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비극: 누가 이들을 빈곤과 부패로 몰아넣었나

[우크라이나에 떨어진 별]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독립국, 우크라이나

차례

⓵ 세계로 퍼진 반전 시위, ‘무기 지원’ 논쟁부터 ‘제국주의 반대’까지
⓶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미‧러의 ‘파시즘’ 대결
⓷ 우크라이나의 비극: 누가 이들을 빈곤과 부패로 몰아넣었나
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정치경제학
⓹ 미국의 대중국 포위전략, 한반도는 안전한가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꼽힌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가 된 우크라이나는 과거의 산업 잠재력을 잃은 채 세계 경제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탈산업화가 진행되며 일자리가 감소했고, 대량 이주가 발생했으며, 빈곤이 심화했다. 정치 부패도 극심했다. 우크라이나는 2021년 국제투명성 기구 부패인식지수(CPI)에서 32점을 받아, 180개국 중 122위를 기록했다. 유럽 국가 중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순위다.

사회적 빈곤과 부패 속에서, 정치적 저항들도 일어났다. 2004년 말 색깔혁명인 ‘오렌지 혁명’이 일어나 친러 정권을 몰아내고, 친서방 정권으로의 교체를 이뤄냈다. 2014년에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 친러 성향의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하지만 정권교체는 경제 발전이나 정치 민주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경제 위기는 심화했고, 이주와 인구 감소가 이어졌으며, 내부 분열은 가속화했다. 우크라이나의 정치와 경제는 서구와 러시아를 등에 업은 소수 엘리트가 독점했다. 30년간 한 번도 정치・경제적 독립을 이뤄보지 못한 우크라이나는, 이제 제국주의 국가들의 패권 전쟁이라는 또 다른 비극을 마주하게 됐다.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부패한 나라

지난 30년간, 우크라이나의 구매력 기준 GDP는 1990년 이전을 한참 밑돌았다. 원자재 수출경제 구조를 탈피하지 못하면서 국민 생활 수준도 점점 나빠졌다. 물론 빈곤은 평등하지 않았다. 상위 10%가 하위 10%보다 40배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며 양극화가 심화했다. 고위 공직자의 임금은 우크라이나 평균 월급의 40~70배, 많게는 130배 이상에 달했다. 우크라이나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67%의 가구가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했다. 32%는 더 이상 가난하진 않지만 중산층은 아니라고 답했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1%에 불과했다. 10명 중 9명은 소득과 부에서 심각한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우크라이나의 월평균 임금은 500유로(67만 원) 미만이다. 우크라이나 국립 사회학 연구소에 따르면, 난방철에는 가구 소득의 79%를 식품과 가스, 전기, 수도 요금 등으로 지출하고 있다. 일자리 감소와 불안정 노동 증가도 만성적인 빈곤을 낳았다. 우크라이나의 경제활동인구는 1990년 2,540만 명에서, 2021년 1,666만 명으로 3분의 1이 줄었다. 비공식 불안정 노동도 크게 증가해 우크라이나 노동자의 약 절반이 비정규직 신분이다.

일자리가 줄면서 노동자의 대규모 이주도 이어졌다.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노동자는 러시아로, 중서부 노동자는 EU 국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UN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우크라이나 노동 이주 규모는 세계 8위다. 해외로 이주한 우크라이나 노동자는 약 400~1,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국내로 송금하는 임금은 연간 약 130억 달러로, 우크라이나 GDP의 약 10%에 달한다. 지난해 기준, 국민 40%가 해외 이주 의향을 갖고 있었다. 최근 러시아의 침공으로 최대 500만 명의 노동자가 추가로 이주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인구가 감소하는 국가 중 하나다. UN은 현재 4,319만 명의 우크라이나 인구가 2100년에는 2,410만 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우크라이나의 불평등과 고용불안은 더욱 심화했다. 코로나19 초기 정부의 대책은 사업주에 대한 세제 혜택 등 부유층의 손해를 막는 것이었다. 정부는 기업의 사회공헌금과 벌금, 세무조사와 토지세까지 면제해줬다. 노동자는 언제나처럼 급여에서 소득세가 자동 공제됐지만, 코로나19로 손해를 보지 않은 사업주들까지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 사이 실업률은 8.6%에서 9.9%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이라고는 해고 가능성이 있는 노동자에게 고작 한 번의 최저임금을 지급하는 것 정도였다. 반면 이미 막대한 이윤을 쌓은 농업 기업들은 토지세 면제로 더 많은 이익을 얻었다.

