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보고서: 멀고 낮은 곳부터 파괴했다
차례
① 코로나 재택 치료 72시간, 엄마는 깨어나지 못했다
② 코로나19의 정부, 차별과 배제를 더 넓게 더 깊게
③ 코로나19 이후, 국민은 ‘의료 인력·공공병원 확충’ 원한다
④ 간호사들은 왜 ‘사람 잡을까’ 공포에 떠나
⑤ 의료민영화 흐름 속 공공의료 확대 가능한가
⑥ 돌봄 노동자에게 감염병이 특히 버거웠던 이유
⑦ 이주민이 많은 도시, 차별은 같았다
⑧ 장애인의 일상이 여전히 재난인 이유
⑨ 코로나19 2년, 안녕하지 못했던 사람들
⑩ 전염병과 봉기, 혐오와 차별의 역사
⑪ 감염병은 ‘혐오’를 먹고 자랐다
⑫ 10명 중 6명 “코로나19 이후 혐오 표현 늘어”...‘사회적 양극화’ 때문
⑬ 질문들 감염병 시대, 처벌이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⑭ 99%의 경제 코로나19 대응, 시장 솔루션의 한계
▲ 마민지 씨는 코로나19위중증환자모임에 적극적으로 결합해 정부 정책의 문제를 알리고 있다. [출처: 박다솔 기자] |
엄마는 딸을 위한 레시피로 노트를 빼곡하게 채웠다. 오랫동안 채식을 하고 있는 딸에게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었다. 미디어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각종 레시피를 소개했고, 엄마는 틈날 때마다 기록했다. 딸과 따로 살아 자주 해줄 순 없지만, 딸이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뻤기 때문에 노트는 한 권, 두 권 점차 늘어갔다. 엄마는 이 밖에도 자잘한 기록을 노트에 남겼다. 그렇게 엄마는 30여 권의 노트에 본인의 일상과 꿈을 옮겨 담았다. 그리고 지난 4월 29일 이 노트들은 엄마의 유품이 됐다.
그간 엄마의 물건은 딸의 인생에 크고 작게 스며들어 지금의 딸을 만들었다. 엄마의 비디오카메라로 영상을 찍던 딸은 영화감독이 됐고, 엄마를 담은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2018년 개봉한 〈버블 패밀리〉(감독 마민지)는 부동산 투기 욕망을 몰락한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로 푼 영화인데 이 영화에서 주연은 엄마였다. 딸은 엄마의 노트 마지막 장에 적힌 ‘천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노래 제목을 왼쪽 팔에 새겼다. 딸에게 이 노래는 엄마의 마지막 편지였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개의 바람. 천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코로나19 누적 사망자 수 약 2만 5,000명. 그러나 이 숫자는 코로나로 인한 모든 죽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불완전한 숫자일 뿐이다. 감염 확인 7일 후 격리해제되고 사망한 사람들이 코로나19 공식 사망 통계에는 빠져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조차 과소 집계됐다고 평가하는 이 사망 통계가, 유족에겐 또 다른 소외의 증거다. 정부는 코로나19로 인한 죽음을 ‘기저질환’ 등으로 돌리며, 사망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막을 수 있는 죽음들이 계속되고, 피해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지난 6월 23일 시민 100여 명과 8개의 시민사회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인권침해 진정서를 접수했다. 이들은 코로나19로 인한 피해를 ‘사회적 참사’라고 규정하며, 의료공백과 불충분한 공공의료와 복지체계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해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국가인권위는 진정의 원인이 된 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는 것과 국가에 추모할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지난 7월 19일 해당 진정을 각하했다.
▲ 민지 씨의 팔엔 어머니를 생각하며 새긴 타투가 있다. [출처: 박다솔 기자] |
진정인 중 한 사람인 마민지 씨는 지난 4월 29일 코로나19로 어머니를 잃었다. 코로나19에 감염돼 4개월이 넘는 시간 에크모를 달고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의 존재는 여전히 크다. 어머니의 죽음은 아직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고, 마 씨는 세간의 오해 속에서 충분히 애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마 씨는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왜 우리는 추모하고 애도할 시간을 가지지 않고, 무엇을 잊기 위해, 무엇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토록 빠르게 망각하려 하는지 국가에 묻고 싶습니다”라고 외쳤다. 국가뿐 아니라 수많은 죽음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도 닿길 바라는 말이었다.
재택 치료 속에 방치된 70대 코로나 확진 부부
확진 4일 차 딸에게 전화 “숨이 잘 안 쉬어진다”
마 씨의 어머니 노해숙(72) 씨는 코로나19 확진 후 재택 치료를 하면서 코로나 위중증으로 병세가 악화했다. 정부는 확진자가 집에서도 안심하고 재택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치료체계를 마련했다고 자신했지만, 노 씨의 죽음에선 ‘의료공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다. 노 씨는 평소 건강한 편이었지만, 관절염이 심하고 고혈압 약을 먹고 있었다. 고혈압은 40세 이상 국민 5명 중 1명꼴로 발견될 정도로 흔한 병이지만, 코로나19 중증화 가능성을 높인다고 알려져 있다. 노 씨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4월 21일, 주민센터와 구청은 동선 파악에 열중했다. 당사자에게 6~7통의 전화를 걸어 정확한 동선을 확인하려 했다. 다음날인 22일, 노 씨는 재택치료군으로 분류돼 K병원의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마 씨는 어머니가 재택치료군으로 분류된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함께 청각장애인인 아버지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는데, 70대 부부가 서로를 돌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머니 휴대폰에 저장된 통화 기록들은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말해준다.
