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기업 ‘삼립’으로 출발한 SPC의 추락

[1단 기사로 본 세상] 대기업 성장 SPC, 오너리스크·일감몰아주기·노조탄압 의혹도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1921년 황해도 옹진반도에서 태어난 고 허창성 회장은 14살 때부터 일본인이 운영하는 빵집 점원으로 일했다. 10여 년 일하다 해방 후 그동안 배운 기술로 1945년 10월 고향에 ‘상미당’이란 작은 빵집을 차렸다.

1948년 서울로 진출한 상미당은 방산시장에서 출발했다. 1961년 용산에 본사와 공장을 마련하면서 ‘삼립’이란 이름을 처음 내걸었다. 때마침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혼분식 장려운동으로 밀가루 소비를 촉진한데다 바로 옆 용산 미군기지에 군납업체로 선정돼 삼립빵은 급성장했다. 사세를 크게 키운 삼립은 1967년 가리봉동 산 67-2번지에 큰 공장을 세웠고, 1969년엔 공장 옆에 신사옥까지 세워 본격 가리봉동 시대를 열었다. 1971년 시흥공장, 1978년 아이스크림 공장까지 전국에 여러 공장을 세워 호황을 누렸다.

허 회장은 1975년 당시로선 혁신에 가까운 기업공개로 투명경영을 실천한데 이어 50대 중반인 1977년부터 서서히 경영에서 손을 뗐다. 큰 아들에겐 삼립식품의 여러 공장을, 차남에겐 성남의 샤니공장만 물려줬다. 큰 아들의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반대로 차남은 일찍부터 제빵에 전력투구해 승승장구했다. 차남은 형의 삼립식품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차남 허영인 회장이 키운 기업은 오늘날 파리바게뜨와 파리크라상, 베스킨라빈스31, 던킨도너츠 등 30여 개에 달하는 계열사를 거느린 식품대기업 SPC그룹이 됐다.

여기까지 들으면 감동적인 재벌 가족사다.

1973년 9월 18일, 삼립식품 노동자들의 파업

삼립식품의 역사에 ‘73년 9월 18일’은 특별하다. 가리봉동 공장에서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이날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가리봉동 공장 2600명의 노동자 가운데 1000여 명이 아침부터 공장 맞은편 야산으로 올라가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평일엔 12시간씩 주야 맞교대로, 주말엔 18시간 연속 근무하는 살인적 장시간 노동으로 회사를 굴지의 기업으로 키웠지만, 돌아온 건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다.

  삼립식품 노동자들의 와일드캣츠(비공인) 파업을 다룬 동아일보 1973년 9월 18일자 7면 기사. ‘저임(低賃)·혹사 없애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목에 담았다. 사진 왼쪽 아래는 노동부(당시 노동청) 관계자가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모습.

이들이 점거파업 대신 인근 야산으로 찾아든 것만 봐도 자신의 일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파업 중 불가피한 노사 충돌로 시설물이 파괴되는 걸 막고 싶었던 게다. 물론 회사 편만 드는 유신정권의 무시무시한 공권력도 두려웠다.

삼립식품엔 1968년 한국노총 화학노조 지부가 설립됐지만 1973년 파업 때 대부분의 노동자는 노조가 있는 줄도 몰랐다. 심지어 화학노조 삼립식품 지부장은 1969년부터 화학노조 위원장까지 겸했지만 정작 공장 노동자들 처우개선엔 눈을 감았다. 노조가 제 역할을 못하는 사이, 와일드캣츠(비공인) 파업을 주도한 건 입사 3년차 여성 노동자 정유성(23)이었다.

이들이 야산으로 올라간 1973년 전체 근로자 월 평균임금은 2만5433원이었다. 반면 월평균 소비지출액은 3만6600원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가 적자 가계를 꾸렸다. 1973년 굴지의 삼립식품 3년차 여공 월급은 1만8057원으로 전체 노동자 평균보다 30%나 더 낮았다. 그것도 살인적 초과근무 수당을 다 합친 돈이었다. 이 여공의 한 달 기본급은 6,524원에 불과했다. 연장수당 4,503원, 휴일수당 2,282원, 야근수당 3,030원, 월차와 생리휴가까지 반납하고 받은 수당 1,715원까지 합쳐야 겨우 1만 8천 원에 도달했다. 기본급보다 3배나 많은 수당을 받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연장노동을 했을까.

공장 뒤 야산으로 올라간 노동자들은 임금 50% 인상과 주 하루 휴무, 12시간 연속작업 개선, 점심시간 확보를 요구하며 농성했다. 당시 삼립식품은 이렇게 일을 시키면서도 공식 점심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눈치껏 먹어야 했다.

  SPC 홈페이지에 실린 가리봉동공장 전경.

파업 3일째, 다급해진 회사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회유했고, 순진한 노동자들은 회사의 약속을 믿고 공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회사는 20% 임금 인상과 주동자 13명 연행으로 답했다. 연행자 중 6명은 국가보위법과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기계적 균형을 맞춘답시고 검찰은 회사 대표도 근기법으로 입건했지만 벌금 3만 원으로 끝났다.

