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속내를 폭로하고 만 ‘부패공화국 대한민국’


2000년 10월 정현준 KDL 사장과 이경자 동방금고 부회장이 동방금고로부터 2,239억원을 불법대출하고 횡령하는 등 투자자를 상대로 사기행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치인과 금융감독원, 검찰간부 등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정현준 게이트.

그 뒤를 이어 11월 MCI 코리아 진승현 부회장이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열린금고와 한스종금, 리젠트종금 등에서 2,300억원을 불법대출받고 리젠트증권 주가를 조작한 것과 관련해 비자금 조성 및 정?관계 로비 의혹이 제기된 진승현 게이트.

두 사건 모두 의혹에 대해 검찰이 제대로 밝혀내지도 못한 채 미궁으로 빠져드는 듯 했으나, 작년 9월에 터진 이용호 게이트, 뒤이어 11월에 윤태식 게이트가 터지면서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청와대, 검찰, 국정원, 금감원 등 권력실세와 정부기관이 숨어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검찰총장 사퇴까지 몰고간 이용호 게이트

98년 이후 인터피온, 레이디, 스마텔 등 상장회사 6개를 인수한 놀라운 약진, “바다에 묻힌 보물선 인양을 추진하겠다”며 국민을 상대로 희대의 사기극을 벌이며 작년 초부터 6월까지 무려 27회나 상한가를 기록한 주가조작, 검찰로부터 39번이나 입건되었으나 단한차례도 구속되지 않은 불사신.

작년 9월 주가조작과 횡령 혐의로 구속된 이용호 G&G 회장이 위기 때마다 구속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검찰 수뇌부에 미리 손을 써둔 덕이었다.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을 지낸 ‘옷로비 사건’의 주인공 김태정 변호사는 이씨 사건과 관련, “잘 검토해달라”며 검찰에 전화한 사실을 시인했다. 본인은 절대로 선처를 부탁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검찰총장까지 지낸 사람의 부탁을 어떤 검사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는 이씨로부터 1억원을 받은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용호 씨는 신승남 검찰총장의 동생 신승환 씨에게 스카우트 비용조로 6,666만원을 주고 계열사 사장 자리까지 주며 금감원에 로비를 부탁했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결국 지난해 11월 30일 차정일 특별검사팀에 이용호 게이트 수사가 맡겨졌다.

차정일 특검 팀은 계좌추적을 통해 신씨의 범죄행위 윤곽을 잡았고, 대검 중수부가 무혐의 처분한 신씨를 전격 구속했다. “특검이 아니라 특검 할아버지가 와도 더 나올 게 없다”며 자신만만했던 검찰의 위신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이씨 수사의 실무 총책임자였던 임휘윤 당시 서울지검장 등 3명의 검찰간부가 사건은폐 축소 혐의로 조사를 받은 후 사표를 냈고, 검찰 최고 총수인 신승남 검찰총장이 불명예 퇴진했다. 전현직 검찰총장에까지 손을 뻗친 대담한 로비의 결과였다.

아내 죽인 살해범이 벤처업계 영웅으로

87년 ‘수지김 사건’이 당시 수지김의 남편 윤태식 씨의 자작극이라는 점이 밝혀졌을 때만 해도 이 사건은 군사독재시절 안기부가 저지른 추악한 범죄 중 하나로만 알려졌지 윤태식 게이트라는 더 커다란 권력형 비리가 숨어있는지 예상하지 못했다.

이미 수지김 사건 재수사 중단 및 은폐 혐의로 이무영 전 경찰청장과 김승일 국정원 대공수사국장 등 경찰과 국정원의 최고위 책임자들이 구속된 것만으로도 폭풍을 몰고 온 이 사건은, 윤씨가 정관계 핵심인물들에게 자신이 차린 회사인 ‘패스21’의 주식과 전환사채로 엄청난 로비를 벌인 것이 드러나면서 일파만파로 커지기 시작했다.