우크라이나의 토지 현황은 이곳의 경제 불평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영토의 70.8%가 농경지인 우크라이나는 세계 4위의 곡물 수출국이다. 소련 붕괴 후 토지 개혁을 실시해 약 700만 명의 농촌 주민에게 집단・국영농장의 토지를 분배했다. 지난해 7월 까지는 농업용 토지의 매매가 금지돼 있었다.1하지만 정부의 농지 매매 금지 정책에도, 자본은 수십 년간 기형적인 방식으로 토지를 독점하고 사유화했다. 소수의 기업이 수백만 명의 개인 농지를 싼 가격에 임대해, 경작지와 농업 시장, 생산 및 유통망을 독점하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기업에 토지를 임대하는 농지 소유주는 70%(470만 명)에 달한다. 이를 통해 상위 10개의 농업 기업이 전체 농지의 약 10%를 차지했다. 상위 100개 기업이 차지한 농지는 전체의 4분의 1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농업 시장의 60%는 거대 자본이 점유하고 있다. 국가는 이들에게 보조금 혜택까지 제공한다. 시장 경쟁력을 잃은 소작농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싼 가격에 토지를 내놓는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농촌 빈곤은 극심해졌고, 농민 30.1%가 기준 생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

빈곤과 부패의 사슬, 우크라이나의 뿌리 깊은 과두 정치

우크라이나의 뿌리 깊은 과두제는 빈곤과 부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소수의 인물과 집단이 정치와 경제 권력을 장악하며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 및 토지 시장의 독과점은 우크라이나 과두제의 한 단면이다. 곡물 시장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기업가이자 과두 정치인은 올레그 바흐마티크(Oleg Bakhmatyuk)다. 유라시아의 최대 농기업인 우클랜드파밍(Ukrlandfarming)을 소유한 억만장자다. 농업재벌인 그는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이바노-프랑키프스크(Ivano-Frankivsk)의 시의원을 역임하며 정치권력을 확대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국영 증권 회사인 나프토가즈(Naftogaz)의 고문 및 이사회 부의장을 역임하고, 은행을 소유했으며, 가스 산업에도 관여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가스 협상에 참여했다. 이후 수십억 달러의 빚을 진 그는 횡령 혐의로 국가 수배 명단에 올랐다.

우크라이나 농산물 시장 재계 서열 2위는 커널(Kernel)사다. 농지 60만 헥타르를 소유한 동유럽 최대 농업 기업 중 하나다. 커널의 오너는 억만장자인 안드리 베레프스키(Andriy Verevskyi)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4선 국회 의원으로, 국회 농업 및 토지정책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친서방 우파 정당인 전 우크라이나 연합 조국(Batkivshchyna)의 당원이었지만 2010년 친러 정권이 들어서자 친러시아 정당인 지역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국회 농업 및 토지정책위원회를 이끈 인물은 대규모 작물 및 원유 생산업체인 UAH(Ukrainian Agrarian Holding)의 설립자 마이콜라 솔스키(Mykola Solsky)다. 그는 지난 3월 24일, 우크라이나 농업정책 및 식품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재벌이 직접 대통령으로 선출되기도 한다. 2014년 반정부 시위로 친러 성향의 빅코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대통령이 탄핵된 후, 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인물은 우크라이나 재벌 7순위인 백만장자 사업가 페트로 포로셴코(Petro Poroshenko)였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제과 생산업체인 로셴(Roshen)을 소유한 기업가로, 자동차, 조선소, 텔레비전 채널 등의 기업을 거느렸다.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에는 국회의원과 외교부 장관, 경제발전통상부 장관, 우크라이나 국립은행 총재를 지냈다.

친서방 정책을 내세웠던 포로셴코는 대통령 임기 동안 러시아 무기를 밀수해 우크라이나 방산업체에 고가로 팔아넘긴 혐의를 받았다. 퇴임 후에도 측근들의 거액 탈세 사건에 연루됐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2013~2014년 돈바스 전쟁 기간 동안 분리주의 세력의 석탄 판매를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반역 혐의로 기소된 그는 도망치듯 폴란드로 떠났다. 그동안 수사당국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던 그는, 최근 슬그머니 우크라이나로 돌아와 “러시아와 맞서겠다”라며 소총을 든 모습을 공개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출처: hyser.com.ua]

2014년 탄핵된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주요 파트너도 억만장자 기업가인 드미트로 피르타쉬(Dmytro Firtash)였다. 피르타쉬는 러시아에서 가스를 구입해 우크라이나 등에 판매하는 가스 무역상으로 부와 명성을 쌓았다. 그는 야누코비치 재임 기간 동안, 러시아의 국영 다국적 에너지 기업인 가스프롬(Gazprom)으로부터 싼 가격으로 가스를 사들여, 비싼 가격으로 우크라이나와 유럽 등에 되팔았다. 여기서 발생한 수익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대통령 및 과두 정치인의 검은 돈이 됐다.

