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노동자의 벗, 정칠성의 사회주의 운동과 여성해방론

[혁명의 세계, 반란의 역사]

  정칠성 [출처: Wikimedia Commons]

대구 출생이다. 여덟 살에 기생이 된 걸 보면 집안이 매우 빈곤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우연히 대구 관찰사의 잔치를 구경한 뒤 스스로 선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나름의 처지는 매우 복잡했을 것이다. 정칠성(1897-1958)의 재능은 빛났다. 열여덟 살에 서울에 와서 삼남 출신 기생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한남 권번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기명(妓名)은 금죽(琴竹)인데, 거문고와 대나무, 시와 음악 모두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시를 짓는 솜씨가 일품이었고, 그림에도 탁월했다. 책 읽기를 좋아했고 글쓰기는 보통이 아니었다. 가야금, 거문고를 두루 잘 타면서 창과 판소리, 남도소리에도 뛰어났다. 바둑과 장기도 잘 두는 기생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특히 남성 복장을 하고 승마를 즐겼던 일상은 정칠성의 기개를 엿보게 한다. 정칠성에게 승마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취미활동이 아니었다. 전통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승마를 하면 출신도 성별도 별것 아니었다. 언젠가는 ‘조선에 유명한 여장부’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주체성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러니 누가 감히 정칠성을 경성 제일의 예인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생에서 사회주의자로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자신의 삶이 완전히 바뀔 줄은. 아니,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삶을 바꾸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삶이 바뀐 결정적인 계기는 3.1 운동이다. 1919년 3월 서울 한복판에서 목격한 만세 시위는 정칠성에게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에 대한 열정을 심어줬다. 기생에서 사상 운동가로의 변화가 본격화됐다. 정칠성은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영어 강습소에서 어학을 공부했다. 이때부터 기명인 금죽에서 칠성(七星)으로 개명하며 그야말로 ‘기름에 젖은 머리를 탁 비어 던지고’ 사회운동가로 변했다. 칠성은 어두운 밤 긴 항해의 길잡이가 되어준 북두칠성에서 따왔다.

이듬해인 1923년 귀국해 고향인 대구에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다. 10월에는 이춘수, 서복주, 김귀조 등과 함께 대구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했다. 이후 그녀의 삶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역사와 함께 한다. 1924년 5월 10일 서울에서 허정숙, 주세죽, 정종명, 박원희 등 당대 대표적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 조직에 참여하게 된다.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운동 여성 단체로 알려진 조선여성동우회는 ①본회는 사회진화법칙에 의하여 신사회의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을 세울 일군의 양성과 훈련에 기하며, ②조선여성해방운동에 참가할 여성의 단결을 기한다는 두 개의 강령을 채택했다. 당시 그들은 여성운동의 주류였던 양반 ‘부인’을 대상으로 하는 계몽운동이나 위생, 육아 등 가정에 필요한 의제 중심의 운동보다는 여성 억압에 대한 사회구조적 모순에 주목하고자 했다. 정칠성은 허정숙 등과 함께 전국 각지 순회강연과 활발한 기고 활동 등 여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1925년부터 사회주의 내부 그룹 간의 갈등이 심화돼 분열하고 말았다. 그 결과 조선여성동우회는 경성여자청년동맹과 경성여자청년회로 나누어졌다. 정칠성은 이러한 분열과 거리를 두면서 이춘수와 함께 경북 지역 사상 단체의 연합인 사합동맹(四合同盟) 결성에 참여했다.

혁명 주체로서의 무산 여성

1925년 3월 정칠성은 다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여자기예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현경, 황신덕 등의 유학생들과 삼월회(三月會)를 조직했다. 삼월회는 무산계급 남성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여성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주장한 사회주의 단체로서 다른 재일 단체들과 연합해 독립운동을 벌여나갔다. 이 무렵 정칠성은 여성이 최초의 노예였다고 주장한 베벨의 《부인론》과 일본의 여성 사회주의자인 야마카와 기쿠에의 영향을 받아 ‘무산 여성’ 중심의 여성해방론을 확립했다.

그리고 정칠성은 독일 여성 사회주의자의 이름을 딴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잡지를 발행하기도 한다. 이 잡지의 주된 내용은 기쿠에 저작의 조선어 번역이었으며 일본과 조선의 학생 및 노동자가 주된 독자층이었다. 정칠성은 일본에 머물면서 〈신여성이란 무엇-가치 대폭락의 허물은 누구에게〉, 〈참자유의 길〉 등의 글을 통해 여성의 계급의식과 운동을 북돋았다. 특히 1926년 1월 4일 조선일보에 실린 〈신여성이란 무엇〉에서 여성해방을 쟁취할 수 있는 진정한 신여성은 구제도의 불합리한 환경을 부인하는, 강렬한 계급의식을 가진 프롤레타리아 여성, 즉 무산 여성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다음의 글에서 구체화된다.

