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

[INTERNATIONAL1]파리 ‘이민자의 대사관’, 소수자의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점거운동②

2022년 4월, 프랑스에 거주하는 약 80여 명의 이민자가 라 샤팰 드부 그룹(Collectif La Chapelle Debout)1 의 활동가들과 함께 비어있던 파리 중심가의 한 건물을 점거한 지 한 달여가 지나고 있다. 1차 대선 투표 직후에 시작된 점거는 2차 투표를 지나 국회의원 선거 1차 투표 하루 뒤인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사관 앞 [출처: 김지영]

이민자들을 구별·차별·위계화하는 국가 장치들

프랑스에선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망명 신청을 통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비율이 80%에 달했다. 68반전운동, 냉전 시기의 한복판에 선 프랑스가 제국주의 유산을 상쇄하고 공산주의 정권의 확산을 막기 위한 외교 정책의 일환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유엔과 협력해 인도차이나 구 식민지(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로부터 약 20만 명의 난민 신청을 받아들였다. 1970년대 이들의 난민 승인율은 95%에 달했다. 반면 당시에도 버마에서 박해당해 방글라데시로 이주한 무슬림 소수민족 로잉야 난민 20만 명의 망명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은 버마로 강제 송환됐다. 또한 신-식민주의 ‘프랑스 아프릭(Fran afrique)’ 정책을 구상 중이던 1970년대, 당시 퐁피두 정권은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자이로의 군부 독재자 모부투의 압력에 자이로인의 망명 신청을 거절했다.

오늘날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서사-자국에서 박해받았음을 증명하는 온갖 서류와 증거들-를 구성하는 것은 물론, 이에 따른 온갖 관료주의적 절차에 순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 당시의 ‘망명 신청’은 특별히 더 정치적이거나 덜 정치적인 이주방식이 아니라, 단지 타국에 정착하기 위해 최소한의 법적 지위를 확보해야 했던 (노동자, 학생, 가족 결합 등) 이민자들에게 주어진 여러 가능성 중 한 가지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오늘날 프랑스의 이민정책은 돈을 버는 게 목적이라고 간주하는 ‘경제적 이민자’, 자국에서의 박해를 피해서 온 ‘정치적 망명자’, ‘유학생’, ‘미등록 미성년자’ 등 이민자를 인위적·제도적으로 구별하고 위계를 지으며 이에 따른 차별을 일반화한다.

더블린 협약과 경찰국가가 돼가는 유럽

이주가 인권과 평등의 차원이 아닌 국가 차원의 ‘이동 흐름(flux migratoire)’ 통제의 문제로 환원되면서, 1990년 비준된 ‘더블린 협약’ 적용이 이민자 통제·억압의 주요한 수단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더블린 협약은 비유럽 국가 구성원이 유럽연합국가에서 망명 신청을 하고자 할 경우 최초로 입국한 국가에서만 망명 절차를 밟을 수 있다고 규정한다. 가령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 대다수는 그리스 및 헝가리 같은 동유럽 국가 혹은 이탈리아를 통해 독일이나 프랑스에 입국한다. 원칙적으로 이들은 프랑스에서 망명 절차를 밟을 수 없으며 해당 경시청은 이들을 최초 입국 유럽 연합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강제 지문 채취 등의 인권 침해가 일반화되는 건 물론이다. 이를 위반할 경우 ‘도주 중’으로 간주해 18개월간 망명 신청조차 할 수 없다.

이는 이민자의 경제적, 심리적 상태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실질적인 강제추방율은 12%를 넘지 못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제도라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이들을 관리·통제하기 위해 프랑스가 ‘난민 및 무국적자 보호국’, ‘이민과 통합관리국’, 망명 신청이 거절된 경우 재판을 통해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망명권 법원’과 같은 정부 기관들을 통해 지출하는 행정력과 인력을 고려하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비-유럽인’에 대한 이민정책을 통해 경찰국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이 기관에 종사하는 공무원조차 이들의 정책이 사실상 담당 공무원의 재량권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런 정책은 어느 순간엔 시리아인이, 또 어느 순간엔 아프가니스탄인이 ‘진짜 난민’으로 ‘우대’ 받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제로 올해 3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인의 망명이 시작되면서, 유럽 국가의 이민 정책이 인종차별 정책이라는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우크라이나에 정착해 살고 있었지만, 국적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아프리카일 경우 피난 및 망명 과정에서도 차별적인 대우가 빈번했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2020년 7월 유럽 인권 법원은 프랑스 정부가 망명 신청자를 몇 달이고 거리에 방치한 혐의를 들어 이란인, 러시아인, 아프가니스탄인 원고에게 각각 1만~1만 2천 유로를 지급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2