뿐만 아니라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인 리나트 아크메토프(Rinat Akhmetov)의 에너지 기업에 전력 수출 독점권을 넘겨줬다. 피르타쉬와 아크메토프 모두 야누코비치 정권 하에서 지역 전력 공급업체 민영화 사업을 수주받았다. 심지어 야누코비치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아들인 올랙산드로 야누코비치 (Oleksandr Yanukovych)는 우크라이나의 재벌 반열에 올랐다. 야누코비치는 재임 기간 중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우크라이나 국가 자산 400억 달러를 빼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탄핵된 후 가족들과 러시아로 피신했다.

우크라이나의 국가 권력 기관은 점차 자본가 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의회(Verkhovna Rada)에 진출한 자본가 비율은 1994년 20%2에서 1998년 38%, 2002년 46%, 2006년 67%3로 늘었다. 2016년에는 국회의원의 42%4가 가족 관계를 통한 직간접적인 자본가였다. 이로써 국가 권력은 우크라이나 자본가 계급의 독점 시장과 이익을 보존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누가 우크라이나를 빈곤과 부패로 몰아넣었나

우크라이나 사회를 연구해온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셴코는 지난 2019년 《자코뱅》과의 인터뷰에서 “2013년 다수의 우크라이나인을 거리로 내몰았던 불만 중에는 본질적으로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었다”라고 분석했다. 친서방 시위대인 ‘유로마이단’ 내부에서도 가장 큰 관심사가 ‘부패 퇴치’였다는 것이다. 그는 생활 수준의 향상과 정상적인 삶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진보적 의제로 구체화하지 못한 채 ‘유럽 연합’과 연결된 것이라고 봤다. 부패한 권위주의 정치인을 향한 대중봉기가, 결국 과두 정치의 도구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어져 온 것이다.

[출처: commons]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서구와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내정 간섭 속에서 진정한 독립을 실현하지 못했다. 독립 이후 자본주의 경제로의 점진적 전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자산들은 소수 과두제 집권층의 사유재산으로 흘러들어 갔다.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우추크(Leonid Kravchuk)가 이끌었던 구 공산주의 엘리트는 새로운 자본주의 엘리트의 정착을 위해 느린 개혁을 선호했다.5 이로서 구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공산체제의 몰락 속에서 기업과 권력에 대한 새로운 지배력을 찾아냈고, 다당제의 정치 구조 속에서 두 번째 권력화를 이뤄냈다.

한편에선 미국 주도의 국제통화기구(IMF) 등이 체제 전환 국가들을 상대로 신자유주의 개혁 개방을 압박했다. 1991년 IMF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구소련 국가들에 IMF 특별그룹을 파견했고, 이듬해 구소련 14개 공화국의 IMF 회원 가입을 승인했다. 1993년에는 우크라이나 의회가 IMF와 세계은행의 자문을 거친 시장경제 계획안을 채택했다. 당시 의회에 구 공산주의 세력이 상당수 포진해 있음에도, 해당 계획안은 찬성 283표, 반대 21표로 승인됐다.6 그리고 다음 해, 우크라이나는 IMF의 차관 도입을 위한 ‘경제정책 및 전략에 관한 각서’에 서명했다. 여기에는 대외 무역 시스템의 자유화, 환율 및 가격 정책의 자유화, 보조금 축소, 공공부문 민영화, 기업 구조조정, 규제 완화 등의 요구 사항이 담겨 있었다.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이 본격화된 건 2004년 ‘오렌지 혁명’으로 친서구 성향의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 정권이 들어서면서다. 유셴코 정권은 유럽의 투자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연간 외국인 직접 투자는 2004년 17억 달러에서 2007년 92억 달러로 급증했다. 많은 외국 은행들이 우크라이나에 자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외국 자본의 우크라이나 은행 인수도 늘었다. 우크라이나 은행의 외국 자본 비율도 2004년 13%에서 2008년 50%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이 중 30%는 6개 EU 회원국의 은행이 소유한 것이었다. 공공부문도 빠르게 민영화됐다. 2004년에서 2005년까지 무려 2,000여 개의 국영기업들이 민간기업과 외국 자본에 매각됐다.

