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도래 그리고 시작된 변모

[특별기획 : 굿바이 한겨레](2) - 한겨레식 진보의 기준으로 우뚝선 DJ

창간 이후 계속된 특종 행진들

88년 창간 이후 약 5년간 한겨레는 거칠 것이 없었다. 직선제를 통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외피를 둘러쓰기는 했지만 군부파쇼정권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던 노태우정권은 한겨레에게 끊임없이 뉴스거리를 제공했다.

88년 12월 21일자 한겨레는 고문경찰 이근안의 사진을 공개했고 90년 5월 12일자에는 당시 감사원 감사관이었던 이문옥이 정부 고위층의 지시로 23개 대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취득에 관한 국세청의 과세실태 감사가 중단된 사실을 폭로했다. 같은 해인 90년 10월 5일자에서는 군사 정권 정보통제기구의 핵심인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내용이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을 통해 공개됐다. 이 특종으로 인해 보안사는 현재의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기 까지 했다.

한겨레는 특종 행진을 계속했고 ‘양심선언자들의 메카’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을 획득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지원자’임을 자임한 한겨레는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 이르는 노동운동 대폭발기에도 현장을 지켰다. 90년 터진 민정당, 통일민주당, 공화당의 3당 야합과 91년 4월 26일 강경대 열사의 타살로 촉발된 열사정국에서도 한겨레는 ‘우군’의 자리를 지켰다. 91년 11월 1일자를 통해서는 ‘보사부 기자단 거액촌지수수 사건’을 특종 보도함으로 언론계의 검은 관행에 메스를 대기도 했다.

다양한 이유로 촉발된 한겨레의 내홍, 잠재된 불씨

이렇게 한겨레신문이 성가를 올렸던 것과 달리 내부에서는 창간 직후부터 ‘분파주의’양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겨레 사장으로 돌아왔지만 창간 당시 실무총책을 맡았던 정태기 등이 제기한 금융권 차입을 통한 확장경영론과 자립적 축소경영론의 충돌, 4대 편집위원장이었던 성유보의 기자 인사안이 이사회에서 변경된 것 등 창간 당시부터 잠재하고 있었던 한겨레의 분파는 90년 말부터 극심한 내홍으로 전개됐다. 결국 91년 3월말에는 사원 투표에서 한겨레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건호 대표이사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는 사태로 발전했다. 결국 93년 한겨레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 김중배를 영입해 대표이사로 선임하기에 이르렀다.

내홍 와중에 박해전, 최성민 두 기자가 한겨레로부터 해직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두 사람은 지리한 법정 공방등을 거쳐 97년 결국 한겨레로 돌아갔다.

90년부터 94년에 집중된 내홍 기간 동안 대부분의 한겨레 창간 이사들은 주류 비주류 할 것 없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를 떠났다. 한겨레 내부에서는 이 내홍을 영호남, 동아투위와 조선투위의 대립, 87년 대선 과정에서 나타난 후보단일화파와 비판적 지지(DJ지지)의 대립 등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94년을 경과하며 내홍은 잠잠해지는듯 하지만 그 불씨는 남아 또 다른 갈등상을 예고했다.

보도와 논조의 변화, "노사 양쪽으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

신문사 안에서 내홍이 벌어지는 동안 한겨레의 보도와 논조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창간 10년을 기념해 한겨레가 발행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80년대 하반기부터 1990년대 상반기까지 질풍노도와 같은 노동운동의 시대였다면, 1990년대 중반기 이후부터는 기업경영 합리화가 한국경제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된 시대였다. 이는 곧 한겨레가 헤쳐나온 지난 10년의 세월을 거칠게나마 반분하는 시대 구분과도 맞아 떨어진다”

한겨레가 밝힌 자신들의 변화를 좀 더 들어보자. “노사문제의 거품이 제거되기 시작한 후반기 5년동안(93~98년) 한겨레 논조에는 주목할 만한 시점변화가 일어난다. 노사 양쪽으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포괄적이고 심도 깊은 논평들을 제시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93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한겨레는 김영삼정권의 일반적인 부분, 특히 부패와 인사난맥상 등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집권 2년차를 맞이해 아직도 김영삼정권의 국정지지도가 높고 서슬이 시퍼렇던 1994년 3월24일, 한겨레21 창간호는 특집기사 ‘김현철은 새정부 최후의 성역인가’를 실어 김영삼정권의 몰락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창간 초기의 역동성을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했다. 재벌들은 ‘정상적’ 광고집행을 하기 시작했고 한겨레는 노사 양쪽으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군사파쇼 정권 아래서는 재벌은 군부독재의 편이었고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의 편이었지만 ‘문민’ 정부 아래서는 그 경계선이 흐릿해진 셈이다.