“어머니가 흉통이 심하다고 분명 말했는데 보건소는 발열이 없다며 재택 치료로 분류했어요. 부모님은 기초생활보장수급자고, 노령이고, 보호자가 필요했지만 위급할 때 연락 가능한 보호자를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노 씨는 재택 치료 4일 만에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날 아침, 노 씨는 숨에 찬 목소리로 민지 씨에게 전화했다. 민지 씨는 노 씨가 코로나19에 확진됐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급하게 119를 불렀다. 노 씨의 산소포화도는 55까지 떨어졌다. 대학병원에선 노 씨 상태를 보고 이미 폐렴은 중증이라고, 너무 늦게 왔다고 했다. 의료진은 코로나 내내 확진 초반 경증 환자를 잘 치료해 중증으로 악화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며 초기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재택 치료는 정부의 기대처럼 체계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재택 치료를 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계속 의료진에게 알렸지만 적절한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 산소포화도가 계속 떨어진다고 보건소와 K병원에 알렸습니다. 그런데 보건소와 병원에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우연이었어요. 아버지가 재택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꾸 밖으로 나가시려 하니까 그걸 말려달라고 저에게 전화하신 거였거든요. 이상 증세를 발견한 것도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입원시킨 것도 정부가 아니라 개인인 제가 나서야만 가능했습니다.”
지난해 말 개정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재택 치료(5판)에 따르면 미성년, 장애인, 70세 이상의 확진자는 재택 치료를 할 때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하다. 동거인이 보호자를 대신할 수 있지만, 노 씨의 동거인이자 민지 씨의 아버지는 장애인이었고, 그 역시 코로나19에 확진된 상황이었다. 코로나에 걸린 두 부부가 서로를 돌봐야 했는데, 위급한 상황은 빠르게 찾아왔다. 민지 씨는 정부와 언론이 ‘슬기로운 격리 생활’이라는 가벼운 주제에 매몰돼, 위중증으로 가는 시그널을 알리고 위중증 환자들에게 필요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했다.
“보호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환자들이 위험한 상황이에요. 병원이 기다리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거나, 계속 민원 넣고 항의해야 치료를 받을 수 있죠. 얼마 전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어요. 친구 어머니가 코로나19에 확진됐는데, 입원한 병원에서 투석을 못 해서 이틀 동안 소변을 못 보고 계신대요. 신장 이식한 환자에게 분명 위험한 상황인데도, 전원을 못 하고 있었던 거예요. 중수부에 연락해서 난리를 치고 12시간 만에 병원을 배정받아 들어갔어요.”
왜 사망했나…부실한 의료기록은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 지난 4월 8일 열린 ‘기억과 애도의 장 추모문화제’. 추모문화제는 코로나19 확진환자, 사망자 숫자 뒤에 가려진 개인의 삶을 기억하고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 기획됐다. [출처: <참세상> 자료 사진] |
현재 민지 씨는 K병원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재택치료군에 대한 제대로 된 치료가 이뤄졌는지, 병원에서 내어준 기록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다. 병원의 기록은 부실했고, 골든타임을 놓쳤던 흔적도 엿보인다. 보건당국은 ‘코로나19 재택 치료 의료지원 가이드라인’에서 환자 150명당 최소 의사 1~2명, (전담) 간호사 3~5명 배정을 권고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이 같은 가이드라인은 무용지물이다. 민간병원에서 고작 가이드라인 준수를 위해 간호사를 더 채용할 리 만무하기 때문에, 실제 현장에선 간호사 1명이 100명이 넘는 환자를 관리한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 두 번의 전화 모니터링은 환자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하기보다 형식적인 질문과 답변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농후했고, 이는 부실한 기록으로 나타났다.
22일부터 시작된 재택 치료는 산소포화도기와 체온계의 부재로 ‘기침, 가래, 흉통’이라는 증상만 작성돼 있다. 이 같은 증상은 23일까지 계속됐다. 23일 오전, 오후의 산소포화도는 97%, 96%. 체온 역시 36°C, 36.1°C로 정상이었다. 이후 24일 오전 8시 3분의 재택 치료 모니터링 확인서엔 “강동재택팀에서 노해숙 님 힘들어한다고 확인부탁 메시지 공유카톡으로 옴”이라는 특이 사항이 적혀져 있다. 약 한 시간쯤 뒤인 오전 9시 6분, K병원은 응급으로 병상 배정을 요청했다. 119가 도착했을 땐 산소포화도가 72%까지 낮아져 있었다.