대대적인 금융시장 개방은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경제 공황 상태에 빠진 우크라이나는 그해 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신청했다. 구제금융의 조건은 임금 및 사회보장비 동결과 국내 가정용 가스 가격 인상 등 국민 생활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를 위한 ‘좌파 정치’

친서구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파탄 나면서, 2010년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경제적 관계 회복과 보호주의적 정책에도 금융 위기와 정국의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 IMF가 연금개혁과 공무원 30% 감축 등을 권고하면서 실업률도 높아졌다.7 우크라이나의 실업률은 2007년 6.9%에서 2009년 9.6%, 2010년 8.8%로 늘었고, 2014년부터 줄곧 9%대를 유지하다가 2021년 10.3%를 기록했다.

국가 부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야누코비치 정권이 4년간 IMF와 중국, 러시아 등에서 차입한 국가 부채는 약 400억 달러에 달했다. 2007년 176억 달러(GDP의 12%)였던 공공부채는 2013년 728억 달러(GDP의 40%)로, 2014년에는 919억 달러(GDP의 70%)로 급속히 증가했다. 2020년 우크라이나의 국가부채는 946억 달러로, GDP의 60%에 달한다.

[출처: commons]

부채의 증가는 서구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좋은 빌미였다. IMF는 국가 신용도를 빌미로 공공부문의 민영화와 보조금 폐지 등을 강요했다. 경제학자이자 우크라이나 좌파 매체 《커먼즈》의 편집자 알렉산더 크라브추크(Alexander Kravchuk)는 《자코뱅》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서는 2014년 이후 IMF의 압력으로 가스 가격이 10배나 인상됐다”라며 “IMF로부터의 대출은 복지국가의 잔재마저 축소하는 조건으로 발행됐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공공부채 상환은 국가 예산의 가장 큰 지출 항목 중 하나를 차지하게 됐다. 2021년 우크라이나 총 국가 예산 중 공공부채 상환 비율은 8.5%에 달한다.

러시아 또한 2010년 우크라이나에 저렴한 가스 공급을 조건으로 세바스토폴 등의 러시아 흑해 함대 주둔 기간을 2042년까지 연장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최대 교역국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는 에너지의 60% 이상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었다.8사실 우크라이나 소수 권력에게 막강한 자본력을 쥐어준 쪽은 러시아였다. 우크라이나의 재벌이자 정치인인 이호르 바카이(Igor Bakai)는 ‘우크라이나의 모든 자본은 러시아의 가스와 석유 덕분에 축적됐다’라고 말했다.9 우크라이나의 과두 정치인과 기업가가 러시아 가스・석유 운송을 중개하는 회사를 설립해 천문학적인 자본을 축적해왔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러시아는 2000년대부터 유라시아 지역에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회복해나갔다. 구소련 국가를 중심으로 경제적 유대를 재건 하고, 국가 지도자를 육성했다. 도이치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2006년 BRIC(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국가 중 가장 큰 국제 투자자가 됐다. 특히 러시아의 민간자본은 우크라이나 등 CIS(독립국가연합, 소련 연방의 일원이던 독립국들)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25개 주요 러시아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해외 직접투자(FDI) 중 52%는 서유럽에, 22%는 CIS에, 11%는 동유럽에서 이뤄졌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러시아의 전략적 행보가 20세기 미국의 제국주의 모델과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서구의 투자로 포화상태에 이르렀지만, 경제는 다양화・현대화되지 못한 채 경제 식민지 상태에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서구는 우크라이나의 정치 세력을 지원하며 극심한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미국이 2004년 오렌지 혁명과 2014년 반정부 시위를 지원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재벌 드미트로 피르타쉬 등을 통해 친러 정치인들을 지원했다. 우크라이나의 시민사회도 이들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내부 정치 노선을 ‘서구 또는 러시아’로 단순화시켰고, 서구와 러시아 너머의 대안적 체제를 얘기하는 목소리를 지웠다. 우크라이나에서 ‘좌파’는 ‘친러시아’ 성향의 무능하고 억압적인 세력이었고, 실제로 이들은 또 다른 지배계급으로 존재했다. 그 과정에서 신좌파적 의제들은 서구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흡수됐다. 급진적 사회 요구 또한 금기시됐다.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셴코는 “이제 공산주의의 상징은 금지됐고, 형사 기소의 근거가 될 수 있다”라며 “실제로 페이스북에 소비에트 시대의 슬로건을 썼다는 이유로 2년의 집행유예를 받는 사례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때문에 우크라이나 안팎에서는 기존의 과두제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좌파 정치와 대안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볼로디미르 이셴코는 “우크라이나 정치에는 좌파 대표가 없다. 좌파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은 국가가 미래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며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위해 좌파 정치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좌파 정치가 없다면 우크라이나는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와 함께 우크라이나 사회 운동 내에서는 서구 등 해외 좌파들이 현 사태를 서방과 러시아의 패권 다툼으로만 바라보는 걸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국민의 정치적 주체성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지워진다는 것이다. 2016년 우크라이나 노동자 등이 결성한 새로운 좌파 정당 ‘Sotsialnyi Rukh(사회 운동)’는 지난 3월 15일, 전 세계 좌파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본가의 자산을 몰수해야 한다며 “우크라이나가 진정으로 민주화될 수 있도록 좌파를 지지해 달라.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자유롭고 사회주의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라고 밝혔다.