파리 중심가에 세워진 이민자들의 대사관
(L’Ambassade des immigrés)


올해 4월, 2015년 소위 ‘유럽의 이민자 환대 위기’3를 기점으로 활동을 시작한 라 샤팰 드부 그룹의 활동가가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2017년에 처음 이 그룹을 알게 돼 가끔 이들이 조직하는 시위에 갔지만4, 준비 과정에 참여한 건 처음이었다. 활동가들은 파리 중심가에 수년 전부터 비어 있는 건물 점거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사전에 정보가 새 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해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출처: 김지영]

행동 당일, 한 노조 사무실에 80여 명의 이민자와 수십 명의 지지자가 모여들었다. 활동가들이 틈날 때마다 거리에서 만나 대화하면서 알게 된 이민자들과 그들의 지인들이었다. 모두 아프리카에서 온 남성들로 북수단, 남수단, 소말리아, 이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차드, 지부티 등 국적도 사용하는 언어도 천차만별인 이들이 국가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혹시 행동이 성공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모두가 모인 후에야 점거 장소의 주소가 공개됐다. 이곳에서 성공하지 못할 경우 갈 수 있는 곳 또한 준비돼 있으니, 실패하면 경찰과 직접적인 마찰을 최소화하면서 모두가 건물에서 나올 수 있도록 협상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경찰에 구류될 경우를 대비해 연락해 놓은 변호사들의 이름을 외우고, 경찰 심문에 대답해야 할 경우 묵비권을 행사하라는 지침을 되새겼다. 그리고 오후 3시,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폴리베르제르 극장 바로 옆인 파리 9구 17 솔니에르가 건물에 진입했다.

200여 명의 사람들이 좁은 골목길을 순식간에 통과해 비어있던 건물에 들어갔으니 주민들이 놀랐을 법도 하다. 모두가 합류한 지 2~3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경찰차가 건물 앞에 들어섰다. 일부 참여자들은 2, 3층 창가에 서서 건물 안에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고자 했고, 일부는 수년간 비어 있어 먼지로 뒤덮인 공간을 청소하느라 열심이었다. 다른 누군가는 ‘이민자의 대사관: 이민자의 삶은 중요하다’라고 프랑스어, 영어, 아랍어로 쓰인 플래카드를 건물 3층 벽에 내걸었다. 목표는 일부 예술가들이 이 공간을 사실상 48시간 넘게 점거 중이었고, 그들이 라 샤펠 드부 그룹과 협력해 이민자를 맞이하기로 했다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건물의 소유자가 경찰 개입을 통해 점거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해 추방하려면 이들이 건물에서 살기 시작한 지 48시간 안에 신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재판을 통해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점거자들은 적어도 그 시간을 벌면서 다른 전략을 도모할 수 있다.

경찰에게 상황을 전달하는 사이 주말 동안 근처에 텐트를 설치하고 집회 중이던 생태주의 활동가들이 트위터를 통해 소식을 듣고 ‘이민자의 대사관’으로 모여들었다. 한고비는 겨우 넘겼지만 언제 또 경찰들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트위터를 통해 점거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연대하는 사람들의 방문과 기부가 시작됐다. 일부 참가자들은 동네를 돌면서 상인들에게 점거 사실을 알리며 협력을 요청했고, 누군가는 앞으로 생활하게 될 이 공간들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스쾃개방에 익숙한 활동가 그룹은5 수돗물과 전기 공급을 재개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 이 건물은 프랑스 은행 소시에떼 제네랄 소유로 미국 보험 기업이 계약을 해지한 후 몇 년째 비어있었다.

폭풍과도 같았던 첫날, 여러 갈등도 표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파리 경시청은 몇 년 전부터 파리 시내에 텐트 설치는 물론 5인 이상 집결을 금지시켰다. 비영리 단체들이 지급한 텐트에서 잠을 자고 있으면, 새벽이 올 즈음 경찰이 텐트를 면도칼로 찢어버리고 최루가스를 발포하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을 몇 달씩 견뎌야 했던 80여 명의 방을 배정하고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을 만드는 등 해야 할 일이 넘쳤다. 또한 점거 소식을 듣고 수십 명의 또 다른 이민자들이 찾아왔지만, 자리가 없어서 돌려보내야 했다. 지난 몇 년간 점거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수천 명은 족히 될 이민자를 무조건 받아들일 경우 점거 운동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건물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거주자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 찾아온 여성 이민자도 있었지만, 미성년자가 스쾃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경찰 개입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작용할 수 있기에 이들에게 일시적으로나마 거처를 제공할 수 있는 다른 방식도 찾아야 했다. 이 ‘대사관’ 참가자가 전부 남성인 이유는 열악한 임시 거처조차 정부 기관을 통해 제공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5월 1일 시위 [출처: https://www.facebook.com/photo/?fbid=371398191695812&set=ecnf.100064769016962]

