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포럼 그 이후 : 열린 공간과 운동에 관한 논쟁

[WSF특별기획]WSF 평가글, 세계 민주화를 위한 네트워크 연구소


몇몇 지식인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사회포럼(WSF)은 지난 5년 간 참가 단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만큼 정세적, 정치 행동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어난 참가자들의 수만큼, WSF의 실천이 이어지지는 못했고, 이에 WSF의 한계를 지적하는 참가단위들이 생겨났다.

이 글은 5회 WSF 이후 사회포럼 공식 홈페이지에 발표된 글이고, 필자들은 WSF를 둘러싼 논쟁들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WSF가 단순히 운동을 소통하고 교류하는 열린 공간의 의미를 넘어 자체가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 나아가 전세계 좌파, 진보 정당들을 아우를 수 있는 세계정치의 나아가야 한다고까지 생각을 확장하고 있다. 그리고 1년의 주기성에 대한 문제와 WSF의 탄생지였던 브라질을 떠나 세계운동으로 확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열린공간이냐 운동으로의 운동이냐의 주장에는 '누구도 지배하려 해서 안되고, 수평적이어야 한다’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의견을 모아야 하고 행동으로 나가야하고 WSF능동적인 운동의 주체, 자체로써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나뉜다. 또한 이는 WSF의 나아갈 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글의 주요 내용들은 WSF 국제위원회(IC)에서 쟁점으로 토론이 됐었고, 국내 참가단 평가 토론회에서도 제기됐던 문제들이기도 하다. WSF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 WSF의, 국제연대 운동의 미래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소개한다.



들어가며


운동은 오직 공간(space)에서 일어나고, 개최될 수 있다. 비판적 사회운동을 위해 전지구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시도는 2001년부터 브라질 포르트알레그에서 매년 진행 돼 왔고, 2004년 1월에는 인도 뭄바이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WSF)이다. 그리고 WSF는 오는 2006년 주요 행사들은 각 대륙으로 분산 되고, 2007년에는 아프리카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런 과정은 지금까지 포르트알레그레의 도시와 강력히 연계됐던 특성들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함축적으로 포괄하고 있다. 사실 이 행사는 세계경제포럼 (WEF)에 대한 대항회의로 조직돼,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WEF와 상호 연계된 시도보다는 더 각별한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WSF의 과정은 사회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그것의 가능성에 기인한 다양하고 회의적인 의견들을 넘어, 열정의 총체로써 성장해 왔다.

WSF의 가장 잘 알려진 슬로건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이다. 언뜻 보기에 간단 명료하고 모호한 이 관용구는 정반대의 의미를 포함했던 마가렛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슬로건에 맞선 저항의 의미를 담은, 패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포럼이 5년에 걸쳐 매년 진행되어 온 과정에서 단순하게 반복되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참가자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WSF의 옵저버들은 요구하기 시작했다. 다른 세계라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이 무엇이냐고.

지금까지 WSF 과정은 그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무능력이 종종 WSF의 한계선이라고 지적받는 동안에도 WSF 초동 제안자들의 몇몇은 WSF는 최소한 하나로 통일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며 그 질문에 대한 어떠한 명백한 답을 주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WSF는 그 원리헌장에 따르면 '세계사회포럼은 세계 모든 나라의 시민사회 단체와 운동들을 모아내고 상호연계를 구축'하는 하나의 공간이다. 헌장은 브라질 조직위원회에서 초안 작성을 하고 2001년 6월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개최된 WSF 국제위원회 (IC)에서 수정, 완성됐다. 비록 때때로 원리헌장의 권위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지라도 WSF 과정(process)은 유사한 합법성을 취득했다.