95년 김대중 정계 복귀 선언을 둘러싼 한겨레의 한판 코미디

이 즈음 특기할 만한 사실은 한겨레의 진보가 반 김영삼, 친 김대중으로 고착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간단히 설명하기 힘들고 한겨레의 태생적 한계 혹은 창간 당시의 인적구성, 고질적 파벌 등 복합적 요인으로 해석된다.

13대 대선에서 패배한 김대중이 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신당을 창당하며 정계로 돌아온 95년, 한겨레는 어이없는 한편의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논설위원이던 정운영은 ‘정명(正名)의 정치를 훼손한 쓰디쓴 한 면’이라는 제목의 비판적 논설을 썼다. 그런데 역시 논설위원이던 김종철, 김근은 “DJ 정계복귀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정반대 논조의 논설을 실었다. 공교롭게도 김종철, 김근은 김대중정권 출범 이후 연합뉴스 사장직을 차례로 주고 받았다.

  한겨레 제호는 오륜행실도 집자에서 서울대미대교수가 디자인한 그래픽으로 96년 바뀌었다
96년을 기점으로 분명해진 한겨레의 변모

한겨레의 변모 혹은 제자리 찾기는 96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안착되기 시작한다. 96년 1월 1일 신년호에서 한겨레는 참여연대와 손을 잡고 시민감시 운동을 시작한다고 알렸다. 같은 날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이 이회창 당시 총리, 김수환 추기경, 조순 당시 서울시장 등 23명의 명의로 발의됐다. 23명 중에 유창순 당시 전경련 고문이 포함된 것이 눈길을 끌었다.

한겨레는 96년 신년호에서 다양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한겨레는 전국민 정치의식 조사를 실시해 발표했는데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호남과 수도권 주민이 현 단계 진보연합 중추 예상’이라는 제목을 뽑았다. 그러나 한겨레가 96년 신년호에서 지칭한 ‘진보연합’은 일반적 의미의 진보와는 달랐다. 또한 같은 특집 기사에서 한겨레는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 국민회의’가 한국 정치세력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라고 발표해 묘한 뉘앙스를 남겼다.

같은 해 4월 총선을 앞두고 꼬마 민주당 거품론, 새정치국민회의 띄우기에 전념하던 한겨레는 전노 구속 등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에 힘입어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예상 외로 139석을 얻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가 79석을 얻는데 그치자, 총선 1주일 만에 95년 김대중 정치복귀를 적극 찬성했던 김종철 논설위원의 글 ‘민주대연합은 꿈인가‘를 실어 자신들의 지향을 분명히 했다.

친DJ를 분명히 해나간 한겨레는 96년 4월 노동법 개악의 신호탄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발족 의의를 “대립청산 협력기반 ‘물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풀이했다. 이 기사에서 한겨레는 “진보적인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적지않게 냉담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고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으나 벽을 느끼고 있다”라며 민주노총 역시 노사관계 개혁위원회에 기대할 것이 많을 것이라 내다보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노동법 개악안이 가시화 되기 이전까지 한겨레의 이러한 보도는 계속됐다. 같은 해 4월 말 한겨레는 김영삼이 발표한 ‘신노동정책구상’을 “방치상태 ‘노동개혁’ 본격시동”이라 풀이하기도 했다.

청와대, 노개위 등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보도하던 한겨레는 12월에 접어들어서야 ‘노동법 개정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설을 실어 비판하기 시작했다.

고속윤전기 도입해 증면 경쟁 뛰어들고, 디자인도 바꾸고, ‘재산 늘리기’ 면도 넣고

한편 같은 해 9월 한겨레는 거액을 들여 고속윤전기를 도입하고 10월에는 제호 디자인을 조선시대 오륜행실도 목판 집자에서 서울미대 교수들이 만든 컴퓨터 그래픽 타이포그래피로 바꾸며 기존의 24면에서 28면으로 4면을 증면해 물량 위주의 신문시장에 뛰어들었다.

한겨레는 28면으로 증면하면서 지면 편집이나 제호디자인에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인 것 외에 ‘재산늘리기’ 면을 매주 월요일자에 포함시켰다. 지금은 한겨레에서 대기업전문기자로 성가를 날리는 모기자는 당시에는 ‘재산늘리기’ 면의 기사를 도맡다시피 하며 ‘어느 지역 콘도 분양권 수익률이 얼마...’등의 부동산 ‘투자’정보를 중점적으로 소개했다. 창간 당시 기존의 신문과 ‘전혀 다른 신문’이었던 한겨레는 서서히 ‘그냥 또 하나의 신문’ 아니면 ‘조금 다른 신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셈이다.

