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관망합니까?

[사파시평] “자본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강변하는 엘리트의 문답 놀이를 집어치우라 합시다”

왜 우리는 관망합니까? 평론가들만 넘칩니까? 몇 년에 한 번씩, 투표라는 실천을 하고서 그 결과를 두고 선거 직후에는 온갖 설들이 난무하고, 다음 투표 때까지는 분석하고 설전하고 원망하고 책망하고 자책합니까? 투표 말고 다른 실천, 다른 행동을 해야만 선거의 결과도 바뀌는 것 아닌가요? 말만 번드르르한 ‘일상의 실천’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여기에 답 하나를 내보려고 합니다.

거제도 옥포만에서 이제 51일째 파업 중인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들만의 이익을 위한 파업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비정규노동이 가장 천대받으며 노동집약적으로 배를 만드는 조선소 파업입니다. 아무리 비정규노동이 공장 내 생산 노동자의 다수가 돼도 그들 다수를 천대하는 다단계 하청구조로 그들의 노동력을 후려칩니다. 필요하면 더 쓰고, 필요 없으면 더 많이 자릅니다. 정규직과의 임금 차이가 절반에 육박합니다. 기본급이 아닌 상여금으로 요술을 부리는데 정규직은 모른 체 묵인합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절대임금 많이 받으면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사용하는 현장의 연장과 공구도 다릅니다. 연차 10년, 15년 된 숙련 조선노동자의 임금이 최저임금 수준입니다.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과 없는 사업장으로 임금이 차별적이라면서 노조가 임금 인상의 주범인양 몰아가는 자본의 논리는 비정규직은 아예 조사대상에서 뺀 결과입니다.

[출처: 전국금속노동조합]

이것이 1997년 이후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 자리 잡은 ‘비정규노동’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도 아니고, 세대의 문제도 아닙니다. 남녀의 문제도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비정규노동을 만들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비정규노동은 가장 완벽하게 “교과서적으로” 실현됐습니다(이 표현은 저의 박사논문(2008년 컬럼비아 대학교)의 표현이고, 당시 미국의 교수 연구자들이 동의한 표현입니다).

노동을 갈라치고, 소수 노동자들에게 정규직 타이틀을 주고, 노동과 노동의 갈등 속에서 자본의 이익을 가장 완벽하고 안전하게 구사해왔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회 노동자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은 이제 상시화됐습니다. 이들은 ‘불안정’, ‘일시적’ 노동자군이 아닙니다. 이 말은, 정규직 대 비정규직의 구별은 결국 능력과 세대, 젠더의 문제도 아니고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 탓도 아니며, 결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누구는 정규직으로 누구는 비정규직으로 삽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의 이익만을 전일적으로 완벽하고 안전하게 구사하는 곳으로 대한민국만 한 국가사회(national society)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이 나라의 정치는, 그리고 이 사회는 조금이라도 자본을 ‘불안정 자본’으로 만들었습니까? ‘불안한 자본’으로 만들었습니까? 현실은 전혀 그러지 못했습니다. 특히 1987년 이행 이후 민주주의 정치는 자본의 공화국을 변혁하고 바꾸기는커녕 더욱 공고화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이 사회는 자본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착각하고, 자본의 이익을 ‘국민의 이익’이라고 여기고, 자본의 이익을 제3의 ‘공익’이라고 여겼습니다. 전문가들, 연구자들은 그런 착각과 허위의식을 만드는 이데올로그였고 나팔수였습니다. 최근 최저임금 책정과정에도 등장한 ‘공익’이라는 가치관이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정치와 국가 역시 자본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으로 삼았습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대우조선해양의 파업을 두고 “전체 국민을 위해서”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접으라고 말했습니다. 단지 일개 조선소에서, 그것도 한줌거리도 안된다고 자부했을 비정규 노동자들의 파업을 두고 전체 국민과 국가 경제를 말하다니. 언제 그렇게 비정규 노동자들의 힘을 인정했다고 이런 말들을 하는 건지.

이렇게 자본의 입장을 국민의 이익으로 전일화 해버리는 담론 속에서 과연 노동자들은 파업을 시도해볼 수 있을까요? 그건 대통령 스스로 헌법상 노동자의 시민적 권리를 깡그리 부정하는 언사를 감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집단적 위력’의 행사로 만들어낸 노사 간 교섭이 진행 중인 마당에 폭력적인 협박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잘못은 이 사회에 있습니다. 자본이 저들만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강변하고, 제도권 정치세력이 우익이든 자유주의 세력이든 정권만 잡으면 국민경제를 위해서 노동의 희생을 강요하고 노동권의 전면적인 보장을 유예하며 공익과 자본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흐름을 더욱 강조하고 공고화할 때 이 사회는 무엇을 했습니까? 자본과 제도, 정책의 바탕은 사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적인 것들(the social)’입니다.

