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 미국 사회는 비판인종이론 (critical race theory) 논란으로 시끄럽다. 보수주의자들은 비판인종이론이 미국사를 부정적으로 왜곡하고 백인 특권이나 인종차별적 구조 같은 잘못된 관념으로 아이들을 세뇌한다며 전방위적인 공격에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공화당의 유력 정치인부터 폭스뉴스, 극우 활동가, 지역 학부모까지 거의 모든 보수 세력이 비판인종이론에 대항해 결집하고 있다.
과연 지금 미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올해 초부터 아이다호, 아이오와, 오클라호마, 테네시, 텍사스 등 공화당이 장악한 주의 공립학교에서 비판인종이론 교육을 금지하려는 시도가 시작됐다. 〈에듀케이션위크〉에 따르면 7월 중순까지 적어도 26개 주에서 비판인종이론 교육 금지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관련 교수법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1개 주에서는 이미 명문화됐다.
비판인종이론은 얼마 전까지 대다수 미국인에게 생소했던 법학 이론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법적 질서를 인종 중심 관점에서 비판하는 방법론이자 실천 운동 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데릭 벨, 앨런 프리맨, 킴벌리 크렌쇼, 리처드 델가도 등 미국의 비판법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자유주의 법학 비판, 상호교차적 접근, 이야기하기 방식 강조, 사회 구조적 접근 등 여러 요소가 느슨하게 결합한 비판인종이론은 인종차별적 구조가 미국의 법과 제도를 통해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로 미국 흑인 남성의 지나치게 높은 교도소 수감률은 그들의 나쁜 기질이 아닌 그들을 범죄로 몰아가는 사회 구조에 원인이 있다는 식이다.
비판인종이론의 관점은 법학 외에 역사학과 교육학 등 다른 학문에도 적용될 여지가 있었다. 비판인종이론의 개척자 데릭 벨은 학교에서 인종 분리를 폐지하고 시민권 운동의 시대를 연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연방대법원 판결이 실은 미국 백인 엘리트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했다는 대담한 해석을 내놓았다. 백인 엘리트들이 국내적으로는 유색인종의 불만을 달래고 국제적으로는 냉전 상황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국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인종 차별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 교육계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비판인종이론의 관점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교육학자들은 인종을 생물학적 특징이 아닌 사회적 구성물로 보는 비판인종이론의 관점이 미국 교육계의 심각한 문제인 인종별 학업 성취도 격차를 분석하는 데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비판 인종이론이 실제로 미국의 초·중등학교에 적용돼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비판인종이론이 로스쿨에서나 다룰 어려운 주제여서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적절하지 않고, 실제로도 초·중등교육 과정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비판인종이론은 오랜 시간 주로 전문가의 학술적 토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최근 등장한 논란은 학문적 방법론에 대한 논쟁이라기보다는 미국 인종주의 문제를 둘러싼 충돌에 가깝다. 비판인종이론의 대표 연구자인 킴벌리 크렌쇼는 〈CNN〉에서 오늘날의 논란이 이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인종적 근심에 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해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인종적 근심이 커졌으며, 지금의 반응들은 “인종적 불평등에 관해 점점 커지는 논의에 대한 백래시”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어쩌다 비판인종이론이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됐는가? 그 시작점은 지난해 9월로, 보수주의 운동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크리스토퍼 루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미국 인종주의 반대 운동의 배경에 비판인종이론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와 함께 연방정부 산하 모든 기관에 퍼진 비판인종이론이 사람들을 세뇌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루포의 주장은 냉전 시기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반공주의적 공격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 주장에 힘을 실은 것은 보수 미디어 폭스뉴스였다. 폭스뉴스는 루포의 주장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비판인종이론이라는 단어를 미국 대중에게 알렸다.
