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기와 기후위기

[이슈②] 기후악당 국가가 지운 사람들

차례

① 탄소중립위원회 청소년 위원은 왜 사퇴를 선언했나
② 민주주의의 위기와 기후위기
③ 기후위기, ‘막아내는’ 것이 아닌 ‘함께 겪는 것’
④ 기후정의운동은 ‘사회적 대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⑤ ‘기후정의 선언’에서 ‘기후 총파업’ 까지
⑥ [워커스 사전] 탄소중립
⑦ 기후위기, 세상을 멈추는 노동자



기후정의의 문제의식

1~2년 전만 해도 낯설었던 ‘기후위기’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상이 됐다. 기후위기 담론의 일상화와 함께 기후위기의 의미도 분화하고 있다. 기후위기가 처음 한국에 소개될 때에는 녹아가는 북극해의 얼음과 멸종 위기에 처한 북극곰, 점증하는 기후재앙, 따라서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미래세대’가 절멸의 위협에 처할 것이라는 경고성 담론의 형태를 띠었다. 동시에 기후위기가 ‘우리 모두의 문제이자 책임’이기에 분리수거, 에너지 절약, 탈 플라스틱 등 개개인의 일상적 실천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컸다. 정부는 아직도 이런 담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기후위기가 ‘인류 전체’의 책임이 아닌, 소수 특권층의 책임이라는 인식도 퍼지기 시작했다. 세계 100대 기업이 전 세계 탄소의 71%를 배출한다는 연구가 나오고, 많은 연구자와 국제기구들은 기후위기의 책임이 자연환경과 생명 시스템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 삼는 자본주의적 산업 체제와 이를 통해 이득을 누리며 끊임없이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지구를 오염시켜왔던 소수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됐다. 인간의 무차별적 자연파괴와 온실가스 배출로 오늘날의 위기가 도래했음을 강조하는 인류세(anthropocene) 시대 구분 대신 자본주의 체제의 책임을 부각하는 자본세(capitalocene)가 더 적절하다는 문제 제기도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체제 전환’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도 확산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그린뉴딜’, ‘2050 탄소중립’과 같은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정책이 본격화하며 더 강화됐다. 정부가 기후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기업 지원을 통한 ‘녹색성장’을 추구하면서, 기업의 이윤과 권력이 강화하고 사회 불평등은 증대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들은 당장의 시급한 에너지 전환 과제는 뒤로 미룬 채 현대자동차를 위해 전기차, 수소차 지원금을 늘리고 있다. 박정희 쿠데타 직후 초국적 화석연료 기업인 걸프 오일(Gulf Oil)과의 제휴로 설립된 대한석유공사(유공)가 모태인 SK는 정부 탄소중립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다. 이들은 지난 2년간 빠른 속도로 자회사를 늘리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탄소중립 휘발유’라는 얼토당토않은 정책을 당당히 홍보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반발과 저항의 흐름이 커지면서 ‘기후정의’란 용어 사용도 잦아지고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 인식이 그러하듯, ‘기후정의’의 이해도 제각각이다. 누구에게는 미래세대의 피해를 막는 것이 기후정의이고, 누구는 사회주의가 되면 기후정의는 실현된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는 기후위기 피해 당사자인 소위 ‘사회적 취약계층’의 목소리를 잘 취합해내는 것이 기후정의이고, 누구는 기후위기 대응으로 기업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며 기업을 위한 정의는 어디 있느냐 항변한다. 누구는 남이 하니까 기후정의를 따라 말한다. 그 내용을 무엇으로 삼든 기후위기 개념 확산은 온실가스 증가에 따른 기후변화가 더 큰 위기의 ‘징후’일 뿐이라는, 따라서 기후위기 대응도 감축 수치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차원까지 따져 물어야 한다는 인식을 퍼뜨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지난달 출간된 《기후정의선언 2021》(선언)은 기후정의를 둘러싼 이런 혼란에 대한 정치적 개입이었다. 선언은 먼저 기존 기후위기 담론이 온실가스 감축의 문제로 협소화하고 있으며 이는 대응에 있어 시장주의적, 성장주의적, 기술주의적 편향을 낳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시에 기후위기가 다수 사회 구성원의 일상적 삶의 문제라는 점을 부각하고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기후위기의 정치 사회적 동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런 논의는 기후위기와 불평등으로 대변되는 사회경제적 위기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와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민주주의의 위기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는 시장 논리에 따른 정치적, 사회적 영역의 식민화를 요체로 한다. 이는 기후위기 대응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시장이 자율적으로 기후위기 극복 방안을 찾아낼 것이라는 믿음은 ESG(환경・책임・지배구조를 강조하는 기업의 모델)나 RE100(필요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100% 바꾸겠다는 기업과 기관의 캠페인)과 같은 ‘대안’으로 주장되는데, 누가 평가의 기준을 만들고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민주주의나 사회 공동체의 원리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데 누가, 어떻게, 무슨 기술을 연구‧개발할 것인지, 그 기술의 혜택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의 논의도 전무하다. 정부는 막대한 세금을 연구‧개발에 쏟아붓는데 그 결과물에 대한 공공적 분배와 관련된 민주적 장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녹색기술 부문에서 ‘대장동식 일확천금’을 노리는 관료와 전문가에 의해 이득이 독식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기술개발이 실패할 경우, 그 부담은 전적으로 공공이 떠맡는다.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공공화’는 기후위기 대응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기후정의운동가들이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 개막식이 열린 지난 5월 30일, P4G가 기후위기의 해결과는 무관한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에 불과하다며 개최 장소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서 비폭력 기후불복종 직접행동을 펼쳤다. [출처: 멸종반란한국·멸종저항서울]