간혹 토론 속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만, 헌장의 조항 6과 연계된 문제제기들을 살펴보면,


‘세계사회포럼에서 열리는 각종 회의는 기구로서의 세계사회포럼을 대변하면서 개최되지 않는다. 그럼으로, 어떠한 형태의 포럼을 대변하여 그 어느 누구도 모든 참가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며 입장을 표명할 권리가 없다. 포럼 참가자들은 모든 또는 일부 참가자들이 하나의 기구로서 포럼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선언 또는 행동 제안에 대해, 투표 방식으로든 갈채 방식으로든 하나의 기구로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포럼은 회의 참가자들이 서로 쟁취해야 할 권력의 중심(locus of power)을 구성하지 않으며, 이것이 참가 단체와 운동들의 상호연계나 행동의 유일한 선택의 여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이런 경우의 대표적인 예는, WSF는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도 결코 반대 선언문을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Chico Whitaker와 같은 WSF의 초동멤버들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에 반대하는 이런 선언서를 만드는 것은 WSF의 원리헌장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 논쟁은 특히 2003년 1월 포르트알레그레, WSF의 국제위원회(IC)에서 제기되 쟁점이 됐었다. 그러나 어떠한 선언도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

여기에 남는 의문은 어떤 누가 전쟁에 반대하고 찬성하는가에 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WSF가 소문난 대로 '공간(Space)'에 대한 개념만을 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 반전 성명의 경우도 사회포럼 내 반전총회의 성명일 뿐 실제 공식적인 WSF의 성명은 아니었다]

많은 논쟁자들은 WSF에 대해 그리고 그것에 관련한 논쟁을 진행해왔다. WSF가 단순히 운동을 위한 공간이라거나 또는 WSF 그 자체가 일종의 운동이 될 수 있다는 것 어느 쪽 이던 간에.

그리고 WSF가 정치적 운동에서도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만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원하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다. 이런 생각은 세계화로 인한 전 과정에서 변화되는 것에 대항해 진정 정치적으로 차별적인 흐름의 운동이 만들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WSF의 공식적인 활동가들 선에서는 WSF와 부분과 영역 구성에 기여하면서 한정된 의미의 원리헌장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04 인도 사회포럼 장면 '다른세계는 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인도 뭄바이에서 개최된 2004 WSF는 사회포럼의 진행을, 의미를 좀더 세계적(world)으로 확장해 냈다. 사실, 뭄바이에서 개최된 사회포럼은 2가지 측면에서의 뚜렷한 의미가 있다. 첫째로는 많은 참가자들은 발생지였던 포르트알레그레와는 차별적으로 다른 아시아, 인도 뭄바이의 특징을 접했다. 이전 세번의 포럼은, 라틴아메리카인들과 유럽인들이 정황 상 우위를 차지했으나, 인도로 이동함에 따라 상징적으로는 전 세계를 향한 ‘공간 확장’의 의미를 갖게 됐다.

두 번째로 이번 회의에는 상징적으로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벗어난 특권계급이 없는 사람들과 그 외 외곽의 그룹 구성원들이 참가했었다. 영어로 진행된 토론회와 발제자, 워크샵을 제외하면 학문적인 지식인들과 NGO단체들은 오히려 비주류에 속했다. (동시통역 설비도 포르트알레그레에서 만큼 활용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다.)

2005년 WSF는 다시 포르트알레그레로 돌아왔다. WSF의 국제위원회(IC)가 2003년 1월 04년 뭄바이 회의 개최를 결정했을 때, 동시에 2005년 포럼은 다시 포르트알레그레에서 개최도 함께 결정했었다. 사실, 인도 개최이후 브라질로 돌아간다는 약속이 없었다면 인도 개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란 어쩌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주장을 한 사람들은 인도 포럼 조직화가 총체적으로 실패한다면 뭄바이의 실패를 재정적으로 충당해야 할 문제들이 생기고, 이는 해를 이어 브라질 포르트알레그레에서 충당해야 한다는 것을 고려했었다. WSF 연례행사가 브라질이 아닌 다른 대륙으로 이동했다는 것의 의미는 브라질 조직위원회가 지원해왔던 그 자체의 관례적 경험을 넘어 WSF가 지속 가능하기 위한 '차별화 선언'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엄청난 수의 전세계 활동가들의 만남에서의 쟁점은 무엇일까? 뭄바이에서는 많은 수의 토론회가 개최됐다. WSF 공간은 단순히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더욱 열린 공간 일 수 있는지 아닌지 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의 조직으로 변하게 하거나 어떻게 하던 변화를 옮겨 공통의 정치적인 형태로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토론이 되어졌다.

