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모성보호 운동의 선구자, 박원희

[혁명을 꿈꾼 여성들]

[출처: 대한민국 정부]

박원희(1898-1928)는 충남 대전에서 양반집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와 오빠 박광희의 관심과 사랑으로 불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제의 편견과 차별에 저항했으며,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대한 열정이 넘쳐났다. 성격은 매사에 열정적이고 성실했으며 올곧은 신념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미리 짐작할 수 있듯이 어른이 돼서도 그 성격을 변함없이 유지했다. 하지만 당시 민족해방투쟁에 투신했던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격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다.

박원희는 12세인 1909년에 관립 한성고등여학교에 입학했고, 18세인 1915년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부설 사범과에 입학했다. 박원희는 특별히 국어와 산술, 이과, 재봉, 수예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사범과 재학 중 습득한 일본어와 재봉, 수예 과목이 이후 박원희의 인생에서 생계유지의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1916년 사범과 졸업 후 철원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4년 근무한 뒤 교사를 그만뒀다. 3.1운동 이후 일본에 대한 정책이 커다란 변화를 보인 것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3.1운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된 시기에 공립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각성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20년 초, 서울에 와서 민족문제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사회주의를 인식하게 됐다. 당시 언론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오빠 박광희 활동이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박광희는 조선노동공제회에서 활동했는데, 이 단체는 1920년 4월에 창립된 한국 최초의 노동단체다. 따라서 박광희는 사회주의자이거나, 최소한 그 운동에 공감하는 급진적 활동가였을 것이다.

  박원희. 동아일보, 1928년 1월 6일.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박원희는 1921년 7월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지도자인 김사국과 결혼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신문에까지 보도될 정도로 화제였다. 박원희는 교사 출신의 인텔리 여성이었고, 김사국은 3.1운동으로 투옥됐다가 출옥한 지 얼마 안 된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이 결혼은 박원희에게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사회 변혁 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박원희·김사국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 신념의 소유자들이 현실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박원희는 일본에서 양복 직공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노동자의 처지를 인식하고,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박원희의 일본 유학 생활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사회주의 사상과 함께 여성해방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스웨덴 출신의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교육학자인 엘렌 케이(Ellen Key, 1849-1926) 사상이 중심이 돼 여성해방 담론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1923년 초 일본에서 귀국한 박원희는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려고 했으나, 그해 4월 김사국이 수배당하면서 같이 북간도로 건너가게 됐다. 수배 이유는 1922년 11월 서울에서 발발한 자유노동조합 사건 때문이었다. 1922년 10월 21일 김사국과 서울파는 ‘지게꾼 취체 문제’에 대한 비판 집회를 개최했다. ‘취체’는 일본식 한자어로 단속이나 통제를 말한다. 사설 지게꾼 취체사무소의 착취를 고발하는 이 집회에 400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의 택배 노동자들 노동 착취 고발 대회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이들 노동자가 주체가 돼 1922년 10월 29일에 자유노동조합을 창립했다. 직업별 노동조합이다. 그리고 《신생활》 11호(1922)를 ‘러시아혁명 제5주년 기념특집호’로 간행하면서 이날 발표한 ‘자유노동조합선언문’을 게재했다. 이를 ‘신생활사 필화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김사국의 동생 김사민은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고, 김사국은 수배당했다.

북간도 용정으로 간 박원희는 대성학교에 설립된 간이 중학교인 ‘동양학원’의 영어 강사로 활동했다. 이 학교는 서울파 공산 그룹이 주도하는 합법적 교육기관이었다. 강연회가 주요한 사회운동이었는데, 현지 조선인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반면 그만큼 일제 경찰에게도 뜨거운 감시 대상이었다. 결국 비합법 조직을 건설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다는 소위 ‘동양학원 사건’으로 30여 명의 젊은 혁명가들이 체포·투옥됐다. 박원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옥중에서도 박원희는 엘렌 케이의 저작을 번역할 정도로 여성해방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엘렌 케이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엘렌 케이의 ‘모성보호’ 사상에 각별히 공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신 중이었던 박원희의 투옥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해 10월 중순 석방된 박원희는 귀국길에 올랐다. 서울로 돌아온 박원희는 서울파 여성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광진부인회에 가입해 사회주의이자 여성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1924년 5월에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했다. 창립 동지들로 정종명, 정칠성, 주세죽, 허정숙 등 쟁쟁한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결성 선언에서 남성의 횡포가 모성의 파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현 상황을 비판했다. 박원희는 조선여성동우회의 활동 방향을 회원모집과 조직 확대, 교양 기관의 설립을 통한 부인 교양의 확대, 기고·강연을 통한 선전 활동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1925년 2월 제1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이후에는 여성동우회 활동을 등한시했다. 반면에 서울파 활동에 역량을 집중했다. 이는 박원희가 1925년 4월 29일에 출산하고, 1926년 5월 8일 배우자인 김사국과 사별했던 개인적인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박원희는 1925년 2월에 ‘경성여자청년회’를 창립했다. 이 조직의 강령을 통해 여성해방에 대한 자기 생각을 구체화했으며, 서울파와의 연계를 통해 조직의 역량을 강화했다. 박원희는 강령에서 ‘부인의 독립과 자유를 확보하며 모성보호와 남녀지위의 평등인 사회제도의 실현’을 희망했다.