사회 안에서 ‘국익’은 없습니다. 사회는 사회적인 구성물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인 것들이 충돌하고, 그 속에서 사회적인 힘들이 서로 길항하고, 그 속에서 사회적인 이해관계가 넘실대고 서로 동맹을 맺기도 하고 혹은 적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 대한민국이란 사회는 이렇게 단원적, 아니 일원적, 아니 전체주의적일까요? 노동에 대해서만 유독 그렇습니다.

소수자들은 어려운 투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서고 있습니다. 노동은 조직노동이라는 이익단체로 제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사회적인 노동은 더욱 갈지자이고 갈기갈기 찢어져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조직노동’이 힘을 얻을수록 ‘사회적인 노동’은 모호해지고, 노동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더욱 전체주의적이고 단원적으로 굳어집니다. 노동 자체에 대한 이 사회의 시각은 오히려 후퇴중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단결하지 못하는 노동계급은, 아무리 조직해도 이익단체로 취급받습니다. 부문의 이익, 정규직의 이익을 넘어서지 못하는 노동조합운동은 기득권으로 취급받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 안에서 노동은 존중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사회가 어떤 사회입니까? 이 사회가 ‘한국사회’입니까? 한국은 국가입니다. 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가지 기본계급으로 구성돼 노자관계를 사회적 생산관계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결국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이들은 자본이거나 노동자입니다. 중간계급들도 결국 자본과 노동의 사회적 생산관계 스펙트럼 위의 중간자적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자본주의 사회의 압도적 다수는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노동계급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회마저, 다양한 이 사회적인 집단들마저, 사회 안의 다수 세력인 노동자들마저, 자신의 이익을 정확히 계량하거나 산정하지 못할까요? 그래서 자신의 이익을 자본의 이익과 동일시하거나, 자본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말하는 허위의식에 절어있거나, 자본의 이익을 공익이라고 강변하는 전문가 담론에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는 걸까요? 왜 반박하거나 거부하지 못하는 걸까요? 그리고 왜 이 도도하고 오만한 흐름에 저항하는 이들과 한편에 서거나, 지지 발언을 하거나, 투쟁을 엄호하는 연대자로 나서지 못하는 걸까요? 어째서 사회적인 연대로 노동자의 투쟁을 사회적인 투쟁으로 만들지 못하는 걸까요?

노동자의 투쟁이 개별화되고, 개별 노동자들의 이익으로 ‘전락’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임에도 사회적인 투쟁으로 확대되고 ‘비화’하는 것이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투쟁이 사회적인 투쟁으로 확대되고, 전체 노동계급의 이익으로 가는 길이 봉쇄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담합, 이 땅의 선택받은 정치세력과 정당들의 노동배제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국가와 자본, 정당들의 이데올로기와 행위 앞에 굴복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사회와 사회적인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전체 사회가 저항하는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사회는 자본주의 시민사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회 안에서 노동자 투쟁에서 한편이 되고, 노동자 이익을 국익과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자본의 이익 앞에 무조건적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와 정부, 보수정당을 비판하며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사회는 단일하지 않고, 사회적인 것들은 서로 분명히 충돌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지금 거제도 옥포만 대우조선해양에서 거제통영고성지역 전체 조선소 노동자를 아우르는 거통고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이 파업 중입니다. 대우조선 직접생산직 1,2000여 명 중 단 150명의 파업 참가자들이, 마지막까지 파업대오에 남은 이들이 대우조선에서 파업 중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파업을 두고, 어마어마하게 ‘국익’을 말합니다. 지금 대통령이라는 자가 대한민국 경제가 무너질 것처럼 말합니다. 언론과 교수들이 대우조선이 문 닫을 것처럼 말합니다. 원청과 하청업체가 대우조선 비정규노동자들이 회사를 죽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대우조선 정규직들이 비정규 노동자가 정규직을 죽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어리석음이라니.