이와 같은 가능성에 대안이 있을까? 어떻게 해야만 정치적 성향을 지닌 조직체로 전세계에서 조직 될 수 있을까? WSF가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새로운 형태로 또는 정치 정당의 새로운 협정으로 한발씩 진전해 나가고 있나? 또는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공간으로 남아야만 하나?


사회운동 총회


원리헌장 위헌 여부에 대한 논쟁을 벗어나, 정치적 침묵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은 WSF에 참가한 조직 단위들이 정치적 선언을 할 수 있도록 그 과정을 돕는 것이다. 다른 유형의 정치적 실천과 그런 정치적 선언을 위해 규정된 제한을 뛰어넘었던 가장 중요한 시도는 매년 WSF 행사장에서 개최돼온 사회운동총회이다.

참가조직들의 대부분은 그와 같은 선언에 연서했고, 그들은 정치적 힘을 결집하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WSF 행사 기간 동안, 선언으로 생산된 사회운동 선언은 광범위하게 소통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WSF의 초동 주체들 간에 논쟁을 불러왔다.

비록 이와 같은 선언이 전체적인 WSF의 공식 선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WSF를 대표하게 됐고, 다른 사람들 그리고 WSF의 초동멤버중 핵심인 Chico Whitaker은 이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Whitaker은 미디어는 이런 선언들이 일정정도는 WSF의 공식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할 것을 우려했다. 이것은 누가 선언을 발표와 관계 됐느냐에 대한 정치적 논쟁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치적 논쟁들이 이끌어졌다. 2005년 포르트알레그레 WSF에서는 19명의 지식인들에 의해 서명된 '성명서'가 채택됐다. 이것은 Ignacio Ramonet을 포함해 Immanuel Wallerstein, Samir Amin, Bernard Cassen 그리고 대부분의 나이가 지긋한 남성들이 비슷하게 관계되었다.

[각주 : 이 선언의 주요내용은 다른 계화 운동들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부채탕감, 국제적인 금융 거래에서의 세금 부과, 비과세지역의 해체, 무역의 공정함의 증진, 그들 시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생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책적인 식량 공급까지 국가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 여성과 소수자들에 차별대우를 반대하고 것 등 일반적 내용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관련 페이지 http://opendemocracy.typepad.com/wsf/2005/02/previous_posts_.html (23.2.2005). ]

Whitaker은 WSF를 ‘순수한 공간’론을 옹호하며, 사회활동가 총회의 활동가들이 WSF 방법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가장 큰 목소리로 주장해 왔다. Whitaker에 따르면 사회운동 총회 배후에 있는 단위들은 인도 뭄바이에서 '그들의 대담한 일격'을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이슈는 인도조직위원회가 인도의 WSF 폐막식에서 사회운동총회의의 선언서 낭독을 배치했는데, 결과적으로 몇몇 미디어가 사회운동단위들의 요구를 WSF의 주요한 공동 선언 처럼 보도했고, Whitaker은 그것이 WSF의 창립 정신과 방법에 맞지 않다고 주장 한 것이다.

이 논쟁은 Agence France Press가 사회운동가들의 선언에 관한 보도를 한 캐이블 뉴스에서 보도함으로써 논쟁이 촉발됐다. 이어 뭄바이에서 진행된 국제위원회(IC) 회의에서 Whitaker는 'IC가 사회운동총회의 선언에 대해 WSF의 공식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결정해 발표할 것을 원했지만, 이후 긴 토론이 끝에 그런 선언이나 투표는 국제위원회(IC)에서 진행되지는 않았다.

'사회운동’단위들과 ‘비정부기구(NGO)’들 간에는 모호하지만, 구분선은 존재한다. NGO들은 종종 그와 같은 NGO들을 포함해 대중운동이 차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실천으로 이어질 때 작은 규모로 설립됐다. 때때로 분명하게 WSF에서의 정부 조직체들에 대한 논쟁이 제기될 때 그들과 구분되는 논쟁이 있다. 설령 'NGO 커뮤니티'는 구성원들에 반한다 하더라도 ‘운동’으로서 좀더 이슈를 선명히하는 성명과 정식화한 공통의 정치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한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이런 구분은 WSF 주요행사의 주기성에 대한 논쟁에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2004년 4월 4일부터 7일까지 이탈리아 Passignano에서 진행된 WSF의 국제위원회(IC)회의에서 브라질 조직위원회는 WSF의 세계회의를 집중시키며 매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2년에 격년으로 진행하는 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전세계 농민 연합단체인 비아깜페시나는 메인 WSF 행사를 3년에 한번씩 하자고 주장했다.