“내가 보는바 신년에 신호를 올리며 앞날의 거룩한 신생활의 힘찬 신호를 올릴 참말 신녀성은 오직 연초, 제사, 방직공장 등 흑탄연돌 속에서만 볼수 잇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재촉하는 새벽 다섯 시 고동소리와 함께 피곤한 다리를 옴겨 놓는 그들! 여기에 그들의 거름이야말로 이 앞날 신생을 개척할 행군의 조련이며 그들의 눈물과 고역의 피와 땀은 앞날 약속을 신호하는 것입니다. 그밖에 로자, 코른타이, 그라라, 나이두 등 여러 훌륭한 혁명 부인의 것는 거름을 것지 않으면 아니될 우리 조선부인들, 한발 잣칫하면 멸망이 올것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신호를 올려야 될 줄 압니다.” (《동광》 29권, 동광사, 1931)


정칠성은 1931년 잡지 《동광》과의 인터뷰에서 연초공장이나 방직공장의 여성 노동자를 새로운 여성상으로 제시했다. 조선의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유습을 폐절하고 일제와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 여성 노동자를 상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여성해방론은 1927년부터 전개되는 근우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된다.

근우회 해소와 해방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정칠성은 1927년 5월 신간회 자매단체인 근우회 결성에 참여했다. 근우회는 김활란, 유각경 등의 기독교계 여성인사와 박원희, 정칠성, 허정숙 등 사회주의운동 지도자들, 그리고 이현경, 황신덕, 최은희 등의 언론계 신진 여성들이 결합한 좌우합작 단체다.

정칠성은 조직의 책임자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의 계급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에 의욕적으로 참여했다. 전국 각지에 여성해방운동론을 확산시키며 여성 농민·노동자의 열악한 상황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에 따라 문맹퇴치 등의 계몽을 통해 무산 여성을 사회적, 혁명적 주체로 만들고 운동 조직과 사회변혁을 이루는 단계적인 혁명노선을 제시했다. 이러한 노선은 우파 세력은 물론이고 같은 좌파 내에서도 차이를 보이며 갈등이 증폭됐다. 게다가 일본 경찰에 수차례 검거돼 고초를 겪었다. 1930년 1월에 광주학생의거에 연루된 혐의로 정종명, 허정숙 등과 함께 검거·투옥되기도 했다. 3월에는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돼 검거되는 등 합법적, 비합법적 투쟁에 나섰다.

일제의 끈질긴 탄압과 노선을 둘러싼 좌우 분열 등으로 근우회 해체가 가시화되자 1930년 12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사직했다. 그리고 근우회가 해체된 뒤 1년 동안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퇴사한 후에는 경성, 평양, 대구, 통영 등 전국을 돌면서 편물 강습으로 생활했다.

해방 이후 대구로 돌아온 정칠성은 조선공산당 경북도당에 참여함으로써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47년 남한지역에서 사회주의 진영의 활동공간이 축소하면서 월북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지냈다. 이후 노동당 간부와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58년 무렵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칠성이 남다른 것은 완전한 여성해방을 추구한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사회주의 원리 원칙에 충실했다. 그녀의 고독함과 쓸쓸함 속에 묵직한 사상적 실천이 올곧은 열정을 지탱해줬다.

[참고문헌]

· 박순섭, ‘1920~30년대 정칠성의 사회주의운동과 여성해방론’, 《여성과 역사》 제26집(한국여성사학회, 2017).
· 박순섭, ‘[독립운동가열전] 정칠성–여성노동자를 대변한 근우회의 리더’, 《내일을 여는 역사》 2019 가을 통권 76 (내일을여는역사재단, 2019).
· 박정애, ‘3·1독립운동 뛰어든 ‘사상기생’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 한겨레, 2002.4.15
· 진선영, ‘기름에 젖은 머리를 턱 비어 던지고-사회주의, 여성주의, 지역주의, 혁명가 정칠성의 겹서사 연구’, 《한국문화연구》 제37권(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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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내가 보는바 신년에 신호를 올리며 앞날의 거룩한 신생활의 힘찬 신호를 올릴 참말 신녀성은 오직 연초, 제사, 방직공장 등 흑탄연돌 속에서만 볼수 잇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을 재촉하는 새벽 다섯 시 고동소리와 함께 피곤한 다리를 옴겨 놓는 그들! 여기에 그들의 거름이야말로 이 앞날 신생을 개척할 행군의 조련이며 그들의 눈물과 고역의 피와 땀은 앞날 약속을 신호하는 것입니다. 그밖에 로자, 코른타이, 그라라, 나이두 등 여러 훌륭한 혁명 부인의 것는 거름을 것지 않으면 아니될 우리 조선부인들, 한발 잣칫하면 멸망이 올것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신호를 올려야 될 줄 압니다.” (《동광》 29권, 동광사, 1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