단 150명의 노동자가 이렇게 위력적이라면, 노동자 1만 명이, 노동자 10만 명이, 노동자 단 1백만 명이 제대로 뭉친다면, 이 나라 경제를 뒤집어엎고 싸그리 변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사회와 자본주의가 지금 거제 옥포만에서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공공연하고 노골적으로 ‘자기고해’의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해방이후 산업화로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이 자본주의는 애초에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이 자본주의가 말하는 국익은 자본의 이익이라고. 하지만 부패하고 부유화되고 살찐 돼지마냥 자신의 이익만 고수할 뿐인 이 자본주의는 너무 허약해서 2500만 노동자들 중 단 1%의 노동자만 제대로 조직하고 정확하게 저항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고. 호들갑인지 진심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난 6월 2일부터 파업을 시작하고, 6월 7일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간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가 지금 많이 어렵습니다. 파업에서 내건 요구를 많이 접고 투쟁을 정리하려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불황에는 고통 분담을 요구하며 해고와 인원감축, 임금인상을 가장 빨리 단행한 자본은 호황이 되자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다시 호황기가 도래한 조선업종의 사정을 감안해 지난 6년간 삭감된 임금 30%의 원상회복을 요구했습니다. 사내하청업체들과 개별교섭이 아닌 집단교섭단을 구성하고, 원청회사가 교섭 테이블에 앉은 것은 노동자 파업의 성과입니다. 그래서인지 노조는 자본이 제안한 4.5%를 받아들일 의향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사측이 내놓는 조건입니다. 앞으로 불법파업을 하지 않는다고 확약할 것을 강요하며, 파업을 접고 나면 손배가압류를 철회하지 않고 강행할 것이라 협박합니다. 해서 손배가압류 고소고발 대상을 노조 집행부로 국한하는 문제를 ‘교섭’ 테이블에 올려두고 논의 중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노사 교섭 테이블에 이런 안건이 오르는 것이 애초에 적절합니까? 지금 노사 교섭이 이뤄지는 방향과 내용이 이해됩니까?

노조가 불법이든 합법이든 파업을 하지 않겠다고 확약해야 사측이 교섭에 합의해주고, 손배가압류를 노조 집행부로 국한해 달라고 하는 것. 이것은 교섭 대상이 아닙니다. 자본은 항상 교섭 의제나 대상에 대해 적절이니 부적절이니 몽니를 부리고 애초 안건을 선정할 때 많은 노동 의제들을 배제해버립니다. 그런데 노동의 입장에서도 부적절한 안건은 있는 것입니다. 불법이든 합법이든 파업을 하는 것은 노동의 권리입니다. 불법파업을 책임지는 것도 노조입니다. 손배가압류 대상에 대해 노사가 논의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부적절합니다. 단일노조인 금속노조 지도부가 지금 협상테이블에 앉아있는데, 과연 이게 교섭의제로 적절하다고 보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러나 조선하청지회가 왜 이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게 됐을까요? 그것이 기실 마음이 무거운 이유입니다. 조선하청지회는 이 안건이 부적절하다는 것, 이러한 수정제안들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난 수년간 노조를 만들고서 감행한 첫 전면파업이고, 50일간 현장 파업을 하면서 자본을 기어코 교섭장에 오게 만든 노사교섭이 이런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지금 가장 분통을 터트리고 억장이 무너지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사회적인 힘이, 사회적인 연대가, 사회적인 엄호를 믿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더 버티고, 원칙을 지키면서 투쟁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투쟁으로 모든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을 열어젖힐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사회는, 아니 이 땅에서 노동과 함께 하고, 노동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이든 사회개량이든 일으켜야한다고 생각한 소위 이 땅의 진보세력은 과연 대우조선 파업에 대해서 어떤 사회적인 힘을 구상하고 형성하고 있습니까? 아니 어떤 일말의 노력이라도 했습니까?

당장 7월 23일 희망버스부터 어떤지요? 조선하청지회의 교섭결과를 관망하고, 언론보도를 기다리고 스스로 ‘희망고문’하고, 아니 ‘희망주문’만 하지 말고, 이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지원하고 엄호하는 사회적인 힘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들이 “여기 사람이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여기 한편이 있다!”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가 철저하게 자본이익만을 사회적인 이해라고 포장하는 흐름을 끊는 것은 어떨까요? 이 사회의 다양한 이해들이, 한편을 만들고 다른 편에 대해서 저항하고 충돌하면서 이 사회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는 새 흐름을 만드는데 함께 작은 힘들을 합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
당장 내일 사파버스와 희망버스에 올라주십시오.
관망이 아닌 실천을. 투표행위를 넘어서서 매일 세상을 변혁하는 행동을.