많은 사회운동 단체들이 주장하는 주요 내용 중 하나는 '매년 대대으로 세계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조직하는 것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투여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많은 사회단체들은 ‘WSF가 집중화 되지 않았을 때 사회운동단체들은 WEF에 대항하는 다른 행사를 개최해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그들의 근거는 만약 사회운동단체들이 매년 개최되는 포럼에 너무 많은 조직화의 에너지가 소모된다면 어떻게 그 공백을 채울 것인가에 대한 다른 조직화 방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Passignano에서 개최된 국제위원회(IC) 회의에서는 핵심적인 WSF 행사들에 대한 주기성의 문제 등 어떠한 결정도 결론을 내리기가 불가능했다. WSF 국제위원회(IC)는 05년 포르트알레그레를 결정했던 것 처럼, 2007년에는 아프리카 대륙 내 어느 곳에서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2006년 행사를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아직 내지 못한 상황이다. 이것도 결국 2005년 1월 국제위원회(IC) 회의에서 ‘06년 WSF는 분산 개최’ 하기로 결정됐다. 국제위원회에 의해 분산된 행사가 결정된 후보 중, 미주 대륙의 행사는 베네주엘라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비록 베네주엘라 개최가 의견일치를 통해 결정됐으나 전후관계에서의 WSF의 ‘자치권’ 제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있다. 05년 포르트알레그레 WSF에 참석한 휴고 차베츠도 행사 개최와 관련해 베네주엘라 정부가 직면한 부담감을 표현한 바 있었다.

  05 WSF 베네주엘라 차베츠가 연설한 장소의 당시 모습 [출처: 투기자본감시센터 홈페이지]



누구의 시민사회인가


WSF는 시민사회의 행사로써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그 존재를 어떻게 시민사회로 제한해 정의하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남는다. 만약 WSF가 WEF(세계경제회의)에 대한 대항회의라면 2004년 뭄바이에서의 저항은 대항회의에 대한 대항회의였다. 뭄바이 저항(Mumbai Resistance)은 ‘사실적인 제국주의 반대’라는 기조로 뭄바이 WSF 행사장 옆 광장에서 행사도 개최됐다. 뭄바이 저항을 조직했던 한 활동가는 WSF는 ‘모든 형태의 투쟁’에 대해 열려 있지 않다며 원리헌장의 룰에 관해 언급했다.무장 저항조직은 참여할 수 없다는 원리헌장 항목 9를 인용해. 사파티스타와 같은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단체들도 같은 맥락에서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

또한 같은 조항에는 'WSF에 정치정당의 대표자들도 참여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 조항은 인도의 주요한 공산당이 포럼 조직화를 위해 두드러진 활동을 하면서 쟁점으로 국제위원회(IC)에서 제기됐었다. 예를 들어 2003년 7월 마이에미 회의에서, 이 쟁점과 관련해 '정당들은 공식적으로 인도조직위원회 또는 뭄바이의 WSF와 연계된 다른 공식 조직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비록 이 같이 주장하는 조직들이 많아지거나, 정당 멤버쉽을 갖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지라도.

그러나 브라질 노동당은 WSF 진행 초기 시작 때 부터 관계가 있었다. 비록 그 정당이 다른 WSF의 공식적 조직이나 조직위원회에서 공식적인 역할을 않는다 할 지라도 노동당의 존재는 여러 방면에서 두드러져 왔었다. 노동당이 2002년 브라질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룰라 정권의 경제정책은 다수의 조직적인 지원자들에게서 등을 돌려 왔다.