민지 씨는 23일 저녁부터 24일 오전 사이에 노 씨의 상황이 악화했을 것이라며, 이때 입원하지 않아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3일 저녁, 노 씨는 K병원과 두 차례 통화했다. 2분 안쪽의 통화에선 산소포화도와 체온, 통증 등의 제반 사항 등을 이야기했다. 문제는 5분가량 이어진 그다음의 통화다. 이전의 통화들은 자동 녹음으로 모두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 통화만은 녹음되지 않았다.
“5분 이상 통화를 했다는 건 뭔가 특이사항이 있다는 거잖아요. 23일 저녁에 병원에 입원했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계속 안타까운 생각이 들죠. 해당 통화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고 싶어서 간호사한테 물어봐도 계속 모른다고 해요. 그런데 왜 기록을 안 했을까요. 저는 의무기록지의 작성 여부가 저희 어머니 사건의 쟁점이라고 생각해요. 보건소에서도 병원에서도 의무기록지 열람을 요청한 사람이 없었다면서, 이걸 작성하는 게 의무인지도 몰랐대요. 제가 받은 이 간단한 기록들도 사후에 대충 적은 게 아닐까 의심도 들어요. 저는 5분의 통화에서 어머니가 병원 측에 어떤 말을 했는지 알기 위해서 휴대폰 포렌식 작업을 맡길 예정입니다.”
재택 치료는 건강보험수가(당시 8만 3,260원)를 적용받는 엄연한 의료서비스였다. 하지만 서비스는 부실했고, 재택 치료 기간 환자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했다. 민지 씨는 중수본을 재택 치료 모니터링 확인서가 의료기록인지 확인하고, 의료기록이 맞는다면 그 부실한 기록을 증거로 소송이나 인권위 진정 등을 제기할 계획이다. 부실한 사망 통계에 대한 정보공개청구 또한 생각 중이다.
간병·돌봄·병원비를 떠맡게 된 30대 영케어러
▲ 지난 4월 8일 열린 ‘기억과 애도의 장 추모문화제’. 추모문화제는 코로나19 확진환자, 사망자 숫자 뒤에 가려진 개인의 삶을 기억하고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 기획됐다. [출처: 《참세상》 자료 사진] |
어머니가 병원에 있는 약 넉 달 동안 민지 씨는 간병을 도맡아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대학교 강의를 나가는 일을 제외하고 프리랜서로 하던 대부분의 일을 멈추고 병상을 지켰다. 도와줄 사람도 없고, 지원도 없었다. 오로지 홀로 간병을 책임져야 했던 그는 혹여나 자신이 코로나에 걸릴까 고립된 생활을 시작했다. 차에서 혼자 밥을 먹고, 집과 병원만을 오가니 우울감도 심해졌다. 홀로 남은 아버지를 챙겨야 하는 일도 민지 씨의 일이었다. 힘들어서 눈물이 쏟아지기도 여러 번. 아직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아침마다 울면서 민지 씨에게 전화하는 일이 잦다.
치료비, 생활비 등 치료과정에 드는 돈을 마련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코로나19 격리 해제와 동시에 치료비는 온전히 개인의 부담이 된다. 부모님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재산이 거의 없었고, 프리랜서였던 민지 씨는 어머니 간호로 일을 중단한 상태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병원비 본인부담금은 약 5,000만 원, 장례비까지 합하면 약 7,000만 원 정도가 들었다. 다른 코로나19 환자들의 경우도 장기 입원을 할 경우 억 단위의 치료비가 청구된다. 약 두 달 정도 코로나 치료를 했던 한 다른 70대 환자의 경우, 약 2억 100만 원 정도가 청구됐다. 이 중 코로나 치료비용으로 정부에서 지원하는 금액은 약 1억 6천만 원. 개인이 부담해야 할 돈이 4,000만 원으로 줄었지만, 사보험 없이는 서민들이 쉽게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다. 치료비 마련을 위해 집과 차를 팔았다는 말들은 과장이 아니다. 민지 씨의 경우 생계유지를 위해 3000만 원가량의 대출을 받아야 했지만, 병원비는 어머니가 가입한 보험으로 해결했다.
“어머니가 들어놓은 보험이 있었는데, 딱 청구된 병원비만큼 보장해주더라고요. 우연히 맞아떨어진 거겠지만, 왠지 엄마가 자기 죽음을 알고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느껴졌어요. 병원비는 운 좋게 해결했는데 빚이 많아요. 일을 쉬니까 병원 주차장비 같은 자잘한 것까지 상당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코로나19위중증환자들의 피해들이 공론화된 것은 민지 씨의 역할이 컸다. 구멍이 숭숭 난 의료체계의 허점을 절감했고, 피해자들을 모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고, ‘강제 전원’ ‘거액의 치료비 부담’ ‘방치에 가까운 재택 치료’ 등 처참한 증언을 모은 설문 결과를 들고 시민단체 문을 두드렸다. 이후 기자회견을 하고, 정부에 위중증 환자에 대한 차별 없는 치료와 공공의료의 강화를 요구했다. 청와대와 국회에선 역시나 답이 없다. 그리고 코로나19 재유행이 시작됐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