이러한 시장 논리 비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95년 ‘워싱턴 컨센서스’가 만들어지면서 신자유주의는 전 지구적으로 확산했고, 이 과정에서 시장 논리가 정치와 사회의 영역을 지배할 때 나타날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경고도 터져 나왔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함께 등장한 다자간・양자간 무역 협상은 실제 민주주의가 어떻게 전 지구적 차원에서 파괴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민주적으로 선출・통제되지 않는 소수 관료가 세계 경제의 규칙들을 정하면서 개별 국가가 자율적인 경제 정책을 만들어낼 여지는 급격하게 줄었다. 아무리 민주적인 정부라도, 아니 민주적인 정부일수록 초국적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경제 규칙의 압력을 강하게 받게 됐다. 이에 저항한 쿠바와 베네수엘라, 볼리비아는 이에 저항한 배제와 고립, 심지어 군사적 위협까지 감내해야 했다. 기후정의가 왜 비서구, 남반구에서 가장 먼저 제기됐는지 가늠해볼 만하다.

일국적 차원의 민주주의도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정당 정치가 도매금으로 신자유주의적 보수화의 길을 걸으면서 좌우 이념적 구분으로 형성됐던 유럽과 북미 정당 간의 차이는 무의미해졌다. 이념 경쟁이 신자유주의적 합의에 자리를 내주면서 에너지, 의료, 교육, 주거 등의 공공 서비스는 상품화됐고 중요한 정책 결정은 소수 엘리트가 독점했다. 여론조사와 선거를 통한 ‘정치 참여’가 대세가 되면서 노동조합, 협동조합, 지역 공동체를 비롯한 사회 구성원들의 집단적 힘은 약화했다. 시민의 정치적 참여는 지배적 정치경제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제약됐다. 군사 장비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미국의 경찰이나 최근 영국 정부가 통과시키려는 새 경찰법(경찰 판단에 ‘불편’이 초래될 것 같으면 시위를 진압할 수 있게 함)은 그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방역을 핑계 삼아 집회의 자유를 제약하는 한국 정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포스트 민주화’라는 개념은 이처럼 민주주의가 주기적인 선거와 표현의 자유 등 최소치의 형식적인 차원으로 축소, 퇴보한 현실을 직시하는 개념이다.(1) 축소된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시장 논리가 정치・사회 영역을 지배하면서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고민도 옅어진다.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정부가 책임지고 맡아왔던 공공사업을 민간 부문과의 협력을 통해 추진한다는 공공-민간 파트너십(Public Private Partnership, PPP) 같은 ‘협치’ 개념이다. 여기서 ‘민간’이란 물론 기업과 자본을 의미한다. 시민사회 행위자를 PPP의 주체로 삼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 시민사회는 정부와 기업의 하위 파트너가 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런 ‘협력’이 계속되면서 정부-시장-시민사회의 구분 정립은 점차 무의미해지고 있다.


위의 그림은 주류 정치학에서 정부와 시장, 시민사회 사이의 이상적 관계를 묘사할 때 흔히 사용하는 도표다. 상이한 조직과 운영 논리를 가지는 세 영역이 전제되고 영역 간의 부분적인 교차가 묘사된다. 고유한 속성과 자율성을 가지는 각각의 영역이 전제되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 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설정된다. 실제 현실에서 이와 같은 균형이 이뤄졌던 적은 없지만, 적어도 자율성에 기초한 영역 간의 균형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합의를 반영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아래 그림에 더 가깝다. 정부와 시장, 시민사회가 가지는 고유성과 자율성의 영역은 급격히 줄었고 세 영역이 겹치는 부분이 가장 커졌다. 그렇다고 각 영역의 고유한 속성을 초월한 새로운 가치나 지향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시장에 고유해야 할 이윤 추구, 효율과 경쟁의 논리가 정부와 시민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권력자들은 현실에서 세 영역의 관계가 위의 그림을 따르는 것처럼 말한다. 이들 간의 협력을 통해 시너지가 발생한다고 선전하면서 힘없는 자들을 동원하고 그들의 의식을 조작한다. 한국의 기후위기 대응에서 이런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2050 탄소중립 컨트롤타워’ 탄소중립위원회(탄중위)다.