<참고자료>

1 Commons: Journal of Social Critique, Бедность, неравенство, миграция. Социальные последствия рыночных реформ в Украине, 2021.10.27.
2 Jacobin, To Help Ukraine, Cancel Its Foreign Debt, Alexander Kravchuk, 2022.3.8.
3 Commons: Journal of Social Critique, Эпидемия бедности: ЕС и Украина в борьбе с коронавирусом, Колектив «Центру економічної справедливості», 2020.4.5.
4 Commons: Journal of Social Critique, Земельна реформа: чому «ринок» не вирішить старих проблем, але створить нові, 2020.3.3.
5 〈참세상〉,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는 올바른 시각, 정재원, 2015.9.1
6 Commons: Journal of Social Critique, К вопросу о специфике украинской национальной буржуазии, 2020.5.6
7 Reuters, Special Report: Putin's allies channeled billions to Ukraine oligarch, 2014.11.26
8 Commons: Journal of Social Critique, Причини української кризи, Бойцун Марко, 2016.3.15
9 Jacobin, Ukraine on the Brink, 2019.1.27.
10 New Politics, “The Left in the West Must Rethink”, 2022.3.11


<각주>

1 2020년 4월 30일, 농업용 토지의 매매를 허용하는 ‘토지개혁법’이 공포돼 2021년 7월 1일 시행됐다. 해당 법안은 우크라이나 국민 개인 및 법인의 농업용 토지 매매를 허용하는 것으로, 1인당 최대 100헥타르까지 매매가 가능하다. 다만 외국인의 농지 매매는 여전히 금지하고 있다.
2 Åslund, A, 2009, How Ukraine became a market economy and democracy.
Peter G.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3 Мацієвський, Ю. В, 2010, «Еліти в Україні до і після "помаранчевої революції"». В: Політичний менеджмент,2
4 Корнилюк Р. и команда YouControl, 2016, «Большинство бизнесов народных депутатов сосредоточены в торговле
5 Havrylyshyn, O., 2017. The Political Economy of Independent Ukraine: Slow Starts, False Starts, and a Last Chance? London: Palgrave MacMillan.
6 조선일보, ‘우크라 시장경제 채택’, 1993.2.4
7 Havrylyshyn, O., 2017. The Political Economy of Independent Ukraine: Slow Starts, False Starts, and a Last Chance? London: Palgrave MacMillan.
8 2011년 당시 우크라이나 대외교역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수출 18.0%, 수입 40.7%에 달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원자력 원료 100%와 천연가스 70%, 원유 70% 등 총 에너지의 60% 이상을 러시아로부터 수입했다. (출처: 외교통상부 유럽국 중유럽과)
9 Havrylyshyn, O., 2017. The Political Economy of Independent Ukraine: Slow Starts, False Starts, and a Last Chance? London: Palgrave MacMil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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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셴코는 “이제 공산주의의 상징은 금지됐고, 형사 기소의 근거가 될 수 있다”라며 “실제로 페이스북에 소비에트 시대의 슬로건을 썼다는 이유로 2년의 집행유예를 받는 사례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때문에 우크라이나 안팎에서는 기존의 과두제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좌파 정치와 대안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볼로디미르 이셴코는 “우크라이나 정치에는 좌파 대표가 없다. 좌파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은 국가가 미래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며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위해 좌파 정치를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좌파 정치가 없다면 우크라이나는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