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사회적 가치, 계급투쟁, 그리고 지워지는 정치의 장소

[사파논평]

1. 정체성과 사회적 가치의 정치가 휩쓸 때, 놓치고, 잊혀지고, 지워지는 것들에 주목한다.

계급투쟁이 제대로 있어본지 까마득한 나라에서, 계급투쟁과 분배투쟁때문에 정체성의 정치가 지워지고 있다는 지적도 사실은 엉터리였다. 한국은 소위 구사회운동과 좌파운동이 한 시절 휩쓸었던 서유럽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제 또 계급투쟁과 분배투쟁이 아직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나라에서 정체성과 사회적 가치를 둘러싼 정치가 휩쓸고 있으니, 계급투쟁은 아예 계속 실종되겠구나.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8월 2일 현재 원주 건강보험공단 앞에서는 1,100명의 고객센터 비정규 노동자들- 주로 여성 기혼 노동자들-이 파업 중이다. 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들의 3차 파업은 이날로 33일 차를 맞았으며, 이은영 수석부지부장의 단식은 11일째다. 이 폭염 속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노숙 농성 중이다. 화장실 사용이나 출입도 어렵고, 경찰의 언어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은 꿋꿋이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5,000여만 국민고객의 개인정보를 다루는 고객센터 노동의 직고용이야말로 보건정책과 건강보험의 사회공공성이기도 하다고. 건보공단 김용익 이사장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반대한다면서 비정규 여성노동자들과의 직접교섭에 대해서 시종일관 비협조적이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를 대선 공약으로 선언해 놓고 그 수사학적인 효과는 다 누려놓고서, 임기 끝나기 전에 그 공약을 실행하도록 실천하고 나선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의 투쟁을 공권력으로 막아서고 있다. 노동공약은 마음대로 쓰고 버리는 카드였구나.

예를 들자면 이런 이슈 말이다. 도쿄 올림픽에 참가한 양궁선수 안산의 숏컷에 대한 시비가 심각하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온통 안산의 숏컷 헤어에 대한 이슈가 더 지배하고 다른 것들은 희미해져 가는 사회적 어젠다의 풍경이 참으로 문제적이라는 말이다. 사회적 어젠다 세팅이 ‘제로섬’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지배체제가 가장 선호하는 여론정치의 풍경일 것이다.

2. 정체성의 정치와 사회적 가치의 정치도 분별이 필요하다.

윤석열 -우파정당 ‘국힘’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당연히 뻔하게 높았지만, 어디에도 당 소속을 두지 않은, 전직 정치인도 아닌, 일개 전직 검사(출신 검찰총장)가 한국의 내년 대선을 앞두고 갑자기 1, 2위 후보를 다툰다는- 그 희한한 후보에 대해서 말들이 많다.

근데 그의 부인을 두고 온갖 진상짓들(미안하지만 내 눈에는)이 창궐한다. 그의 부인이 한때 술집 마담이었다네, 어떤 검사와 살림을 차렸다네, 그의 논문이 엉터리라네. ‘**의 남자들’ 명단이 쓰여진 벽화가 서울 어느 책방 벽에 그려지고 지워지고 또 그려지고 지워지고 있다. 그러면서 윤석열 지지파-국힘과 윤석열 반대파-민주당 사이에 대선정국 이분법적 구도가 휩쓸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슈 말이다. 근데 이런 일들이 윤석열이라는, ‘정치인이 되려는 전직 검사’의 정치적 성향과 능력과 입장을 평가하는데 무슨 상관인가?

그러던 중에 내 보기엔, 월척 하나가 나왔다. 윤석열 그자가 87년 이한열이 최루탄 맞고 쓰러지는 그 유명한 사진조차 알아보지 못하고서, 이게 “부마(항쟁)이냐?”고 묻고, 자신이 그때 79년에 대학 1학년이었다는 둥 헛소리를 한 것. 그것이 YTN방송 ‘돌발영상’에 찍혔다고 한다(각자 찾아보시길 바란다).

여기서 우리는 많은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중요한 정치적 해석을 해낼 수 있다. ‘줄리’보다는 윤석열이다. 김건희보다 윤석열에 집중하자. 당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드러내는 것은 윤석열 검사와 결혼하기 전 김건희라는 자의 이전 전력이 아니라 윤석열의 과거 전력이다.

부디 헛발질 좀 그만하고 핵심에 집중하자. 윤석열을 진짜로 문제 삼고 싶다면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 윤석열 부인에 대한 관심은 다분히 ‘정치공작’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정적을 무너뜨리려는 나름 정치투쟁이고, 내년 대선의 향배가 결정될 때까지 그 후보들과 그 지지자들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3. 여론조사를 여론조사 해봐야 한다.