시장 권력의 거버넌스 기구, 탄중위

시작부터 문제투성이였다. 탄중위가 급조되면서 출범 이후 한동안 사무처도 제대로 못 꾸렸고 몇 달 동안 홈페이지도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 위원 섭외는 선정 기준이나 절차에 대한 아무런 공론 없이 단체도 아닌 개인을 통해 비공개로 이루어졌다. 멸종저항서울은 탄중위 출범을 앞두고 수십 개 단체의 연명을 받아 탄중위가 정부의 친기업 그린워싱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구가 될 것을 우려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신규 석탄발전소와 신공항 건설을 중단하고, 탄중위에 참여하는 소위 ‘시민사회 위원’들은 민주적 대표성과 책임성의 문제에 답해야 한다는 요구도 덧붙였다. 그러나 누구도 답하지 않았고, 탄중위는 결국 산업계와 기업 측의 대변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5월 말 출범했다. 한국노총을 제외하고는 노동자, 농민, 지역사회, 영세 상공인, 빈민, 소수자 등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참여는 전혀 없었다. ‘시민사회’를 대표한다는 위원의 상당수는 이미 다른 거버넌스 기구의 대표를 맡은 이들로 채워졌다.

탄중위의 비민주성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8월 초 세 가지 안을 담은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발표했으나 둘은 아예 탄소중립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산업계의 탄소배출량은 세 시나리오 모두 똑같아 산업계에 경도된 결과라는 비판이 일었다. 이어서 실체도 알 수 없는 ‘기술작업반’이 시나리오 작성을 주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KBS는 “이럴 거면 정부가 다 하지 왜 위원회를 만들까”, “우리를 들러리 세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등 참가 위원들의 무책임한 하소연을 보도했다. 탄중위의 비민주적 운영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자 탄중위는 소통과 참여를 내세우며 500명으로 구성된 ‘탄소중립시민회의’를 발족했다. 하지만 ‘시민 참여단’ 구성 과정에서 지인의 소개를 요청하고 금전 지급을 매개로 참여를 권유하는 일이 발생해 물의를 일으켰다. ‘숙의 민주주의’를 표방한 탄소중립시민회의는 두 번의 온라인 교육과 이틀에 걸친 토론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으나, 심의하거나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후정의운동가들이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 개막식이 열린 지난 5월 30일, P4G가 기후위기의 해결과는 무관한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에 불과하다며 개최 장소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서 비폭력 기후불복종 직접행동을 펼쳤다. [출처: 멸종반란한국]

탄중위는 이미 정해진 결정을 어떻게든 ‘민주주의’의 외피를 입혀 정당화하려는 행보를 보여 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부재했고 참여는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했다. 이런 위선은 ‘부문별 협의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간담회에서 정점을 찍었다. 2030 온실가스 감축 목표 관련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던 간담회는 36개 협회와 이루어졌다. 반면 ‘시민사회’라 할 만한 단체들과의 간담회는 7개뿐이었다. “탄소중립위,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다”라는 한 농정 언론의 기사 제목이 웅변하듯, 농어민과의 간담회는 참가자들이 ‘(탄중위가) 가르치려 든다’, ‘결론을 정해놓고 협의회라는 형식적 절차만 거치고 있다’라며 분통을 터뜨릴 만큼 소통과 거리가 멀었다. 노동 간담회 참여자는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꼴’이라 토로했고, 한 청년 참가자는 ‘의견수렴 한다고 해서 갔는데 이야기 들을 생각 없이 탄중위 입장만 일방적으로 반복했다’라는 소회를 나누기도 했다. 현실은 이런데도 탄중위 내부 문서는 간담회에 참가한 단체들을 나열한 뒤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참여 협회, 단체’로 소개했다.

몇 달 안 되는 탄중위의 행보는 그동안 기후위기를 악화시켰던 정치적 결정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을지, 민주주의(혹은 민주주의의 퇴보)가 한 사회의 경로를 결정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탄중위로는 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기후위기 대응이 불가능한지, 그리고 우리가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전환해야 할 체제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보여주었다. 정부와 탄중위는 참으로 처절하게 민주적 정당성의 외피가 필요했고, 정부와 기업, 정부 친화적 시민사회는 자신들이 가진 자원을 동원해 그것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탄중위에 비판적이면서도 탄중위를 수긍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강력하게 기업과 시장 논리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하지만 오랜 기간 관행적으로 진행돼온 기후‧환경 거버넌스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본격화되고 탄중위 체제에서 배제됐던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운동이 꿈틀대고 있다. 이 사회운동은 정부와 사회 영역에 침투한 시장의 논리를 밀어내고 생태적・공공적・사회적 원리를 회복하려는 싸움이자 민주주의의 타락에 맞서 인민 주권과 공동체적 원리에 입각해 민주주의를 올곧게 세우려는 투쟁이다. 무한 성장과 이윤 추구 행위가 지구 오염을 가속화하기 위해 시민을 고객으로 취급하는 시장화 된 민주주의의 도장이 필요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한국에서도 2000년대 후반 ‘포스트 민주화’라는 용어가 사용됐는데, 이는 이 글의 문제의식이 기반하고 있는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 등에 의해 개념화된 ‘포스트 민주화’ 개념이 보여주는 체제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 분석이나 비판과는 무관하게 ‘민주화 이후’의 시대를 지칭하는 기술적 표현에 머물렀기 때문에 같은 맥락에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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