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의 투쟁으로 민영화를 저지할 수 있을까? 강고한 38일 파업투쟁의 과정에서 발전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물귀신처럼 물고늘어진 질문이다. 그러나 답은 저 멀리 페루의 남쪽에서 들려왔다. 저지할 수 있다! 페루 노동자-민중의 강력한 투쟁은 난공불락의 민영화 공세를 저지시켰다.
집요한 민영화 공세- 부패와 기만
일주일에 걸친 페루 남부지역의 반민영화 대중봉기의 굳건한 기세에 눌려, 최초의 원주민 출신 톨레도 정부는 2개의 전력회사(Egasa와 Egesur) 민영화계획을 철회하고, 투쟁의 중심지인 아레키파 주민들에게 사과성명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투쟁은 지난 6월13일 두 전력사에 대한 민영화 입찰 전날 폭발했다. 아레키파의 시장마저 민영화에 반대했음에도 중앙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민영화를 강행하려 했기 때문이다. 반민영화투쟁은 오랫동안 진행돼 왔다. 6월14일 열린 집회에는 2만 여 명이 모여, 경찰과 격렬히 충돌했다.
톨레도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전력민영화를 추진하지 않는다는 지역 노조연맹과의 합의서에 서명했고, 그 결과 이 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대통령이 된 톨레도의 민영화공세는 명백한 배신이었다. 민영화계획에는 20% 인력감축이 포함돼 있었으며, 나머지 80%에 대해서도 어떤 고용보장도 없었다. 즉 민영화는 수천 명의 실직과 전력 사용료 인상, 부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대 후지모리 독재정권 하에서 IMF와의 합의에 따라 추진된 대규모 민영화로 막대한 수입을 챙기게 된 정부는 상당한 액수를 외채상환과 무기수입에 탕진했다. 그 결과 민중에게는 어떤 혜택도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민영화에 대한 대중적 저항에 부딪혀, 대부분의 입찰자들이 탈락한 가운데 프랑스의 초국적 자본(Suez Lyonaise des Eaux) 자회사인 트락테벨(Tractebel)사 만이 단독입찰하게 됐다. 이 회사는 최저입찰가를 실평가액인 34억 달러의 절반수준인 17.7억 달러로 제시하여, 이미 정부와 사전 합의가 있지 않았냐는 의혹과 분노를 낳았다. 특히 수에즈사와 트락테벨은 세계은행과 IMF의 민영화압력 아래 카자흐스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오만, 칠레, 브라질 등에서 계약성사를 위해 매수와 뇌물 쓰기로 악명 높다. 페루에서도 독재자 후지모리에게 1천만 코이마의 뇌물을 건넨 의혹을 받고 있어서, 페루 민중의 분노는 더욱더 폭발적이었다.
대중봉기와 그 확산
페루 제2의 도시 아레키파에서 시작된 투쟁은 격렬한 양상을 띄었다.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세워졌고, 민영화된 은행과 정부청사들이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경찰은 최루탄으로 시위대를 해산하려 했지만, 거리의 대중은 파이프와 돌, 병으로 무장한 채 도시의 중앙광장을 장악했다. 시위대는 "아레키파에 혁명을!" "우리는 새 대통령을 원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경찰과의 충돌은 주말 동안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100여명이 부상당하고 52명이 체포됐다. 그리고 한 대학생이 최루탄에 얼굴을 맞아 사망했다.
이제 상황은 정부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났다. 아레키파 시장은 예비군에게 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마침내, 일요일인 6월16일 톨레도 대통령은 아레키파 지역에 1개월 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약 700명의 군대와 1,000명의 경찰을 투입했다.
일요일 충돌은 공항 쪽으로 확산됐다. 수백 명의 노동자, 농민, 학생의 대오에 지역 빈민들이 결합하여 공항을 뚫고 들어가 활주로를 파괴했다. 군대가 공항을 탈환하는 데는 3시간 이상이 걸렸다.