이재용이냐 이석기냐. 아니면 이재용이냐 이재용이냐. 이도 또 하나의 관심사다. 이석기 석방운동은 일단 옆으로 두겠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 이석기 석방은 그 안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출처: 청와대]

근데 감옥에 있는 삼성그룹의 후계자 이재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드디어 ‘여론몰이’가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여론 조사 ‘기관’ 네 군데가 합동 조사를 했다는 결과가 묘하다(왜 한국은 여론조사를 밥벌이로 삼는 민간기업을 굳이 ‘기관’이라고 표현할까). “이재용 8·15 가석방, 찬성 70%…전직 대통령 특사는 반대 56%” 아주 절묘하지 않은가 말이다. 한국의 여론조사기관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까지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첫째, 이재용에 대한 특사가 아닌 가석방을 질문하고 70%가 찬성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둘째, 효용 가치가 떨어진 전직 대통령은 특사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내놨다. 뭐 이분은 병원을 자주 들락날락하면서 자신의 두 번째 감옥으로 삼고 있으니 당분간(즉 다음 정권 전까지) 이렇게 보내도 좋다. 아니, 다음 정권을 국힘이 가져가기 위해서라도 박근혜 씨는 당분간 감옥에 있는 것이 정치적인 힘을 강화하고 자신의 역할을 도모하는 방법일 것 같기도 하다.

반면에 삼성의 이재용은? 소위 국민적인 감정은 박근혜 특사만큼 이재용 특사에 대해서 부정적일 텐데, 그러니 순서대로 일단 ‘가석방’부터 하자는 설문을 내놨다. 아, 그렇게 가석방해두고, 다음 3.1절쯤에 특사 단행하면 아주 맞춤이 되겠구만. 재벌을 향한 문재인 정부의 그 지독하게 모호한 애정공세에 있어서 결정판으로 해도 좋겠고. 혹은 차기 정권이 특사를 단행해도 재벌과의 관계를 위해서 나쁘지 않다. 대선 때마다 등장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과 자본주의의 관계는 수감된 재벌들의 석방, 사면 여부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에 합당한 절묘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식의 여론조사와 보도들이 터져 나오면서 이재용 씨가 만기 출소하는 것은 아예 선택지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진짜 여론조사라면 이재용의 만기 출소에 대해서 가부를 묻거나 적어도 선택지로 제시했어야지.

4. 맺음말

이것으로 관심이 온통 쏠리고 다른 것들이 지워지고 잊혀지는 것, 그것이 여론의 생태학적인 특징이다. 이른바 ‘사회문제론’적 시각에서는 그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있다. 다양한 문제들 중에 어떤 문제가 ‘사회문제’화 되는가에 대한 연구들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문제점도 심각하다는 비판적인 인식도 뒤이어 제기된다. 즉, 이것에 관심을 쏠리게 하면서 다른 것들을 덮는 것. 그것이 이른바 사회문제와 사회어젠다 세팅이 가지는 생태학적인 한계, 즉 더하기와 빼기를 하면 결국 ‘제로섬’(zero sum)이라는 것이다. 사회여론과 공론이 관심을 가지는 범위와 동기는 제한적이고 따라서 어떤 어젠다와 가치가 득세하면 다른 가치와 어젠다에 대한 관심과 동기부여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대한 이런 생태학적 접근은 과연 맞을까?

분명히 무엇을 ‘사회문제’로 선택하느냐는, 단지 구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이고 문화적이기도 하다. 음주가 사회문제로 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빈곤’이 사회문제로 취급된 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빈곤과 불평등을 사회문제로 보지 않는 인식들이 강하다. 즉 빈곤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경구도 이를 사회문제로 보지 않는 시각이다. 또 불평등은 인류사회에서 사라질 수 없는 ‘자연적인’ 상태라는 식으로 말하는 맬더스 주의적 접근이 지금 불평등을 말하는 담론들에도 여지없이 스며들어 있다.

최근에는 이는 사회적 가치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어떤 면에선 우익 포플리즘이 사회적 가치를 둘러싼 논란과 담론전투를 벌이면서, 많은 소수자 프레임들이 차용되고 악용되고 있기도 하다.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소수자 차별과 혐오, 폭력을 조장하고 동원하면서 반소수 다수 동맹을 만들어낸다. 또 어떤 때는 의도적으로 소수자집단의 인물을 발탁하고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시각을 세탁하고 타자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는 소급하면 70년대 말 80년대 초 신보수주의로부터 연원하는 오래된 통치전략이기도 하다. 스튜어트 홀은 이에 대해서 영국 대처 정부의 통치체제에 대한 중요한 사회문화연구 저작을 내기도 했다.

결국 의도적으로 차별과 혐오, 증오행위를 부추기고 그것을 다시 여론정치 속에서 ‘증폭’시키고 그러면서 이분법적 구도를 만들고, 다른 중요한 사안들을 희석시키거나 새로운 배제의 틀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체성의 정치와 사회적 가치의 담론투쟁이 가지는 양면성에 대해서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멀티미디어의 시대에, 대중은 끝없이 가짜뉴스에 현혹될 뿐 아니라, 뉴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대중 그 자체가 중요한 ‘요소’로 동원되기도 한다.

고로 사회적 가치를 누가 만드는가. 그리고 누가 담론과 여론을 주도하는가. 이 광활한 사이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멀티미디어’ 속에서, 무엇에 대해서 내 관심을 두고, 내 시선을 보내고, 내 입을 열고, 내 손을 움직일 것인가. 욕하고 싸우면서, 관심을 기울이는 사이에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남아 있는가. 프레임과 담론의 이중성에 대해서 신중히 진지하고 복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적 어젠다 세팅이 ‘제로섬’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지배체제가 가장 선호하는 여론정치의 풍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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