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노동자 정신적 고통 악화에 ‘국가손배’ 영향 컸다

13년째 이어진 국가손배…당사자들, 트라우마 진단서 내용 공개

국가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이 이들의 정신적 고통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3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 소송은 시민단체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가 기록한 손해배상청구소송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다.

국가폭력 및 국가손해배상소송 당사자들은 3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청에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트라우마 진단서 24장과 사망진단서 2장을 제출했다. 아울러 이들은 경찰청에 손해배상소송(손배소송) 취하와 면담을 요구했다.


주최 측은 이번에 심리검사가 진행된 이유에 대해 올해 초부터 법원에 장기 계류 중인 손배소송을 두고 불안을 호소하는 노동자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2009년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서른 명의 희생자가 나왔으나, 그동안 당사자 개인을 대상으로 트라우마에 대한 진단 및 치료를 시도한 적은 없었다. 이에 손배소송 당사자들을 대상으로 트라우마 검사를 먼저 실시한 것이다. 이날 경찰청과 대법원에 제출된 트라우마 진단서상 노동자들의 주 상병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21건, 혼합형 불안 및 우울장애가 3건 있었다. 의사는 이들 모두에게 1년 이상 장기 치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냈다.

40대 A노동자의 진단서에는 “최근 재판 관련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가 더욱 기존 정신적 고통을 악화시킨 것으로 판단되며 향후 1년 이상의 꾸준한 정신과적 전문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라고 적혀있다. 50대 B노동자의 진단서에는 “법원 관련 재판이 발생하자 기존 정신적 고통과 불안이 심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긍정적 노력 중이나 실제 정신적 고통은 심한 편으로 현재 약물 증량하면서 조정 중”이라고 쓰여 있다.

손배소송 당사자들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우리는 2009년 파업에 참여한 결정에 대한 대가를 13년째 치르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 2009년 옥쇄파업 현장에서 단 한 발짝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혀있음을 확인하고 있다”면서 “우리는 여전히 동료를 잃어야 했고, 지금도 서로를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들은 “경찰은 지금이 국가폭력을 스스로 멈출 기회임을 직시하길 바란다”면서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리던, 판결이 끝난 후에는 경찰이 소송을 멈출 기회는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신적 고통과 희망 고문…“제발 살려달라”

지난 2018년 경찰은 쌍용차 사태에 과도한 공권력 투입을 통한 국가폭력이 있었음을 인정한 바 있다. 쌍용차 사태와 관련해 2019년에는 민갑룡 당시 경찰청장이 직접 사과했고, 같은 해 국가인권위원회는 경찰이 사태를 악화시킨 책임이 있다며 대법원에 결정문을 제출했다. 지난해 9월에는 국회에서 ‘쌍용차 국가손배 소 취하 결의안’이 본회의를 통과하기도 했다.

2009년부터 이어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장애로 최근 정신과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는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조합원은 “지난 4년의 노력과 기다림이 또다시 희망 고문으로 남게 될까 너무도 두렵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와 제 동료들은 무려 13년 동안 ‘피고’가 돼 재판받고 있다. 게다가 이 소송은 재판에 지게 될 경우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의 배상금이 걸려있다. 해고되자마자 퇴직금과 부동산 가압류를 경험한 바 있기에 지금 유지하는 일상이 언제든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끌어안고 13년을 보내고 있다”라고 전했다.

채희국 조합원은 “오늘이라도 당장 국가손배 소 취하라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밤마다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되는, 술을 마시지 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다”면서 동료의 말을 빌려 “‘제발 살려 달라고, 두 번 죽이지 말아 달라고. 해고로 한번 죽였으면 됐지, 손배·가압류로 한 번 더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제발 살려 달라”라고 했다.

쌍용차 국가손배 소송을 네 번째로 담당하고 있는 서범진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2018년 인권침해진상조사위원회가 소 취하를 권유했음에도 당시 민갑룡 경찰청장은 소 취하를 하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업무상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경찰은 기업이 아니다. 이는 법률적으로 근거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해당 사건이 “지난 2016년 대법원에 올라 벌써 6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내년이면 고등법원과 1심이 진행된 7년이라는 기간이 똑같이 반복되게 된다. 경찰은 결자해지의 자세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이어 랑희 공권력감시대응팀 활동가는 2009년 쌍용자동차 사태 이후 경찰이 법을 동원해 폭력을 지속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파업이라는 노동자의 권리를 행사했을 뿐인데 쌍용차 노동자들은 경찰의 폭력 속에 권리를 부정당했다. 물리적인 폭력도 큰 피해이지만 국가가 나서서 진압하는 파업이었기에 사회적으로도 존중받지 못했다. 오히려 범죄자가 됐다”면서 “경찰은 사과했지만, 파괴적인 폭력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삶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과가 완료됐다고 말할 수 있겠나. 피해자의 명예와 삶을 회복하려면 소송 취하가 그 시작이 돼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지욱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대우조선 하청 노사 간 협상에서도 손해배상 청구 문제를 마지막까지 풀지 못했다. 대우조선은 470억 원의 손배 청구를 자행하고 말았다”면서 “이번 국회 동안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가압류 금지와 파업권의 온전한 보장을 위해 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손배소송의 심각성 알리기 위해 나섰다”

한편, 당사자들은 트라우마 진단에 나선 이유에 대해 장기간 손배소송 남용이 노동자 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스스로 증명하고 이를 기록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손해배상 액수는 원금과 지연이자를 포함해 약 29억2천만 원에 달한다. 해당 사건은 2016년 6월 대법원 상고 후 현재까지 선고기일이 미정인 상황이다.

주최 측은 기자회견 내용과 관련한 기사 댓글에 악성댓글이 달릴 경우 당사자들의 트라우마를 악화시킬 수 있다며, 앞으로 모니터링과 함께 법률적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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