2005년 WSF에서 룰라는 본인에게 비판적인 세력들에 직면해야 했다. 이유는 그가 포르트알레그레에서 직접적으로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으로 가기로 한 결정뿐만 아니라 그의 경제정책이 IMF 양보를 포함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룰라는 이와 같은 비판을 염두 해 몇 가지 국제적인 행보를 시도했다. 소위 ‘룰라-시라크’로 불린 브라질과 프랑스 대통령에 의해서 발의되고 칠레와 스페인의 대통령들 동참한 ‘빈곤과 기아에 대항한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지구적으로 빈곤에 대항한 투쟁과 관련한 조정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세금을 과세하자는 제안을 포함해, 기술적 그룹의 혁신적 재정 매커니즘 그룹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미 2004년 9월 말 경 뉴욕에서 개최된 총회(General Aeesmbly) 정상급 회의에서 새로운 지구적인 금융 메커니즘의 채택쪽으로 가닥을 잡았었다. 그들의 제안은 WSF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 됐다기 보다는 좀더 신자유주의적인 행태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WSF 참가자들 내에서 룰라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거세졌지만, 다른 정부, 정당들에 의한 진보 정치의 어떠한 가능성은 이렇게 배제 당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05년 WSF에서 베네주엘라의 현재 대통령인 휴고 차베츠는 때때로 룰라를 큰소리로 비판했던 그룹들에게 대중적으로 열성적인 연설을 하기도 했었다. WSF 시민 사회의 순수함은 원리헌장의 함축적인 의미와 몇 개의 선언서와 같이 명쾌하지 않다.

한줄기 거대한 도전이었던 WSF의 진행과정은 자본의 세계화 확산되는 세상에서 정치적으로 변혁적인 방법들은 찾는 다른 방법이었다. 한편으로, 전통적인 정당 정치학, 세상을 바꾸기 위한 충분하지는 않지만 권력(power)을 획득하기 위해 연동시켰던 것들에 대한 실천들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시민사회의 비정치화된 확산기류에 실망하게 된 활동가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측면이 있다.

21세기의 정치는 어떤 것일까? 전세계적인 규모의 전통적인 형태의 정치 정당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조직된 것 과 같은 정당을 제안하는 것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과 정치상의 작업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을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어서 간단하게 이런 과정에서 대한 구상을 나열해 본다.


인터네셔널, 세계 정당(global parties)들을 향해?


WSF는 기간의 라틴 정서, 토론, 논의의 장소로 독창적인 의회(parliament)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진지하게 심사 숙고하게 논의하는 세션은 없고, 역시 다른 메커니즘에 대한 민주적 구성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도 없다. 비록 George Monbiot (2002)가 ‘WSF는 망명지의 세계 의회로, 진정한 하나의 조직을 구성하기 위한 과정의 부분적 형태라 할 수 있다'고 일컬었지만.

WSF는 입법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의를 위한 분별, 동시대의 의회와 같은 어떠한 심사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단체들은 WSF를 '세계적인 민주적 기구'로 설립하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일부는 세계의회를 위한 하나의 키로 세계 민주화(global democratization)를 중요하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들 단위 중에는 WSF가, 그 자체로써 세계의회로 전화되거나 전화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런 지구적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자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유추된 측면, 불확실한 위험이 재생산 될 우려가 국제적인 정치 의회에 대한 판단에 바탕이 된다. 이전에 Heldy Bull(1977. 46-51)는 텀(term)을 만들어 냈을 때, 종종 국내 정치와 관련한 비판들을 세계정치에 대한 민주적 원칙 적용 평가에 이용하곤 했었다.

세계 의회(global parliamentary)는 연방체제로 제안 되, 종종 상징적인 연관성을 포함하지만, 세계 역사가 보여준 전후 관계처럼, 민주적 조직 계획은 넘어 민주주의를 획득한 세계정치가 될 것이라고 우린 그 가능성을 믿는다. 우리가 비연방주의자들에게서 다른 지형들을 봤을 때, 지구 정치의 메커니즘을 의회에 적용할 수 있을 가능한 전망은, 여기 국민-국가-핵심의 정치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나왔던 다른 기구(institution)에 반영하고 싶다. 다시 말해 정치 정당으로. 그러나 그것은 또한 초국적인 관계맥락을 통찰력 있게 판단해야 한다.