한 달이 지나면서 건물 1층은 ‘대사관’의 거주자들과 라 샤펠 드부 그룹 활동가 및 지지자들이 앞으로의 행로를 함께 모색하는 회의실이 됐다.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오락의 공간으로도 자리 잡았다. 미국 보험회사가 세입자일 때 안내 데스크로 사용되던 공간은 임시 주방으로 변모했다. 점거 당일에는 없던 샤워 시설도 설치됐다. 혹시 모를 극우파나 예기치 않은 경찰 개입에 대비해 종일 입구를 통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처음엔 주로 지지자들이 담당하던 일이지만 이제는 거주자들도 동참한다. 동네 거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건물을 파손하거나 야간에 큰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기, 연대할 의지를 보이는 주민을 만나면 설득하기, 이민 정책에 비판적인 국회의원에게 연락해 그들의 지지를 요청하기, 100명 가까이 되는 이민자들의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비영리 단체와 협력하기, 전기 기술자와 배관공 찾기, 진짜 주방을 설치하기 위해 연대하고자 하는 건축가, 대학생들과의 연대를 도모하는 일, 변호사와 연락해 재판을 준비하는 일, 여전히 거리에 방치된 이민자들과 기부 물품을 나누는 일 등, ‘이민자의 대사관’에서 거주자, 활동가, 지지자들 모두 함께한다.

이런 일상을 조직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사실 따로 있다. 이민자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공유하면서도 이 공간이 단지 국가 기관에서 운영하는 ‘긴급 수용소’처럼 되지 않도록, 국가의 지원을 받는 일부 시민단체가 이민자들을 시혜적인 도움의 수용자로 대상화하는 결과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대사관의 거주자와 지지자가 모두 함께 공동의 목소리를 구축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2~30대 프랑스 청년, 2000년대 초에 이주한 이란인, 부모 혹은 조부모 세대가 모로코, 알제리, 이란, 우크라이나 이민자였던 활동가와 거리에서 노숙은 하지 않지만 미등록 이주 노동자인 모로코인, 모리타니아인 이주 노동자들을 비롯한 지지자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대사관에 모여 거주자들과 대화하고 회의에 참석한다. 그 이유는 ‘이민자의 대사관’ 거주자들이 단지 프랑스 국가 기관에 ‘보호’를 요청하고 ‘피보호자’ 위치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존재하는 보호 대상이 아니라, 국적과 성별 혹은 성적 지향을 떠나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정치적 주체라는 점을 천명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이민국에 건강에 문제가 있어 프랑스 사회보장제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적시하면 임시 숙소 혹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점수가 올라간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에게 ‘인권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의 이민 정책이 사실상 이민자의 위치를 극단적으로 타자화하며 지배-피지배 관계를 구체화하고 강화하는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프랑스 식민주의 체제 아래 알제리에서 태어나 피에르 부르디외와 함께 알제리 사회 및 이민에 대해 연구한 사회학자 압델말렉 사야드(1933~1998)는 프랑스가 이민자에게 세 가지를 요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 프랑스 사회(즉 백인)에 대한 예의, 비정치성, 비가시성.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아닌 프랑스의 정책을 비판하고 당당히 인간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과연 프랑스 사회에 들릴 수 있을까?

지난 5월 11일, 프랑스 북부의 파-드-칼레에서 한 이민자가 트럭 뒤편에 목을 매달아 숨진 채 발견됐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다, ‘이민자의 대사관’ 거주자들도 경시청과 이민국의 부당한 처사에 좌절해 실어증에 걸리거나 정신적 불안 증세를 보이는 친구들을 알고 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유럽 땅을 밟은 이후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이 지나도록 노숙하고, 비슷한 처지의 동향인을 만날 수 있던 캠프도 경시청령으로 철수되고, 경찰 심문으로 적발돼 임시 수용소에 갇히면 누구도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민자와 지지자들은 모두가 ‘미치도록 하는’ 것이 프랑스 정부의 목적인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5월 20일, 대사관 거주자들은 마크롱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각자의 국적과 독재자들의 이름은 다 다르지만, 우리 모두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본국에서 살 수가 없었기에 투옥과 죽음을 피하고자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에 왔다. 친구들이 그야말로 미쳐가고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자살하는 걸 보면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이 건물을 점거하기로 했다. 체류증, 더블린 협약 파기, 노동허가증과 거주지 배정을 요구한다”고 썼다.