1926년 12월에는 사회주의계 여성단체를 통합한 ‘중앙여자청년동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박원희는 여성해방운동을 위해 여성들만의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중앙여자청년동맹의 창립은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들의 통일을 실천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 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 야업 폐지, 무산 아동 및 산모의 무료 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했다. 1927년 5월에는 민족협동전선 여성단체인 근우회 창립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 겸 교양 위원으로 활동했다. 근우회의 경성지부가 결성될 당시 중요하게 내세운 강령 중 하나가 바로 모성 보호의 문제였다.

박원희의 여성해방 사상의 핵심은 사회주의 사상과 모성보호이다. 조선 여성 운동계에서 모성보호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은 박원희였다. 또 그만큼 조선의 여성 운동계에서도 모성보호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됐다. 엘렌 케이의 모성보호 사상은 일본에서 먼저 수용돼 조선으로 이어졌으며, 1920년대 초반부터 여러 여성운동 단체의 주요한 강령으로 자리 잡게 됐다.

박원희는 일본의 여성 사회주의 활동가들과의 교류도 추진했다. 대표적으로 일본 사회주의 여성 운동계의 유명 인사인 오쿠 무메오(奥むめお)와 스미이 미에(住井美江)가 조선의 사회주의 단체 및 여성단체의 초청으로 조선에 방문해 강연하고, 조선 여성 운동가들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스미이는 1926년 조선을 방문해 박원희, 유영준 등 여성 운동가들과 함께 연단에 오르기도 했다. 박원희를 비롯한 조선의 여성 운동가들은 일본 여성 운동계의 영향을 받은 동시에 식민지라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여성해방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절실하게 고민했다.

박원희의 모성보호 관점은 실용적이었다. 그는 여성이 남성과 평등하게 경쟁하기 위해 모성보호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리고 이는 국가에 의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투쟁을 통해 획득해야 할 목표이자 운동의 강령이었다.

박원희는 여성이 사회에서 밀려나 가정으로 종속된 원인을 재래의 봉건적 관습에 따른 가부장제 제도의 확립이라고 인식했다. 원시 공산사회가 모계중심사회였다고 인식한 것, 모계중심사회가 사유재산제도와 계급의 발생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로 발전했다는 인식은 모두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계승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한다. 즉, 박원희는 동양적인 유교문화로 인한 관습을 서구의 봉건적 관습으로 인한 가부장제 사회로 인식하면서, 식민지 조선 사회의 전통으로 인한 폐단을 특수가 아닌 일반으로 이해했다. 이에 따라 박원희에게 여성의 고통은 인간적·민족적·계급적 고통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인간사회의 도덕이 아니기에 여성들은 비합리적인 인간사회에서 합리적인 인간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해방은 계급투쟁이 됐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1928년 1월 10일 거행된 박원희 장례식 행렬. 동아일보, 1928년 1월 11일.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하지만 박원희도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배우자 김사국과 마찬가지로 건강을 잃었다. 1927년 12월 초에 시작된 몸살감기가 그를 중병으로 몰아갔다. 전혀 예기치 않게 급속히 병세가 악화했다. 이듬해 1월 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31세였다.

박원희의 장례식은 1928년 1월 10일 거행됐다. 근우회를 비롯한 34개 사회단체가 합동으로 장례식을 주관했고, 천여 명의 추모객들이 모였다. 그 정도로 그는 1920년대 여성운동에서 그 역할과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었다.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 고 박원희’라는 명정(銘旌)이 덮였다. 그는 2년 전에 먼저 간 김사국의 수철리 묘지에 함께 안장됐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참고 자료〉
김도경, “식민지와 제국의 여성운동, 그 접점과 간극-경제적 해방과 모성 보호 문제를 중심으로”, 《석당논총》 74집(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9)
안미경, “1920년대 박원희의 여성해방운동과 여성해방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4(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3)
임경석, “혁명과 사랑의 불꽃”, 《한겨레21》 제1168호(2017)
정종현,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⑥] 혁명가 형제, 역사를 세우다: 김사국과 김사민 형제”, 《웹진 역사랑》 통권 18호(한국역사연구회, 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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