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폐연대 20주년…‘비정규직 철폐 운동’에 필요한 것

[인터뷰] 엄진령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지난 20여 년 동안의 비정규직 노동운동과 오롯이 함께해온 단체가 있다. 바로 올해 20주년을 맞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철폐연대)다. 그동안 철폐연대는 ‘비정규직 철폐 운동’의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대자본에 닿는 투쟁을 만들어 보자는 공단지역 조직화 사업은 8년의 준비 끝에 지난해 ‘반월시화공단노동조합: 월담(월담노조)’을 세우기도 했다.

과거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활동과 투쟁은 늘었다. 그러나 최근까지 비정규직 관련 연구를 이어오고 있는 엄진령 활동가는 그간의 비정규직 투쟁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지금 말하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한때 비정규직 운동이 성장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투쟁에서 ‘공정성 논리’에 부딪혀버렸기 때문이다. 절망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전망이 필요했다. 철폐연대는 지난 운동의 평가를 거쳐 새로운 전망을 세울 예정이다. 《워커스》는 철폐연대의 스무 살 생일이었던 지난 9월 14일, 엄진령 활동가를 만나 철폐연대의 지난 20년 투쟁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엄진령 활동가는 철폐연대가 공식 출범한 2002년, 노무사이자 회원으로 철폐연대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2006년 상근 활동을 시작한 그는 최저임금 투쟁과 특수고용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했다. 이후 몇 년간은 노동자 투쟁에 대한 법률 지원을 했고, 현재까지 공공부문 비정규직과 관련한 연구를 맡아오고 있다.

  엄진령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 [출처: 은혜진 기자]

쉼 없이 달려온 지난 시간을 거쳐 철폐연대가 20주년을 맞았다. 소감이 어떠한가.

"서른 살이 됐을 때가 생각난다. ‘나’라는 사람이 서른 살이 되면 어떤 큰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큰 감흥이 없고, 심경이 복잡하기 그지없다. 철폐연대가 2002년 출범했지만, 한국에서 비정규직 투쟁이 시작됐다고 꼽히는 해는 1999년이다. 철폐연대가 지금까지 23년의 비정규직 운동의 역사를 함께해왔다고 보면 된다. 철폐연대는 활동가 개인이 어떤 사업을 하고자 하면, 의욕적으로 이를 지원하는 단체다. 이에 따라 일의 양이 증가하더라도, 의미를 두고 활동해왔다. 숨이 목까지 차도록 일이 많아도 힘겨움을 느끼진 않았다. 20년이 지났으면 단체의 구력이 그만큼 쌓였어야 할 것 같은데, 나이만 먹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철폐연대의 출범 배경에는 파견노동자들의 대량 해고 사태와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제정과 시행이 있었다. 당시 2년 이상 된 파견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해야 하는 의무를 회피하기 위해 사용자들이 파견계약을 해지하거나 전환 배치를 강요하는 문제가 확산했다. 상황이 이러한데, 경제 단체에서는 대량 해고 사태를 악용해 파견 기간을 1년 추가 연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2000년, ‘파견용역노동자 노동권 쟁취와 근로자파견제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1) 이어 1년 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준비위가 발족했고, 이듬해 철폐연대가 공식 출범했다.

“불안정노동 철폐 투쟁의 주체를 세워, 이 투쟁을 사회적 싸움으로 만듦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과제에 복무하고자 한다. 이 싸움을 위해 우리가 호소할 대상은 조직노동자, 미조직노동자, 그리고 활동가들이다.

노동의 불안정화를 철폐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노동운동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첫걸음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항상 되새기면서 안주하고 자족하지 않고 전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 철폐연대 창립선언문 발췌

현재 철폐연대의 주요 사업을 설명해 달라.

"크게 두 가지다. 10년 전 비정규직 운동을 평가했을 당시 앞으로 철폐연대는 조직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것의 한 축으로 지금까지 공단 조직화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공단 조직화는 다단계 하청의 가장 말단을 조직해 대자본에 닿는 투쟁을 만들어내자는 전망을 갖고 있다. 공단 조직 사업과 나란히 병행했던 것이 정책 생산이었다. 조직화를 위한 정책과 불안정노동 철폐 운동의 장기적인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몇 년 뒤에 노동권연구소를 세웠다. 노동권연구소를 철폐연대의 내용을 좀 더 대중적으로 알릴 수 있는 통로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동안 연구 프로젝트에 파묻혀 이 부분은 진행이 어려웠다. 이 외에 법률위원회 활동을 비롯해 여러 투쟁사업장에 대한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플랫폼 산업이 발달하면서 규제하기 어려운 형태의 노동자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동안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어떻게 변화했다고 보시는가.

"간접고용, 특수고용, 기간제 등 고용 형태를 떠나서 비정규직 문제가 다양하게 분화했고 복잡해졌다. 거의 모든 산별노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비정규직이 드러나고 있다. 불안정화가 심해지고, 고용 형태가 더 다양해졌다는 것은 권리를 취약하게 하는 방식으로 자본의 전략이 발전해온 것이다. 이를 운동으로 막아내지 못했던 측면이 있다.

하지만 활동하는 비정규직노조가 많아지고 투쟁할 수 있는 주체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다. 과거엔 비정규직노조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비정규직들은 노조를 만들면 거리로 내쫓겨 비와 눈을 맞으며 싸우다 사라졌다. 그런데 이제는 산별노조의 틀 안에서 노조를 유지하고, 교섭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한다. 이들이 노동 실태를 직접 사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나."



