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노동만큼 문제인 ‘불규칙 노동’…예측 가능성 고려돼야

평균만큼 일해도 갑자기 투입되는 장시간 노동, 주말 노동 등 건강에 악영향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에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장시간 노동뿐 아니라 불규칙한 노동시간이 문제라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노동시간 개편은 노동시간 산출 단위를 현재의 주 단위에서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바꾸기 위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노동시간의 산출단위를 평균화하는 제도로, 노동시간 제도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예측 가능성을 훼손한다는 맹점을 갖고 있다. 큰 단위에서 보면 평균적인 노동시간으로 맞춰지지만, 장시간 노동과 과밀한 노동강도, 야간노동 등을 야기한다. 예측 불가능한 노동은 일-생활의 균형을 망칠 뿐 아니라 과로사 위험을 높이고 불안장애를 키운다는 연구결과도 제시되고 있다.

불규칙한 노동시간 문제를 겪고 있는 곳으로는 크런치모드로 유명한 IT 업계가 대표적이다. 인터넷 강의 기업 에스티유니타스에서 직장내괴롭힘과 과로로 지난 2018년 1월 극단적 선택을 한 장민순 씨는 과로사 판단 기준을 웃도는 노동 시간만큼 일할 수 있었다. IT 업계인만큼 포괄임금제가 적용됐다. 입사 첫해인 2015년과 이듬해인 2016년 체결한 근로계약서엔 월 연장근로 69시간과 야간근로시간 29시간이 가능하다고 명시돼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은 과로사 산재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질병 발병 전 12주간의 평균 업무시간이 52시간을 초과했는지 살핀다.


지난 28일 ‘노동자 건강을 위협하는 근로시간 개편안’을 주제로 유가족과 전문가가 참가한 기자간담회에서 고 장민순 씨의 언니 장향미 씨는 “추가근무수당을 명확하게 집계할 수 있는 직업군임에도 포괄임금제를 남용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며 “노조의 출현과 여론의 비판 속에서 (유명 IT 대기업들은) 지난 2018년 자체적으로 포괄임금제를 폐지했지만 이는 일부 대기업의 사례일 뿐, 여전히 대다수의 IT기업에서는 포괄임금제를 남용하고 있고 그곳에서 일하는 수많은 직장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과로와 공짜 야근에 시달리고 있다”라고 밝혔다.

장향미 씨는 현직 IT 업계 노동자로서, 불규칙한 노동시간에 대한 폐해는 연구논문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직접 경험으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장 씨는 “IT업계에서 프로젝트 론칭이 임박한 시점에 몰아치듯 야근과 철야가 반복되는 연장근로가 이루어지는 기간이 있는데,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3개월 넘게 지속되기도 한다”라며 크런치 모드가 아직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장향미 씨는 "현재도 연장근로시간 제한이 잘 지켜지지 않고 과로사가 속출하는데, 연장근로시간 제한을 더 늘리는 것이 어떻게 노동자의 휴식권을 보장하는 해법이 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라며 “근로시간 개편안 도입을 논하기 전에 오랫동안 기업들이 악용해 온 포괄임금제를 전면 폐지하여 공짜 야근 관행을 먼저 뿌리 뽑아야 한다”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불규칙한 노동시간, 뇌심혈관질환 45% 높여…불안장애도 심화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이자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장인 김형렬 교수는 불규칙한 노동시간이 노동자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문가 입장에서 설명했다.

김 교수는 평균 노동시간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노동시간이 갑자기 증가하거나 불규칙한 노동을 하는 이들에게서 심혈관계질환들이 늘어났다는 2017년의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연구는 한국에서 산재가 승인된 1,042명을 대상으로 발병 전 1~7일(위험기간)의 노동시간과 발병 전 8~30일(대조기간)의 노동시간을 비교했다. 비교 결과, 주당 노동시간이 대조기간에 비해 10시간 늘어날 때 뇌심혈관질환 위험은 45%가량 증가했다.

불규칙한 노동시간은 불안장애 심화로도 이어졌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일 단위, 주 단위로 불규칙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장시간 노동을 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불규칙 노동만으로 불안장애가 심화됐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노동시간이 동일하더라도 한 달에 4일 이상 주말 근무를 한 경우, 남자는 45%, 여성은 36% 우울 증상이 증가했다. 주말 근무가 많을수록 노동자들은 더 우울해졌다. 김 교수는 “기존의 많은 연구들은 노동시간의 길이에 대해서 다뤘지만, 최근 우리는 노동시간의 불규칙성에 주목하고 있다”라며 “일의 강도, 노동이 수행되는 시간대 등을 주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라고 제언했다.

더불어 김 교수는 민주당이 정부 노동시간 개편안을 비판하며 사수하겠다는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해 잘못 쓰이고 있는 용어라고 짚었다. “주 52시간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며 “민주당도 불규칙한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러면서 법정 노동 시간은 주 40시간이고, 당사자 합의로 주 12시간을 연장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자며 ‘주 52시간 상한제’ 용어 사용을 촉구했다.

노동시간 결정할 수 있다는 스타벅스 바리스타…
그런데 스케줄 작성은 100% 점장 권한?


이날 기자간담회에선 스타벅스의 바리스타도 불규칙한 일정을 소화하는 직군으로 소개됐다. 스타벅스는 바리스타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며 ‘사원의 업무 능률 향상과 여유 있는 사회생활 기회증대를 위하여’ ‘시업 및 종업시각을 사원이 결정할 수 있도록’ 취업 규칙을 통해 명시하고 있다. 노동자 스스로 노동시간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날 소개된 사례에 따르면 바리스타의 스케줄 작성 권한이 100% 점장에게 있는 등 실제로 노동자가 시간주권을 갖기엔 힘든 조건이었다.


한 바리스타의 근무일정을 보면 주말 모두 출근해 일을 했고, 토요일 오후 4시에 출근했다가 저녁 10시 30분에 퇴근한 후 다음 날 오전 9시 30분에 출근하는 일정도 있었다. 근무시간과 근무요일은 매주 바뀌어 생활리듬이 현저히 불규칙하리라는 것이 예측됐다.

쿠팡 대책위원회 대표이기도 한 권영국 변호사는 “노사 간 교섭력의 대등성이 존재하지 않는 조건에서 근로시간에 대한 근로자 개인의 선택권이란 그저 종이 위의 장식품일 뿐”이라며 “현재 노동조합 조직률은 14%이고, 미조직 노동자들의 비율은 86%에 이른다. 근로자의 근로시간에 대한 선택권은 자주적인 노동조합이 존재하고 교섭력의 대등성이 확보되었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권 변호사는 노사 대등성 확보를 위해 근로자대표제를 정비하겠다는 정부의 설명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노동조합이 없는 회사의 근로자대표가 회사의 일방적인 방침에 제동을 걸고 근로시간에 대한 선택권을 확보한 전례가 있는지 묻고 싶다”라고 따져 물었다. 이어 “정부의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의 실체는 근로자의 선택에 따라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쉬자는 안이 아니다”라며 “사용자가 필요할 때 몰아서 일을 시킬 수 있도록 사용자에게 근로시간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하겠다는 것”이라고 정부 근로시간 개편안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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