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준에 종속된 반쪽짜리 세계

[요즘 경제]

22년 회상, 허울뿐인 ‘상저하고’

2022년 연초, 대부분의 경제연구소는 경제전망에 대해 견실한 회복세를 강조했다. 코로나 오미크론 유행이 점차 수그러들면서 선진국 중심의 경제회복세가 세계 경제의 성장세를 이끌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 예상이 빗나간 건 불과 두 달도 안 됐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 사태가 벌어졌다. 그 후 원유가격의 급상승이 여름까지 이어졌고,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사태에 불을 붙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연준의 급격한 금리인상은 3연속 ‘자이언트 스텝’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고, 그 후 세계 경제는 통화긴축이라는 급격한 변화에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떠는 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정부로부터는 독립적이지만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로부터는 그렇지 않다.” 지난해 8월 한국은행 총재가 인터뷰에서 밝히 내용이다. 이 말을 미국 달러체제의 위상을 대변하는, 그냥 비유적 표현으로만 흘려보낼 수 없는 것은 갑작스러운 통화긴축으로 인한 전 세계 빈자들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TV와 언론을 통해 미국발 금리인상 이슈는 매일 다뤄진다. 그리고 여기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영끌족’을 비롯한 다중채무자와 취약계층 이야기다.

견실한 경제회복세라는 경제연구소들의 일 년 전 장밋빛 전망은 어느덧 기억조차 못 할 이야기가 돼버렸다. 이제는 연준이 언제까지 금리인상을 유지할지 그리고 언제 금리인하로 돌아설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채, 저성장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비관론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있다.

2023년을 내다보는 경제연구소들의 전망은 ‘상저하고’로 요약된다. 상반기엔 경기침체로 힘들겠지만, 하반기엔 점차 회복세로 전환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최근 10년 동안 경제를 전망하는 기관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가장 유행하는 단어다. 지금 당장 어렵겠지만 차츰 나아질 것이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위로의 말이지, 뭔가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가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이 매년 반복되는 레토릭이라는 점을 뒤집어 생각하면, 매년 예상치 못한 사건과 정세로 인해 해마다 ‘상저하고’가 아닌 ‘상저하저’가 계속 지속됐음을 의미한다. 우리도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을 생각해 볼 때, 경제가 눈에 띄게 좋아진 기억이 거의 없다.


금융경제의 이상한 ‘바로미터’

그런데 사람들 머릿속에 유일하게 기억되는, 뜨거운 열기가 돌았던 경제 영역이 있다. 바로 코인, 주식, 부동산이다. 지금 금리인상의 지속 여부에 대한 논란들의 대부분은 가상화폐, 주식, 부동산과 관련된 이야기로 귀결된다. 하락장을 멈추고 언제 다시 강세장으로 전환될지 예측하는 이야기들이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뤄진다. 대중들의 금융자산에 대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금리정책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연준의장이 기자회견에서 사용한 단어에 따라 금리인상에 대한 매파적 발언이라 인식되면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반대로 비둘기파적이라 판단되면 상승하는 이런 현상은 세계가 연준에 얼마나 종속돼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주식시장이 기업의 미래 가치를 평가하는 지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차익실현을 위한 투기적 행위의 지표로 작동하는 것은 어제오늘 만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브레이크 없이 더욱 가속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 문제다. 저성장, 실업, 소득감소로 인한 경제적 고통에 주목하기보다, 자산시장의 재상승이 언제가 될지에 대중의 이목이 더 집중되고 있는 현상은 금융경제의 ‘바로미터’가 잘못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자산시장의 혼돈은 지난 2년여 동안 코로나 위기 대응에서 파생된 금융정책이 낳은 후유증이다. 심지어 금융경제의 적정금리와 실물경제의 적정금리가 분리된 게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온다. 가령 지금의 인플레이션율에 대응하기 위한 실물경제의 금리수준이 5~6%라면, 금융시장에선 이런 수준의 고금리를 감당할 수 없다는 논리다. 이 또한 금융경제의 ‘바로미터’가 잘못 작동되고 있음을 실토하는 말인 셈이다. 급격한 금리인상이 가져올 투자감소와 실업, 채무 위기에 집중하기보다 금융시장의 유동성 공급에만 주목하게 된다면, 연준에 종속된 반쪽짜리 세상은 여전히 둘로 나뉜 채 헛돌 것이다. 실물경제의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목적으로 금융정책을 도모하는 것이 경제 교과서에 나온 교리지만, 이젠 사지선다 공무원 시험에나 나오는, 사문화된 이야기가 돼버렸다.