뒤이어 대통령 선거를 앞둔 트럼프와 공화당 의원들이 나섰다. 9월 4일 트럼프는 인종주의 비판 교육 프로그램 지원을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는 연방 산하 기구들에 “백인의 특권” 이나 “비판인종이론” 등을 언급하거나 미국이 태생적으로 인종차별적이라거나 악한 국가라고 가르치는 프로그램들을 찾아내 지원을 취소토록 하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분열적이고 반미국적인 정치적 선동”을 추구한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보수 운동가, 미디어, 정치권의 합작은 미국의 인종주의를 지적하는 모든 주장에 비판인종이론의 영향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비판인종이론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공산주의적이거나 반미국적이라고 규정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인종 연구로 유명한 역사가 제럴드 혼은 〈애널러시스뉴스〉에서 데릭 벨이나 킴벌 토머스 같은 비판인종이론 창시자들이 공산주의에 친화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고 말했다. 혼이 보기에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멘토이기도 한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교수 벨은 좌파라기보다는 법무부 출신의 온건파에 가까웠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이미 미국 사회에 비판인종이론을 둘러싼 전선이 만들어져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충돌은 미국의 기원에 관한 역사 논쟁이다. 2019년 8월 〈뉴욕타임스〉는 ‘1619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사를 내놨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북아메리카의 영국령 버지니아 식민지에 아프리카인이 처음 도착한 1619년에서 따왔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사에서 아프리카인의 기여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1776년의 미국 독립 선언이나 1620년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북아메리카에 온 필그림 개척자들을 강조해 온 기존의 관점들과 분명 달랐다.
트럼프를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에게 1619 프로젝트는 미국사를 비하하고 잘못된 인종 관념을 주입하는 이들의 해악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례였다. 트럼프는 지난해 9월 비판인종이론 교육 중단 행정 명령에 서명한 후 “애국적 교육”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1776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위원회의 설립 목적은 1619 프로젝트 등 미국 건국의 주역들을 폄훼하고 급진적인 관점에서 미국사를 왜곡하는 시도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선거에서 패배한 트럼프의 퇴임을 이틀 앞둔 올해 1월 18일, 1776 위원회는 4개월간의 결과물인 ‘1776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주요 저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애국주의를 강조하고 시민권 운동과 여성운동 등 미국 사회에 도전한 운동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채워 졌다. 이에 대해 미국역사협회(AHA)는 “미국 내 전문 역사가들의 어떤 조언도 찾을 수 없는” 편파적인 보고서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당일인 1월 20일, 행정명령으로 1776 위원회를 폐지하고 백악관 홈페이지에서 보고서를 삭제했다.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은 학교를 넘어 더 많은 기관으로 향했다. 지난 6월 23일 연방하원 국방위원회에서 공화당 의원은 육군사관학교가 비판인종이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군을 공격했다. 당시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나는 마오쩌둥을 읽었다. 칼 마르크스를 읽었으며, 레닌도 읽었다. 그렇다고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라고 답변했다. 뒤이어 군 최고 지휘관은 군이 열린 사고를 해야 하며 미국의 인종 문제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을 방어했다. “나는 백인의 분노를 이해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백인이다. 수천 명의 사람이 국회의사당 건물을 공격하고 미국 헌법을 전복하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
비판인종이론 논란은 인종주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다른 나라들로도 번졌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10월 보수당 내각 여성평등부의 평등부 차관 케미 베이드녹이 비판인종이론 공격을 주도했다. 그는 “우리는 교사가 학생에게 백인의 특권과 인종적 원죄에 관해 가르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며 잘못된 교육의 배경으로 비판인종이론을 지목했다. 놀랍게도 나이지리아계 부모를 둔 여성 정치인인 베이드녹의 주장은 미국의 백인 보수주의자들의 것과 거의 일치했다.