근로기준법에 8시간 노동이 있었지만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현장에서 8시간 노동제를 진짜로 관철시킨 건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1973년 삼립식품 파업과 1976년과 1979년 해태제과 여성 노동자들의 특근거부, 잔업거부 투쟁 끝에 식품업계는 1980년부터 8시간 근무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8시간 근무는 다시 물거품이 됐고, 한국은 지금도 세계 최장시간 노동국이란 수치스런 이름표를 떼지 못했다.

필자는 2017년 SPC그룹의 파리바게뜨 제빵사들의 이상한 삼중 고용구조가 드러나고 제빵사들이 노조를 만들었을 때, SPC그룹의 역사를 담은 위의 글을 <매일노동뉴스>에 기고해 SPC그룹이 상식적이고 건전한 노사관계를 세워나가기를 바랬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46년 전 기업공개로 투명경영의 혁신을 이뤄냈던 SPC는 최근 오너 리스크에 일감 몰아주기로 비난을 받고 있다. 최근 들어선 노조 탄압 의혹도 새로 추가됐다.

대기업 성장 SPC, 오너리스크·일감몰아주기·노조탄압 의혹도

공정거래위원회는 2020년 8월 ‘통행세 거래’ 등 부당지원 혐의로 SPC에 647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그룹 총수 허영인 회장 등 3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부당지원에 매긴 역대 최대 규모였다.

공정위에 따르면 SPC는 2011년 4월~2019년 4월 그룹 내 부당지원을 통해 SPC삼립에 총 414억 원의 이익을 제공했다. 2013년 9월~2018년 7월까지 파리크라상 등 3개 제빵계열회사가 밀다원 등 8개 생산계열사 제품을 구매할 때 삼립을 거치도록 하는 등 이른바 ‘통행세’를 몰아줬다. 삼립은 생산계열회사에서 밀가루를 740원에 사서 제빵계열사에 779원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챙겼다. 다른 계열사 샤니는 2011년 4월 상표권을 삼립에 8년간 무상 제공하는 계약을 맺었다. 판매망도 정상가인 40억6000만 원보다 낮은 28억5000만 원에 양도했다. 이 같은 부당지원 행위가 결국 총수 2세를 위한 것이라는 게 공정위 판단이다.

그룹 내 유일한 상장사 ‘삼립’ 주가를 높인 뒤 총수 2세가 보유한 삼립 주식을 파리크라상 주식으로 바꾸기 위해 부당지원 행위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총수 일가가 지분을 100% 가진 지주회사 격인 파리크라상의 2세 지분을 늘리면서 총수 일가의 지배력 유지와 경영권 승계를 유리하기 만들기 위해서라는 거다. 사건이 계열회사 부당지원과 총수 2세의 부정 승계 의혹 등으로 나뉘는 만큼 수사 방향도 두 갈래로 편다는 것이다.

물론 SPC는 일감 몰아주기나 통행세가 없었다며 공정위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SPC를 바라보는 국민들 눈길은 곱지 않다. SPC는 이미 2018년에도 부당 내부거래 의혹으로 공정위 조사와 함께 국세청의 세무조사도 받아 입길에 올랐다.

  경향신문 2018년 8월 8일 10면.

설상가상으로 허영인 회장의 차남 허희수 부사장이 대만에서 대마를 밀수해 피운 혐의로 2018년 8월 검찰에 구속돼 오너 리스크까지 더해졌다. 허 부사장은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설립자 허창성 회장의 손자인 허희수 부사장은 2007년 파리크라상 상무로 입사해 그룹 마케팅전략실장을 거쳤다. 2016년 미국 뉴욕의 유명 버거 매장 ‘쉐이크쉑’을 국내에 들여와 대박을 터뜨리며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허 부사장의 대마 밀수와 흡연 사실이 불거지자 SPC그룹은 입장문을 내고 “허 부사장을 그룹 내 모든 보직에서 즉시 물러나도록 했고, 향후 경영에서 영구히 배제하도록 조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허 부사장이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명물 샌드위치 브랜드 ‘에그슬럿(Eggslut)’을 국내에 론칭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알려지자 경제신문들이 앞 다투어 경영에서 영구배제 된 허 부사장의 ‘복귀 신호탄’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경영에서 영구히 배제”한다던 발표는 사실상 허언이 되고 말았다.

최근 SPC그룹 산하 던킨도넛을 운영하는 비알코리아는 위생 논란이 불거지자 전 사업장과 생산 시설 위생점검을 실시하겠다며 고객에 사과했다. 비알코리아는 여전히 제보 영상 조작과 식품 테러 가능성을 굽히지 않았지만, 위생 문제에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이라도 SPC그룹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노조 탄압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할 순 없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란다.

  한국일보 2021년 10월 2일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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