ‘양복 입은 빈대떡 신사’에 비유한다.

“서울이 커지고 산업화하면서 땅값이 무지하게 오릅니다. 공장 하나를 팔면 같은 공장 10개는 만들 수 있을 만큼 땅값이 올라가요. 19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여기서 고생하며 공장을 돌릴 이유가 없어진 겁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제는 생산적인 제조업을 통해 돈 벌 생각이 없어요. 그러면서 공단이 산업단지로 바뀌는 거죠. 겉모습은 굉장히 화려해졌지만, 사실 우리 안의 산업과 생산의 영역은 텅 비어버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문재훈 소장)


구로공단의 마지막 전노협 사업장

  금천 순이의 집 앞에서 구로공단 기행 참가자들 [출처: 연정]

1990년대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사업장이었던 3공단 ‘중원전자’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공장부지를 지난다. 중원전자는 카세트를 생산했던 공장으로 노동조합 조합원이 630명에 달했던 회사다.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쟁의를 하면 회사는 소사장제를 도입하거나 직장폐쇄, 공장 이전 등으로 노동조합을 깨려 했다. 그 시기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위장폐업과 직장폐쇄에 맞서 싸웠던 곳 중의 하나가 중원전자 노동조합이다. 하지만, 결국 중원전자는 사측의 흑자 부도 위장폐업으로 문을 닫는다.

‘노조탄압 공장’으로 알려진 무선 원격 조정기 생산업체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부지에도 고층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섰다. 1988년에 설립된 태광하이텍 노동조합을 전신으로 하는 하이텍분회(금속노조 남부지역지회 소속)는 구로공단에 마지막 남은 전노협 사업장이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들은 사측의 구로공장 매각에 대항해 공장사수와 고공농성 등의 투쟁을 벌였고, 현재 조합원들만 독산역 인근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문재훈 소장은 “끝까지 투쟁하면 경제적 실익도 보장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라며, 노동조합 활동하는 게 절대 손해 보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도 노동조합 했다는 소리를 못 해요

수출의 다리를 지나고 오래된 육교를 건너 구로동맹파업 현장인 현대아울렛 앞에 도착한다. 거리는 인근 패션몰을 오가는 시민들로 북적인다.

“현대아울렛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중심 사업장인 대우어패럴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 건너편 마리오아울렛에는 효성물산이 있었고요. 이곳은 연대파업 당시 참여 노동자가 가장 많았던 대표적인 사업장이었습니다. 두 회사가 마주 보고 있죠. 구로동맹파업의 역사적인 현장의 중심지입니다.” (문재훈 소장)


1984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활발한 투쟁을 했던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은 1985년 임단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6월 22일,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 3명이 구속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6월 24일 대우어패럴·가리봉전자·효성물산·선일섬유·부흥사 등 5개 노동조합이 동맹파업에 들어가면서 구로동맹파업이 시작됐다 6일 동안 5개 노조의 지지연대 투쟁도 전개됐다. 6월 29일, 물과 전기가 끊긴 공장에서 6일 동안 굶으며 버티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벽을 뚫고 진입한 구사대들에 의해 강제해산 됐다. 43명이 구속되고 1,500여 명의 해고자가 발생한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노동자 정치적 동맹파업으로 기록된다.

구로동맹파업의 도화선이 됐던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구속 간부 중 한 명인 강명자 당시 사무장이 신호등을 건너온다.

“역사적인 장소이자 산업 민주화와 혁명의 장소임에도 저는 여기만 오면 슬퍼요. 지금까지도 친구들과 동생들이 울면서 저한테 전화해요. 그때 열여덟 열아홉 나이에 성폭력을 당한 뒤 말도 못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동생들이 있어요. 노동조합 했다는 소리를 남편이고 아이들한테 못 한 사람들도 있고요. 실신하고 들쳐 업힌 상황에서도 자기의 소중한 부위를 만지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잖아요. 성추행이잖아요. 지금 같으면 언론이나 연대싸움을 해서라도 떠들 수가 있는데, 그렇게 못한 게 너무도 한이 돼서 지금도 말 못 하고 언니한테만 얘기한다고 울어요. 저도 그 얘기를 들으면 슬퍼서 울어요. 사람이 사람답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수치를 많이 남긴 거잖아요.” (강명자, 전 대우어패럴노조 사무장)


공단은 우리를 이만큼 살게 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뿌리

마지막 기행 장소는 2공단에 있는 가산동 기륭전자 공장부지다. ‘에이스 하이엔드 타워 클래식’이라는 부르기도 어려운 이름의 14층짜리 지식산업센터 건물이 들어서 있다. 주변의 많은 변화에도 기륭전자 골목은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이 그대로다.