96년 겨울, 노동법 날치기 정국의 한겨레 모습은

96년 12월 노동법 개악안이 가시화되고 김영삼정권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된 이후에는 한겨레도 정부와 자본에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노동법 개정안 이대로는 안 된다’는 2일의 사설을 필두로 4일에는 정리해고, 변형근로제가 도입 된다는 사실을 1면 머릿기사로 실었고 5일에는 청와대에서 노동계 통제를 위해 작성한 내부 문건을 폭로하며 사설, 칼럼등을 통해 전방위적 공세를 펼쳤다.

물론 이 와중에도 대선을 1년이나 남겨놓은 상황에서 ‘국민회의 대선공조 폭 넓히기’ 등 새정치국민회의의 활동을 소개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당시 정국과 아랑곳 없이 국민회의 기사를 양산하던 정치부 김성호 기자는 이후 DJ의 품으로 들어가 국회의원을 지낸다.

96년 12월 26일 안기부법, 노동법 날치기 개악의 파장이 가시지 않고 노동계의 총력 투쟁이 진행되고 있던 97년 1월 1일 한겨레는 ‘6월항쟁 10돌’ 특집기획을 실었다. 이 기획에서 한겨레는 정치, 사회, 문화, 사회 등 전방위적 민주화를 가져왔다고 6월 항쟁의 의미를 설명했으나 노동법 개악에 대한 노동자 투쟁이 한참이던 때에도 불구하고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의미나 변혁운동 부분은 빼먹었다

같은 해 1월 7일자에는 ‘발전과 저발전의 이론’, ‘라틴 아메리카’ 등의 저작을 남긴 종속이론 전문가 칠코트와 조희연의 대담 “보수적 변형민주정부 환상 버려야”를 실어 이른바 ‘문민정부’에 대한 공세를 퍼부었으나 뉴 DJ플랜에 의거 보수화 행보를 걷던 새정치국민회의나 김대중에 대한 성격규정은 피했다.

한편 노동법 개악안에 대한 저항이 점차 격화되는 동안 한겨레는 충실히 노동자들의 투쟁을 소개했고 특별 PR판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한겨레 기사에서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거리에 나섰다는 것을 강조했다. 1월 8일 특집 PR판에서 넥타이 부대가 유난히 강조된데 이어 10일자 한겨레 ‘창’에는 주먹만한 활자로 “‘순종의 넥타이’를 풀었다”는 제목의 통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노동법개악과 이에 대한 투쟁을 열심히 보도하던 한겨레는 1월 12일 새정치국민회의가 여론조사를 통해 법안 재심의를 결론낸 후 14일자에 ‘날치기법 재심의가 살 길’이라는 사설을 실은데 이어 한보철강 부도 사태 이후 흐지부지 보도를 종결했다.

'재벌체제 해체' 의견광고를 '재벌체제 개혁'으로 바꿔치기 한 한겨레

같은 해 겨울 외환위기 정국과 대선이 겹치면서 한겨레의 방향은 명확해졌다. 96년 부동산 위주의 재테크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해 거품경제에 한몫 했던 한겨레는 97년 12월 1일 IMF 협상이 타결된 다음날 이헌재 전 부총리의 시평 ‘경제위기를 기회로’를 실었다. IMF 구제금융 협상과 관련해 환율 폭등, 정권의 우왕좌왕 등에 대해 김영삼정권을 맹비판하기 했지만 진보적 대안과 비판지점에 대한 보도보다는 대선 보도에 전념했다.

중앙일보가 이인제 당시 대통령 후보가 이끄는 국민신당 죽이기에 나서 이회창 밀기에 나선 것을 비판한 한겨레는 역시 ‘표 흐름 점차 양분화 기미’라는 기사를 실었다. 대선을 5일 앞둔 12월 13일에는 ‘민주와 진보를 위한 청년 천인 선언’ 명의의 ‘재벌체제해체, 진보정치실현’ 제목의 의견광고를 ‘재벌체제개혁 진보정치실현’으로 바꿔치기해 싣기도 했다.

광고 바꿔치기 이후 광고 게재자들은 한겨레 신문사 사옥을 찾아 격렬한 규탄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한겨레 광고 국장 윤유석은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IMF 체제가 기정사실화 된 상황에서 당장 98년도 광고수지 전망조차 세우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솔직히 말해 재벌들이 혹시 그 광고를 빌미 삼아 한겨레에 대한 광고예산을 대폭 삭감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순간 앞서더군요.”

'김대중 시대‘

결국 97년 12월 18일 대선에서 김대중은 당선됐다. 그 다음날 발행된 한겨레21은 ‘김대중 시대’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20일자 7면에는 ‘소설 김대중’이라는 책 통광고가 실렸다. 그 광고의 카피는 ‘그 살아있는 역사의 감동 그리고 카타르시스’ 였고 같은 날 사설에서는 김대중정권에 대한 기득권층의 저항에서 오는 혼란을 국민이 막아야 한다는 글이 실렸다.