둘로 나뉜 세상

미국의 인플레이션율, 연준의 금리인상 대응, 이에 따라 동요되는 각국의 금융정책, 이렇게 이어지는 종속적 관계는 달러체제에 종속된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숙제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는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연준과 상대적으로 다른 어떠한 자주적인 대응조치도 취할 수 없는 것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한국이 달러체제에 편승해 국제 무역 질서에서 엄청난 편익을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북한이 두려워 한미동맹 강화를 외치는 게 아니다. 미국이 만들어 놓은 세계 질서의 품에 찰떡같이 안겨야 무역으로 인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없이 못 산다는 걸 계속 설파한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 위기 이후 십여 년 동안 세상은 점점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트럼프 정권부터 촉발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해가 갈수록 더욱 험난한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갈라진 두 개의 선택지에서 미국을 확실하게 선택하길 종용받고 있다. 한국은행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만 미국의 연준으로부터는 독립적이지 않다는 한국은행장의 말은 달러체제에 종속된 한국의 상황을 매우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이 만들 반쪽짜리 세상에선 우리의 이익도 반쪽, 아니 이보다 더 작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중국과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누리고 있는 한국이 중국을 배제한 미국의 질서 속에서 과연 같은 편익을 누릴 수 있을지 많은 물음표가 찍힌다.

과거 미국은 신자유주의 지배질서에서 중국을 하위파트너로 삼아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게 하고, 전 지구적 공급망 사슬에 종속시킨 미국은 달러체제를 더욱 굳건히 만들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는 이 체제에 심각한 균열을 낳았다. 그리고 더 이상 하위파트너가 아닌 지역의 패권자로서 G2로 인정받으려는 중국과 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고집하는 미국이 경제적 영역을 넘어 군사안보적 수준에서 대립하게 됐다. 특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점점 쇠퇴하면서 중국으로의 종속을 더욱 키웠다. 사우디와 중국이 석유거래에서 위안화 결제체제를 만든 사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달러체제의 근간이 석유거래를 위한 달러 결제망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제 둘로 나뉠 세상에서 달러의 위상은 점점 낮아질 것이다.

이미 몇 가지 징후를 볼 수 있다. 러시아에 대한 ‘SWIFT(국제자금결제망)’ 퇴출은 러시아에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은 맞지만,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국가들이 여전히 러시아와 결제시스템을 유지하면서 미국 지배에서 벗어난 교역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여기에 달러체제에서 탈출하고 싶은 중국이 포함돼 있다. 미국의 금리인상이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주고 있지만, 중국은 다르다. 다른 나라와 달리 중국은 코로나로 인한 경기침체를 막고자 오히려 완화적인 금융정책을 취하고 있다. 중국의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면, 수요 폭발로 인플레이션에 다시 불이 붙을 수 있다는 전망은 미국발 긴축으로 인한 경기침체 전망과는 사뭇 다르다. 도대체 수요감축과 수요폭발이 동시에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어떻게 가능한가. 어쩌면 우리는 과거 연준이 지배했던 세상이 지금 둘로 나눠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석열 정부에 한마디

재정긴축 철회. 이처럼 세상이 급변하고 있는데, 아직도 사문화된 경제교리에 얽매여 재정긴축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다. 한국은행은 연준에 종속돼 있지만, 한국 정부마저 연준에 종속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긴축적인 통화정책의 후유증을 재정정책으로 치유해야 한다. 몇몇 TV 정치 패널들이 돈을 조여야 하는 중앙은행의 정책을 거슬러 재정확대 정책을 취하면 인플레이션 대응에 효과적이지 않다고 하는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경제위기의 우선 타깃이 과연 인플레이션인지 되물어봐야 한다. 정부가 지원금을 많이 나눠줘서 인플레이션이 온 것인가? 아니다. 문제는 예기치 못한 전쟁, 미국발 인플레이션, 그리고 이에 대응한 연준의 금리인상 충격이다. 외부적 요인에서 전염된 위기이다. 만약 재정긴축적인 기조가 유지된다면 이후 후유증을 치료하는데 훨씬 큰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더구나 위기로 인한 대중의 불만이 쌓이는 상황에서, 특정 세력을 원흉으로 몰아 위기 상황을 관리하려는 안일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 자신을 싫어하는 국민을 적으로 몰고 “국가 대개조”를 외쳤던 박근혜 정부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나 떠올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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