호주 연방 상원은 지난 6월 말 비판인종 이론을 교과서에 넣지 못하도록 하는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동의안을 주도한 이는 극우 정당 원네이션의 대표 폴린 핸슨 이었다. 이민과 다문화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유명한 핸슨은 개정 교육과정에서 호주 원주민이 겪은 억압과 차별을 가르치는 것이 호주인의 정체성을 부끄럽고, 반성해야 하는 것으로 세뇌시킨다고 비판했다. 사실 호주 교육과정은 초중등 교육에서 비판인종이론을 교육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호주의 보수 정치인들은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종 평등에 관한 모든 논의를 비판인종이론과 결부시키며 이 문제를 쟁점화했다.
비판인종이론 논란은 당분간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보수 정치인들이 앞장서 비판인종이론에 대한 공격을 정치적 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격의 선두에는 다시 한번 대통령 출마를 노리는 트럼프가 있다. 그는 지난 7월 11일 미국 최대 규모의 보수 정치 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에 참석해 “급진 좌파,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비판인종이론가들을 무찌를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는 관습적인 반공주의적 수사들 외에 비판인종이론가라는 새로운 적을 특별히 지목하며 이후 이민 반대, 백신 접종 반대와 더불어 반인종주의 운동에 대한 반격이 보수 정치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것임을 예고했다.
비판인종이론 공격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이는 트럼프만이 아니다. 트럼프를 위협하며 공화당의 차기 대선 주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도 대표적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기 나라와 서로를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비판인종이론 같은 것이 우리 교실에 들어설 자리는 없다”라고 선언했다. 주지사의 공세에 힘입어 플로리다 교육위원회는 지난 6월 10일 만장일치로 공립학교에서의 비판인종이론 교육을 금지했다. 아울러 교육위원회는 공립학교에 “미 공화국의 철학적 토대와 미국 예외주의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도록 하는 자료로 교육하라는 새 지침을 내렸다.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이 다른 나라와 차별화된 역사와 제도를 가진 특별한 국가라는 오래된 관념이다. 이는 미국인에게 국민적 자부심을 불어넣는 동시에 미국의 팽창주의적 대외 정책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활용돼 왔다.
비판인종이론 교육을 금지한 디샌티스는 곧이어 ‘플로리다 하원 법안 233’을 통과시키며 더욱 강력한 행동에 나섰다. 법안은 플로리다주에서 고용한 교사들에게 그들의 정치적 신념을 주에 등록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설문조사를 통해 학생들의 정치적 신념도 조사하도록 했다. 주지사는 설문조사가 “지적 다양성 모니터링”에 사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반대자들은 이 법안이 당국과 다른 정치 이념을 근절하는 데 사용될 우려가 있으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 제정을 금지하는 수정헌법 1조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인종주의가 주요 정치 의제로 다루어지지 않는 한국에서는 비판인종이론이나 이를 둘러싼 논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의 학술적 논의에서 일부 다루어지거나 보수 기독교계나 극우 매체를 통해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견해가 약간 선전되는 정도다. 그러나 비판인종이론 논란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이미 한국 사회에도 대단히 익숙한 것들이다. 국정교과서, 건국절,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반일 종족주의’, 전교조에 대한 ‘종북 교육’ 공격, 대통령 후보들의 점령군과 해방군 논란에 이르기까지 자국의 역사에 대한 비판을 허용할 것인지를 두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대립은 미국과 한국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비판인종이론 논란에서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비판인종이론 학자들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들은 수능과 같은 표준화된 시험 제도가 조력에 필요한 비용을 들일 수 있는 계층의 학생들에게 유리한 제도라고 지적했다. 비슷하게 로스쿨 입학시험 점수는 1년 차 성적을 예측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고 공감 능력, 성취 지향성, 의사소통 기술과 같은 다른 중요한 능력을 측정하지 않는다고 봤다. 대입에서 소수인종에게 혜택을 주는 적극적 우대정책은 인종이 아닌 소득수준을 기준으로 실시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비판인종이론을 자신들의 적으로 지목한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어쩌면 인종주의가 능력주의와 같은 사회적 믿음과 긴밀하게 얽혀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