차기 대통령 김대중과 임기를 두 달 남긴 김영삼이 합의해 결정한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한겨레는 ‘국민대통합과 전노 사면’이라는 사설을 실어 시기적으로 적절한지는 의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미 예견됐던 일이라고 기정사실화 시켰다.

김영삼 노동법 개악안 보다 더 악화된 김대중 노사정 협상안에 대한 한겨레 보도

1년 전 겨울 날치기로 통과시켰던 노동법 개악안 보다 더 악화된 내용이 노동자들에게 강요된 노사정 협상이 가시화된 98년 2월 5일 한겨레는 ‘노사정 타결을 위한 자세 전환’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에서 한겨레는 “정리해고는 현행 법률규정의 요건을 살리면서 시행 시기를 앞당기는 데서 그리고 근로자파견법의 경우는 대상 업무를 특수직종에 한정하고 계약기간을 단기간으로 제한하는 데서 합의점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라며 가장 큰 쟁점이었던 정리해고와 파견제 도입을 기정사실화 하며 노동계를 압박하고 김대중정권의 출범에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실었다.

다음날인 2월 6일 노사정은 합의안에 도장을 찍었다. 배석범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중집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한 후 최종 도장을 찍겠다는 공언과 달리 밀실에서 합의안에 동의했다. 이후 민주노총에서 축출되다시피 한 배석범은 한 공기업체의 감사를 지냈고 새정치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꿀 때 창당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2월 7일 한겨레는 ‘새 틀 마련한 노사정 대타협’이라는 사설을 실었고 ‘노동권 숙원 다소 해소’라는 현장의 의견과 완전히 상반된 박스 기사를 실었다. 같은 날 현재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고 있는 김금수 논설위원 사회로 긴급 좌담을 열었는데 그 제목은 “노동계 큰희생 ‘역사적 합의’낳아”였다.

한겨레의 ‘진보’와 ‘민주’가 무엇인지 뚜렷이 각인된 98년 2월

8일과 9일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격렬한 항의가 협상지도부에 이어졌고 민주노총 사무실이 박살이 날 지경에 이르렀지만 9일자 한겨레는 사회면에서 ‘한라중 노조원, 민주노총서 농성-일부 강경파 노조원들은 탈퇴와 투쟁 촉구’라는 제목으로 짧게 처리하는데 그쳤다.

민주노총 중집에서 노사정 합의안이 부결된 이후 한겨레는 ‘형식상으로 불가능한 성격을 지닌다. 국민여론도 부정적 입장’이라고 보도해 찬물을 끼얹었다. ‘민주노총 현명하게 대응해야’ 라는 11일자 사설에서는 “(투쟁이) 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라며 “명심할 것은 노동운동도 자기 개혁을 강요받는 현실에 놓였다는 것이다”라며 쐐기를 박음으로 한겨레가 생각하는 ‘민주’와 ‘진보’가 무엇인지를 뚜렷이 각인시켰다.

[특별기획 : 굿바이 한겨레]

(프롤로그) - 88년의 운동권 신문, 2004년 업계 4위로
1회 - 한겨레, 그 벅찬 전사(前史)
2회 - ‘민주화’의 도래 그리고 시작된 변모
3회 - 새로운 이너서클
4회 - 상생? 상생!
5회 - 인간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 가능한가?
6회 - 노동운동을 순치시켜라!
7회 -‘그들’과 ‘우리’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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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 한겨레 , 굿바이한겨레 ,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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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vo

    무엇보다 성실한 취재가 돋보이는 기사입니다. 후속기사들도 기대하겠습니다.

  • marishin

    박래전 기자가 아니고 박해전 기자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지리한 법정 공방을 벌인 게 아니고 박해전 기자 혼자 했습니다. 확정 판결 전에 박 기자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했고, 이어 박 기자의 선례에 따라 최성민 기자도 돌아오겠다고 하자 회사에서 수용한 겁니다.

    이런 사실을 다 적을 수는 없으니, 글을 “두 사람은 지리한 법정 공방을 거치는 등의 방법으로 ...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수정하심이 어떨지...

  • 윤태곤

    죄송합니다.박래전 열사와 박해전 기자 이름에 혼동이 있었습니다.

  • 독자

    한겨레가 특채하고 싶겠다.. 윤태곤기자..ㅎ

  • 학생

    특별기사 '굳바이 한겨레'가 빨리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요^^;;

  • 투쟁!

    그렇잖아도 요즘 한겨레신문 보면서 진짜 열 많이 받았는데...
    한겨레는 스스로 자신의 역사적 표상을 비가역적으로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몰락을 자초하고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