철폐연대의 궁극적인 목적은 ‘불안정노동의 철폐’다. 노동자 투쟁 현장에서 낯선 구호는 아니지만, 실제 이를 위한 투쟁을 벌이는 곳은 드물지 않나.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비정규직들이 불안정 노동화를 막는 투쟁을 자신의 과제로 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많다. 이러한 원칙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며, 비정규직들이 불안정 노동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움직임이 별로 없기도 했다. 가능성을 가진 주체들이 많지만, 이것이 운동의 주체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운동의 한계일 수 있겠다.

사실 비정규직노조 안에서도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에 맞서 싸움을 키워나갈 것인지, 혹은 당면한 처우 문제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지는 오래된 논쟁거리다. 이 해묵은 논쟁이 문재인 정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자회사 방식의 고용 전환을 이전과 같은 간접고용이라 보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반면에 정규직 전환에 준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었다."


철폐연대는 10여 년 전, 비정규직 투쟁의 향후 10년 과제로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공동투쟁을 제시했다. 민주노조운동이 계급적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투쟁, 올해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 투쟁만 봐도 민주노총 내에서도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요구에 반대하는 모습이 있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은 멀게만 느껴진다.

"비정규직 운동 초기만 하더라도 비정규직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되는 것을 두고 보는 경우 민주노조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2000년대 현대중공업노조가 제명됐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반대하고, 심지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더라도 상급 단체가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정규직노조가 상급 단체를 탈퇴하겠다고 협박하는 상황이지만, 눈치만 보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가를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한 현재 정규직노조 현장에는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96·97 총파업을 경험한 세대가 많지 않다고 한다. 이 얘기가 나온 것이 이미 10여 년 전이다. 노동조합이 똑같이 존재하더라도 그 안의 사람들은 달라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이 중요’하다거나 ‘민주노총이나 노조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자기 과제로 갖고 투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비정규직 운동에서 중요’하다는 말이 조금 무용해진 것 같다.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럼 어떤 투쟁 방식이 필요할까.

"개인적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정규직도 자회사 전환, 정규직 전환이 됐다고 해서 자신의 문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더 열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봐야 한다. 간접고용,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면, 몇 년 뒤 지금 정규직에서 보이는 보수화된 모습을 자기에게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이라 해서 원칙을 부여잡고 투철하게 싸우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노조를 왜 조직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필요하다. 조직할 때부터 해당 사업장과 해당 고용 형태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으로서의 의식을 갖도록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노조가 아무리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노조에서 오랫동안 조직사업을 해온 활동가에게 5명 노조와 500명 노조를 조직하는 데 투입되는 품이 같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의도와는 다르게 조직사업의 결과가 ‘몇 명’이 조직됐느냐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다수 조직화가 유리한 곳으로 조직사업이 집중되는 경향이 생긴다. 비정규직·정규직 공동투쟁이 어려운 이유는 이러한 기간이 꽤 오래됐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으로 하나가 돼,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고용 형태와 무관하게 함께 싸우는 것이 옳다’라는 말이 이제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철폐연대는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초기 10년을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를 일반화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하려는 자본과 그것이 아님을 밝히고자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과정이었다고 정리한 바 있다. 그렇다면, 지난 10년의 투쟁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나.

"비정규직 운동의 초기 10년은 ‘제도화를 둘러싼 투쟁’으로 비교적 명확히 정의할 수 있다. 비정규직 사용을 제도화하려는 당시 노무현 정부와 비정규직을 극히 예외적으로만 활용할 수 있도록 사용을 규제해야 한다는 노동자 사이에 굉장히 치열한 다툼이 있었다. 2003년부터 비정규직법(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이 개악되고 2007년 시행될 때까지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두 번의 보수정권에서 제도적으로 발돋움을 전혀 못 했다. 하지만 2009년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파업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에 주목하는 사회적 인식이 많이 확대됐다. 이에 앞서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에서 ‘함께 맞는 비’가 결성되는 것을 시작으로 연대모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 사회적인 힘이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졌고 불안정 노동운동을 지지·지원하는 흐름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비정규직 투쟁이 사회적으로 확산·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등장한 능력주의, 공정성 논리는 비정규직 운동에 너무 큰 참담함을 안겨줬다. 이것이 최근의 일이라, 그동안의 비정규직 투쟁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얘기하기는 쉽지 않다."


철폐연대는 20주년 사업으로 그동안의 불안정 노동 철폐 운동에 대한 평가 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 말에는 전망 토론회를 진행할 예정인데, 여기에 앞서 그동안의 활동에서 아쉬웠던 부분이 있나.

"비정규직 투쟁을 경험한 활동가들이 불안정노동 철폐 운동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것은 철폐연대 설립에서 주요한 문제의식이었다. 그런데 이를 특정한 사업 형태로 기획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다. 운동의 정치화에 대한 고민도 철폐연대 활동 10년 평가 이후부터 꾸준히 있었다. 불안정 노동자의 운동이 기존의 노조라는 그릇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조직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는 필히 정치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이 부분도 철폐연대의 일상적인 활동에서 구현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불안정노동 운동의 정치화는 다른 세계를 지향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진보정당 운동, 정치 세력화라는 의미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정치성을 어떻게 복원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다. 노조 운동이 오랫동안 잃어온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 전망 속에서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려고 한다."

앞으로 철폐연대의 계획을 알려달라.

"불안정노동에 맞서 어떻게 싸워나갈 것인지에 대한 전략과 장기적인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권연구소를 중심으로 이 역할을 해나갈 예정이다. 또 철폐연대의 정책을 잘 정리하는 것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말들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불안정노동 운동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점은 철폐연대 활동가들 사이에서 확인됐다. 일반 대중에 가장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이 월담노조이기 때문에, 월담노조 활동에 좀 더 집중하는 것도 지금 시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 ‘파견・용역 노동자 노동권 쟁취와 근로자파견제 철폐를 위한 사회단체 연석회의’ 회의록(2000.6.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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