WSF의 주요한 도전 중 하나는 '정치'의 의미를 바꾼 것이다. 현재 구현하기 위해 그것의 관계를 논쟁하는 것 그리고 미래 정치 정당은 저항 할 수 없는 전통적 언어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세계 정치 정당의 가능성에 대한 논쟁에는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정치 정당과 사회운동의 구분에 신중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국제적 전후 관계상 유용하고 광범위하게 확장하기 위해. 정치정당들은 종종 점차 조직을 좀먹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 행정의 부분 영역으로 전락한 20세기 후반 서방국가들의 경험을 피하기 위한 시도도 중요하다.

  05 WSF 끝이 보이지 않는 행진모습 [출처: 투기자본감시센터 홈페이지]

정치 정당들은 18세기와 19세기 현대 유럽에서, 미국에서 나타났다. 비록 예로부터 이어진 기존 사회 내에서 의견과 배타적인 파벌의 정당들도 있었다. 정치조직의 메타포는 현대의 유럽 초기까지 정치적 상상력을 지배해 왔다. 이념은 하나의 유기체에서 또는 조직에서 충돌하거나 모순된 행위속에서도 작용했다. 조직된 정치 정당들은 사회계약의 이념으로 대체했던 그들의 메타포를 날조했다. 정당을 대표하는 이념은 19세기 국가들에서 나타난 인류애에 대한 보편적 관심이다. 그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일국일당주의의 구조로. 그리고 냉전시기 과정과 그 이후, 다양한 축을 가진 정치(경쟁적인 엘리트주의)의 모델은 서부에 널리 보급됐다.

서부가 다각 정치로, 정치정당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상태의 임무를 위해 선거 시기 후보가 되었다. 선거를 통해 그들은 법과 정책 입안의 과정을 위한 접근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다른 정치적 실천가들은 로비와 전형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압력을 가했다. 비록 실제로 국가의 법과 정책입안에는 한계가 있었다 할지라도. 이들간의 관계는 최소한 정치적으로 명백한 이념적 관계가 남았다. 그러나 세계정치는, 정치활동가들이 취해야만 하는 유형은 명확하지 않다.

만약 WSF가 하나의 운동단위라면 좀더 표면적인 조직이라면, 그것은 같은 정서적 기능을 하는 세계 정치 정당이 될 수 있을까? 비록 의회조직이 빠져 있더라도. 다른 방도로 WSF가 어떻게든지 세계 정치 정당과 같은 조직으로 창조되어야만 하나? 세계정치 정당들은 무엇을 해야만 하나?

WSF에서 정당을 정의하는 의미는 부정확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그들의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항한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그러나 WSF 의 이념은 선거에서의 경쟁 또는 국가를 전복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으로 잘 정리된 프로그램은 명확히 아니다.

여기서의 의문은 어떠한 형태로든, 아니 그 이상으로 단지 조직하는 다원론자들의 만남, 토론, 축제를 위한 장소만으로 가능할까? 이다. 국가를 초월한 시민사회조직과 운동들이 어떠한 형태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다른 세계’를 건설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또한 어떤 세계정당을 건설하자는 추상적 가능성과 분리 될 수 있다. 최소한 지금, 초점은 아마도 현재 무엇을 하고 어떻게 국가를 초월한 정치 실천가들의 차이점들 속에서도 우리들이 지향하는 세상의 민주적인 변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연합할 수 있겠는가 이다.

우리는 WSF의 공간(또는 운동)으로부터 나타날, 변화를 위한 현실의 전략을 믿는다. 지구적 민주적인 변화는 오직 시민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적어도 목적이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세계 정치 운동을 변화시키는 사람들 없이는 불가능하다. 무언가의 변화는 국제적인 형식의 규정과 아마도 이후의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법률을 요구한다. 현재 조건은 그것을 고안할 수 있고, 국제적인 법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적 시민 사회는 어떠한 형태든지 취할 수 있다. 좀더 가공된 그리고 정확한 것의 ‘시민 사회’라는 용어의 교체의 가능성을 포함해.