보려고 애써야만 보이고, 들으려고 애써야만 들리는 현실. ‘아프리카의 북한’으로 불리는 에리트레의 민족인 티그리니아어와 오로모어가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어플리케이션 와츠앱에 공식적으로 승인된 2022년 5월. 이 작은 변화(?)에 대한 기쁨도 잠시, 5월 22일 새벽 3시경, 극우 활동가들이 대사관 침입을 시도했다. 다행히 부상자 없이 마무리됐지만, 6월 9일 첫 번째 재판을 앞둔 거주자들과 활동가들의 마음은 더 바빠졌다. ‘자유, 평화, 정의’를 아랍어로, ‘빵, 일자리, 자유’를 다리어6로,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원한다’는 구호를 파슈토어7로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함께 외쳐본다. 인권이 모두가 보편적으로 누려야 하는 권리라면, 그 보편성은 다른 누구보다도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서 ‘법적으로’도 배제당할 수밖에 없는 소수자의 자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게 아닐까?


<각주>

1 라 샤펠 드부 그룹(Collectif La Chapelle Debout)은 소위 지자체나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으며 그 때문에 명칭에 association 이나 organisation이 아닌 collectif를 사용한다. 2015년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에서 이민자 환대의 위기(crise de l'hospitalité en Europe)가 심화하고 파리에서도 상대적으로 서민층들이 주로 거주하는 18, 19구 근처의 라 샤펠 전철역 근방에 이민자들의 임시 캠프가 설치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민자와 이주노동자 및 그들의 2세들이 처한 상황에 도움을 주고자 활동하는 소위 비영리 단체들은 프랑스에 넘치도록 많은데, 라 샤펠 드부 그룹은 이들 단체가 대개 도움을 주는 주체와 받는 대상을 구별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을 비판하면서, 이민자들을 ‘위해서’가 아닌 그들과 ‘함께’하는 이민자 운동을 표방한다.

2 https://www.francetvinfo.fr/monde/europe/demandeurs-d-asile-la-france-condamnee-par-la-cedh-pour-des-conditions-inhumaines-d-existence_4031459.html

3 2015년을 기점으로 가시화된 유럽의 ‘이민자 위기(crise migratoire)’라는 표현은 이주는 인류 역사상 늘 있어왔던 현상이라는 사실과 이들 이주의 근본적인 원인과 이 현상에 대한 유럽 연합 이민 정책의 실패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유럽의 이민자 환대 위기(Crise d'hospitalité des migrants en Europe)’보다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다.

4 2015년을 기점으로 파리에서는 이들 이주자의 상황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CSP75(파리 미등록 이주자 연대), NPA(반자본주의 신당 이주 위원회), Paris Exil 등 많은 단체가 활동해왔다. 라 샤펠 드부 그룹은 2015년 폐쇄돼 있던 장 조레스 고등학교, 장 꺄레 고등학교 및 2018년 파리 북부 생-드니에 있는 파리 8대학 점거에도 참여했다. 한편 2017년 강제 추방 반대 행동(추방 예정인 이민자가 탄 비행기 탑승구에 가서 승객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을 설득해 강제 추방을 방해하는 것), 이러한 정책에 협력하는 대기업 에어프랑스를 규탄하는 2019년 샤를 드골 공항 점거, 미등록 이주자들의 노동권을 준수하지 않는 초국적 기업 엘리오르 라 데팡스 본사 점거, 파리의 지성들이 모여 있다는 라틴 지구의 팡테옹 일시 점거를 조직했다. 또한 이민자들이 모여드는 곳에 가서 각종 행정 처리 업무를 보조하며 경찰에게 잡혀갈 경우 대응 방식 등을 번역해 제공하는 활동도 함께한다.

5 이들은 흔히 ‘ouvreurs’라고 불리는데, 번역하자면 ‘(스쾃을) 여는 사람’이다. 실제로 이렇게 스쾃을 열어 점거하고 생활하다 경찰 진압으로 폐쇄당하는 경우 다른 스쾃을 열거나, 다른 스쾃으로 이동해 생활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다.

6 페르시아어군의 다양한 형태 중 한 언어. 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용한다.

7 인도-유럽어군 중에서도 인도-이란어의 한 형태로 아프가니스탄 남부, 파키스탄 일부 및 약 4천5백만 명이 사용하는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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