“초창기 파견노동자였어요. 기륭에 처음 왔는데, ‘너 어느 회사 다니니?’ 하고 물으면 제가 답을 할 수가 없어요. 휴먼닷컴으로 출근하는 게 아니니까 휴먼닷컴이라고 할 수도 없고. 기륭전자에 출근해서 기륭 작업복 입고 기륭의 업무지시를 받는데, ‘저는 기륭전자에 다녀요’라는 말이 안 나와. 내 소속은 휴먼닷컴이었으니까. 처음에 정체성 혼란이 있었어요. 저는 그전에 정규직 경험 밖에 없다 보니 되게 이상한 회사라고 생각했어요.” (김소연, 기륭전자분회 전 분회장)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설립 당시 분회장이었던 김소연 씨(현 ‘꿀잠’ 집행위원장)가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투쟁 역사를 들려준다. 2005년 이른바 ‘잡담 해고’, ‘문자 해고’,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시오’ 등의 일상적인 해고에 저항하기 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에 들어간 이야기. 여러 차례의 단식과 고공농성 등을 통해 2010년 어렵게 만들어낸 정규직 복직 합의. 2013년 복직을 했으나 사장이 일도 월급도 안 주고 야반도주한 이야기. 2014년 비정규직·정리해고법 전면폐기를 위한 사회적 투쟁을 선포하고 밖으로 나와 투쟁을 하게 된 이야기 등. 2002년에 입사해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의 긴 이야기를 20분 동안 술술 이어간다. 기륭전자 마지막 사장 최동열은 그토록 소망하던 이 건물을 짓지 못했다. 욕심을 부리다 노동자들과의 합의를 늦춘 대가였다. 공단의 해가 저물어가고, 공단기행도 마칠 시간이 되어간다.

“공단 주변에 사는 분들은 공단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요. 공단이라는 게 집값 떨어지는 이름이지 집값 올라가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죠. 우리 노동자 민중들이 어떻게 고생하면서 일을 했고, 어떤 투쟁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밀고 갔는 되돌아본다면 공단은 잊히거나 묻혀야 할 공간이 아닙니다. 우리를 이만큼 살게 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토대이고 뿌리이죠. 오늘 기행이 그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고요. 우리가 문제제기 하고 싸우고 단결하고 연대할 때 미래가 만들어지고 우리 지우와 승우(최연소 공단기행 참가자)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행복하고 밝게 뛰어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여기서 마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문재훈 소장)


높다란 철교위로 호사한 기차가 지나가면
강물은 일고 일어나 작은 나룻배 흔들린다
아이야 불 밝혀라 뱃전에 불 밝혀라
저 강 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라라라 라라라 노 저어라 열여섯 살 순이가 돌아온다
라라라 라라라 노 저어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아이야 불 밝혀라 뱃전에 불 밝혀라
저 강 건너 오솔길 따라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
- <강변에서>, 김민기


<참고자료>
구은정, 『우리들의 구로동 연가: 구로공단과 구로디지털산업단지 사이 월드』, 2009, 이매진.
김묵한, 「구로공단 그리고/혹은 G밸리」, 2015, 『서울경제』 121호, 서울연구원)
서울역사박물관, 『가리봉동: 구로공단 배후지에서 다문화의 공간으로』, 2013.
서울역사박물관, 『가리봉 오거리 :구로공단 반세기 기념 특별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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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15만 공단을 만들면서 종합병원 하나 만들지 않았다는 건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수출의 다리를 넘으면 수영장도 있는데, 그것도 현대로 넘겼다가 지금은 어디로 넘어갔는지 모르겠어요. 공공 영역이 민영화와 사양화를 이유로 자꾸 사유화되고 이윤에 희생당하고 있는 거죠.” (문재훈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