출발 : 7월 23일 오전 8시30분 서울 동화면세점 앞
신청은 여기서 : (bit.ly/사파작은희망버스_대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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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 김석진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노동착취와 이윤극대화를위한 야만적인 자본의 질서 원,하청노동자 하나되어 반드시 척결해야한다. 민주노조! 열사정신을!! 외친다면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몇마리가 수백마리의 물소때를 흩어지게 만들고 그중 한마리를 잡아 먹는것을 볼수있다. 그런데 수백마리의 물소때가 뭉쳐서 사자를 공격하면 그들은 아무런 희생과 걱정없이 살아갈수 있을텐데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 노동자와 자본가 물소때와 사자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우리 노동자들의 의식은 어디에 머물고있는가?

  • 울산 김석진


    마지막 결투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외적의 앞잡이이고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양심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전선이다 무덤이다 감옥이다
    도대체 형제의 살해 앞에서 저항하지 않고
    누가 자유일 수 있단 말인가
    동지여 자본주의를 반대하여 싸우지 않고
    착취 받고 억압당한 민중들을
    옹호하여 싸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혁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김남주>



    녹두장군을 추모하면서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한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
    승리 없는 투쟁
    어떤 불행 어떤 고통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우리는 그의 이름을
    키가 작다 해서
    녹두꽃이라 부르기도 하고
    농민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수령이라 해서
    동도대장, 녹두장군
    전봉준이라 부르기도 하니

    보아 다오, 이 사람을
    거만하게 깎아 세운
    그의 콧날이며 상투머리는
    죽어서도 풀지 못할 원한, 원한
    압제의 하늘을 가리키고 있지 않는가
    죽어서도 감을 수 없는
    저 부라린 눈동자, 눈동자는
    90년이 지난 오늘에도
    불타는 도화선이 되어
    아직도
    어둠을 되쏘아보며
    죽음에 항거하고 있지 않는가
    탄환처럼 틀어박힌
    캄캄한 이마의 벌판, 벌판
    저 커다란 혹부리는
    한 시대의 아픔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시대의 상처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시대의 절망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보아다오 보아다오
    이 사람을 보아다오
    이 민중의 지도자는
    학정과 가렴주구에 시달린
    만백성을 일으켜 세워
    눈을 뜨게 하고
    손과 손을 잡게 하여
    싸움의 주먹이 되게 하고
    싸움의 팔이 되게 하고
    소리와 소리를 합하게 하여
    대지의 힘찬 목소리가 되게 하였다
    그들 만백성들은
    이 위대한 혁명가의 가르침으로
    미처 알지 못한 사람들과
    형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 세상을 겨냥한 동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한번도 맛보지 못한
    자유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적과 동지를 분간하여
    민중의 해방을 위하여
    전투에 가담할 줄 알았으니

    보아다오, 그들은
    강자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자유를 위해 구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부호의 담벼락을 서성거리며
    밥을 위해 토지를 위해
    걸식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판관의 턱을 쳐다보며 정의를 위해
    기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성단의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선을 구걸하지도 않았고
    돈뭉치로 선을 사지도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이빨 빠진 사자가 되어
    허공에 허공에 허공에 대고
    허망하게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만인을 위해
    땅과 밥과 자유의 정복자로서
    승리를 위해 노래하고 싸웠다
    대나무로 창을 깎아
    죽창이라 불렀고 무기라 불렀고
    괭이와 죽창과 돌멩이로 단결하여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양반과 부호의 다리를 꺾어
    밥과 땅과 자유를 쟁취했다

    보아다오, 보아다오
    새로 태어난 이 민중을
    이 민중의 강인한 투지를
    굶주림과 추위와
    투쟁 속에서 더욱 튼튼하게 단결된
    이 용감한 조직을 보아다오
    고통과 고통과의 결합
    인간의 성채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이 끊임없는 싸움, 싸움을 보아다오
    밥과 땅과 자유
    정의의 신성한 깃발을 치켜들고
    유혈의 전투에 가담했던
    저 동학농민의 횃불을 보아다오
    압제와 수탈의 가면을 쓴
    양반과 부호들의 강탈에 항쟁했던
    저 1894년 갑오년
    농민혁명의 합성을 들어다오
    그리고 다시 우리 모두 이 사람을 보아다오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아 있고
    영구히 살아남을 이 사람을
    녹두 전봉준 장군을 보아다오.

    <김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