윤씨를 감시하던 국정원 직원은 패스21의 자회사인 ‘바이오패스’ 이사가 되었고, 그를 내사한 경찰간부 2명은 주당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주식 1,000주 이상을 뇌물로 챙겼다. ‘한국 벤처기술의 대가’라며 패스21과 관련한 사설까지 써준 서울경제신문사 김영렬 전 사장이 이 회사의 대주주임이 밝혀져 사법처리대상에 올랐으며, 10여명의 언론사 간부들이 패스21에 우호적인 기사를 써주는 대가로 수억원어치 주식을 공짜로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수많은 공무원들이 패스21 차명주주 리스트에 올랐고 청와대·국정원의 은폐와 후원 속에 윤씨는 청와대 경호시설 납품을 위해 직접 김대중 대통령을 면담하기도 했다. 뇌물을 먹은 언론인 덕에 패스21 주가는 천정부지로 솟아올랐고, 그 주식으로 더 많은 로비를 벌인 덕분이다.

범법자 처벌하는 기관이 더 큰 범죄 저질러
“진정한 무사(武士)는 얼어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
동생의 구속으로 불명예 퇴임한 신승남 총장 후임으로 임명된 이명재 신임 검찰총장의 취임사 중 한대목이다.

그러나 비리를 저지른 범법자들은 얼어죽을 위기에 처한 노동자 서민이 아니라 권력 실세들이거나 범법자 처벌의 임무를 지닌 국가기관이었으며, 그들이 쬔 불은 곁불이 아니라 ‘일확천금의 대박’이었다.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조합원을 대표해 싸웠던 현장 활동가들, 강제철거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철거민들, 쌀값보장을 외치며 도로에서 쌀가마를 태우던 농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감옥에 갇혀 있거나 국가기관들의 검거대상이 되어 쫓기고 있다.

각종 비리와 게이트로 2001년을 보낸 지금, 이 땅 부패공화국에 살고 있는 민중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파헤치고 파헤쳐도 끝없이 드러나는 권력층의 부패상

여권 실세 개입설이 나돌며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던 정현준 게이트는 당시 동방금고측으로부터 금감원 로비 창구 역할을 하면서 10억원을 받는 등 로비 핵심으로 지목된 장래찬 금감원 전 국장이 도피 1주일만에 자살함에 따라, 검찰은 죽은 장 국장이 돈을 모두 챙겼다는 식으로 서둘러 사건을 종결했다.

그러나 이용호 씨의 보물선 인양사업 개입의혹을 샀던 김형윤 국정원 전 경제단장이 정현준 씨 동업자인 이경자 씨로부터 5,5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자 이용호 게이트는 베일에 묻혔던 정현준 게이트를 다시 불러냈다. 게다가 검찰은 애초에 정현준 게이트 수사 당시 김형윤 씨의 뇌물수수혐의를 포착하고도 그냥 덮어놓은 것으로 드러났다.

진승현 게이트 당시 수억의 뇌물을 챙긴 혐의로 구속된 국정원 정성홍 전 경제과장이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의원에게 로비를 벌이려 한 혐의가 언론에 의해 새롭게 드러나자 검찰은 마무리된 진씨 사건 ‘재수사’에 나섰으며, 돈을 받고 검찰과 금감원에 진씨 구명로비를 벌인 국정원의 국내문제 총괄책임자인 김은성 2차장을 지난해 말 구속기소했다.

이 과정에서 작년 정현준 게이트 수사 당시 김은성 2차장이 이경자 씨로부터 1,000만원을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검찰이 수사를 종결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김 차장은 정현준-진승현 게이트 모두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김영재 전 금감원 부원장보가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 모두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국정원과 금감원 최고위 인사들이 각종 게이트에 연루되었는데도 검찰은 수사의지가 없었고 서둘러 사건을 종결했다가 재수사와 특검 팀 수사로 하나씩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신승남 총장 동생이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되자 검찰은 총장 지휘를 받지 않는 ‘특별감찰본부’라는 사상 초유의 기관을 신설해 수사했지만 결국 ‘부실수사’라는 판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특별감찰본부를 맡아달라는 제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다”며 거절하고 최근 검찰을 떠난 심재륜 고검장의 말처럼, 권력층의 부패상은 파헤쳐도 파헤쳐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밝힌 ‘특별수사검찰청’이 생기면 이 끝없는 부패상을 모두 밝혀낼 수 있을까. 대통령 아들까지 로비대상으로 삼는 마당에 대통령과 기존 검찰의 말을 믿어줄 국민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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