그것은 오직 좀더 전통적으로 확산됐던 과정, 협의(신중한)의 새로운 포럼을 창조하는 목적과 함께, 의제를 정하고 결정하고, 교류와 절충점을 만들어냄으로 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 지구적 운동, 권력의 범위는 명확히 구분된 전망 계획에 기반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는 전 세계 정치 정당을 향한 단계를 조직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마무리하며

WSF 는 정치와 다른 세상 건설의 가능성을 재고하게 한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뭄바이에서의 WSF은 그 자체가 좀더 지형적으로 확장 되고, 브라질 포르트알레그레라는 도시, 특정한 지역주의에서 벗어났다. 단계적으로 그리고 좀 더디지만, WSF 의 구조와 절차들은 좀더 가능하고 민주주의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어지고 있다. WSF는 실제로 모든 참가자들의 입장에서 결정하는 최소한의 기준들을 만들어 왔고 또한 처음이자 최초로 NGO들과 운동단체들의 공간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며 유지시켜왔다.

단지 5년전에, WSF는 단순히 우연한 제안에 불과했다. 지금 이 새로운 이념과 제안은 WSF와 함께 그리고 또는 그 밖에서 단계적으로 전진해 나가고 있다. WSF에는 종종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되어지는 제안과 이념들이 있다. 특별히 낙관적인 전망으로 세계 발전을 이해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습의 WSF는 희망의 새로운 변증법에 기반해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뭄바이에서 널리 유포된 정신은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매우 고무적으로 만들었다. 5회의 WSF가 인도 뭄바이의 참가자들의 투쟁과 함께 지속적으로 새롭게 강화되어 힘을 주고 있다. 인도가 받은 영향과 참가자들이 받은 영향들이 이후 활동으로 보도되고 목격되어 짐으로써 말이다.

05년 5회 WSF는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다시 포르트알레그레로 돌아갔다. 특별히 포르트 알레그레의 선각자들을 구성한 네트워크와 함께 이미 유기적으로 조직된 사람들에 의해 실재적인 커뮤니티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때 그때 눈에 띄는, 행사는 혼란한 무엇과도 같았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좀더 과정은 복잡했지만 방법적으로도 좋은 전형을 만들었다.(비록 제한되었더라도) 특유의 WSF행사는 만남과 논쟁에 있어서 훌륭한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점점 지속적으로 모든 세대와 부문운동을 포괄하며 정치적인 행동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WSF가 남긴 이야기는 씌여져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 그 자체의 형식이 하나의 관례처럼 되거나 또는 열린 공간을 넘어 어떠한 것으로 전화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동안 다양한 조직화 과정에서 다양한 변화들이 있었다. 새로운 브라질 조직위원회가 이전 8명을 대신해 조직위원회를 23명으로 구성했다. 행사의 주요 주제는 더 이상 국제위원회(IC)에 의한 직접적인 결정이 아니라 열린 협의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주요하게 참가를 원하는 모두가 인터넷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생태 환경적으로 세대를 유지할 수 있는 논의와 관련한 주요 의제가 증가하고 있고, WSF 행사 그 자체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들은 단순 음료제공자로 커피 자판기를 제공한 네슬레를 만나기도 했지만, 포르트알레그레의 행사는 더 이상 포르트알레그레에 있는 사치스러운 카톨릭 대학교에서의 진행 된 것이 아니라 WSF의 원리헌장의 아이디어를 반영해 조립해 세운 천막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비록 많은 텐트들이 결국 개별 회사로부터 대여하긴 했지만)

모든 제한과 함께, 이런 변화들은 우리들에게 말해준다. WSF는 과정으로 학습하고, 존재하고, 그것은 운동 속에 있다고. 비록 전통적인 종류의 운동은 아닐지라도. 5회의 WSF 후에, 2005년 2월의 첫날, 포르트알레그 도시와 지역활동가들에게는 우울한 분위기가 있었다. 활동가들은 포럼이 여러 해 동안 그들의 도시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05년 1월 국제위원회(IC)에서 Roberto Savio는 WSF가 2008년 포르트알레그레에 돌아와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WSF 행사가 점차적으로 세계 지역 운동으로 확장, 진행될 것이고, 만약 이것이 운동으로 성공한다면, WSF는 점차적으로 세상을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공간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WSF 공식홈페이지 '05 사회포럼 평가' 글 모음에서 세계 민주화를 위한 네트워크 연구소(Network Institute for Global Democratization)가 제출한 글 입니다. 번역의 미흡한 부분은 WSF 공식홈페이지의 원문을 참조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