비상사태 선언은 사태를 확산시켰다. 월요일, 아레키파 시민전선이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투쟁은 인근의 타크나, 쿠스코, 푸나, 모케구아 지역으로 확산됐다. 이들 지역 역시 톨레도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영화반대투쟁을 위해 만들어졌던 다양한 연대조직들이 투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 연대조직들에는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노동조합, 농민, 학생, 여성조직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시위와 공공관서 타격, 도로봉쇄 등의 투쟁을 조직했다. 격렬한 시가전은 무차별적 약탈이 아니라, 아레키파에서의 야만적 탄압에 대한 분노로 공공기관과 민영화된 은행과 기업에 대한 조직적 타격이었다. 이 투쟁에는 여성과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한편 아레키파에서는 비상계엄과 통금에도 불구하고 투쟁이 계속됐다. 주민들은 매일 3차례 대규모로 거리에 나와 아르헨티나 봉기에서 등장한 전술인 양철냄비 두드리기(caserolazo)를 따라 시위를 벌였다. 투쟁의 지도부는 무기한 총파업의 성공을 위해 모든 지역에서 투쟁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호소하고, 새로운 경영진의 전력회사 진입을 육탄으로 저지하겠다는 결의를 선포했다.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톨레도 정부측은 "인간의 얼굴을 한 민영화" 논리를 내세우며 후지모리 정권이 했던 민영화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트락벨사가 고용보장, 추가투자 및 신규고용 창출을 약속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6월19일, 정부측은 고위급 대표단을 아레키파에 파견했지만, 그들의 버스는 돌세례를 받았다. 이 날 여러 도시에서 아레키파에서 숨진 학생을 애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아레키파에서는 장례식이 치러졌다. 인근 타크나에서는 공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수천명의 노동자-농민들이 경찰과 충돌했다. 총파업은 여전히 남부 전역에서 강고하게 사수되었고, 교통과 교육, 산업활동과 상거래 모두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제 봉기는 더 많은 대중성과 정치성을 획득했다. 이제 투쟁은 민영화 저지가 아니라, 민영화의 백지화, 작년의 지진피해 기금 추가지급, 정부경제정책의 전면거부로 발전했다.
마침내 투쟁의 승리!
그러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6월20일, 마침내 톨레도 정부는 항복의 깃발을 내걸었다. 군대의 투입으로도 막을 수 없는 대중봉기와 그것의 전국적 총파업으로의 발전에 직면하여 정부는 아레키파 전선과 합의하고 '아레키파 선언'에 서명했다. 선언은 민영화추진 중지, 정부의 대국민사과 그리고 48시간 이내 계엄사태 해제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내무부 및 법무부 장관, 민영화 추진단장이 사임했다. 그러나 이번 투쟁으로 톨레도 정권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 민영화와 긴축을 포함한 신자유주의 노선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투쟁도 지속되고 있다.
이번 아레키파 투쟁의 승리는 페루의 다른 지역으로 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다. 아레키파에서는 2만 명이 모인 가운데 승리를 기념하는 대중집회가 열렸고, 주변도시에서도 아레키파의 승리가 민영화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인 투쟁 결의를 다지고 있다. 수천 명이 참석한 대중집회에서는 정부와의 직접협상 요구를 내걸고 정부측을 압박하고 있다.
이번 아레키파의 반민영화봉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난 20여 년 간의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후퇴와 양보를 강요당했던 노동자-민중운동의 저항과 투쟁 속에서 일어났다. 아르헨티나의 민중봉기, 파라과이의 반민영화 투쟁, 베네수엘라의 반쿠데타 투쟁, 볼리비아의 대중투쟁과 우루과이의 총파업 등 최근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고양되고 있는 노동자-민중투쟁의 맥락에서, 또 하나의 찬란한 승리의 이정표를 남긴 것이다.
아레키파 봉기는 자발적 투쟁위원회의 구성, 국가의 권위에 대한 전면적 부정, 대중집회를 통한 투쟁방식 결의, 군과 경찰에 대한 무력투쟁, 투쟁과 운동의 전국적 확산 등 대중투쟁의 혁명적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레키파 투쟁이 증명한 가장 중요한 점은 신자유주의적 공세의 핵심축인 민영화를 대중투쟁으로 저지시켰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