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이광일 연구자가 한국사회당의 '사회적 공화주의' 비판에 대해 금민 전 대표의 반론이 있었고, 이를 다시 재반론한 글이다.
이광일 연구자는 이 글에서 대안사회 구성원리로서의 탈배제운동의 목표를 꼬뮨으로 보고, 이행의 문제와 함께 사회적 공화주의의 문제점을 거듭 지적한다. 논쟁이 보다 생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 [편집자 주]
필자가 금민 씨의 글에 대해 재반론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금민 씨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필자는 그의 손가락을 보고 있는 ‘바보’이니 더 이상 어떤 논의가 필요할까.
그런데도 필자는 기쁘다. 그 이유는 금민 씨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 때문이다.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이나 여타 진보세력에게 ‘훈수’와 ‘관전평’의 글을 쓰던 그가 이제 자신의 발이 닿아 있는 위치로 돌아왔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새삼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해 언급한 것은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 사태를 질타하는 금민 씨의 ‘여유로운 글’을 보며 그 이전에 자신이 대표, 대선후보였던 한국사회당의 문제에 대해 더욱 깊이 성찰하라는 이유에서였다. 그것이 진보정치의 재구성에도 기여할 수 있는 길임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바보’로서의 소임을 다하였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에 그가 필자에 대해 자신의 손가락을 보는 ‘바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서도 ‘여유로운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민 씨가 길게 반론을 하였기에 거기에 몇 마디 필자의 생각을 더하는 것 또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첫째, 금민 씨는 필자가 잘못된 논리적 전제 위에서 ‘사회적 공화주의’와 ‘민주공화국’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소 지루한 ‘논리학 강의’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가 새삼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금민 씨가 한국사회당의 강령과 거기에 첨부되어 있는 해설을 다시 한 번 읽어본 후 필자의 글 또한 다시 읽어보길 바랄 뿐이다. 물론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 없이 읽어보았을 터이지만, 오히려 작성자로서 그것을 수 없이 읽어본 것이 ‘자기 확신’의 독이 될 수도 있기에 다시 한 번 냉정히 읽어보라는 것이다.
필자를 포함하여 그 강령과 해설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과연 금민 씨처럼 독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금민 씨의 ‘논리학 강의’는 ‘철학개론’ 시간의 강의에 필요할지는 몰라도 필자의 글에 대한 반론의 전제로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 필자를 포함하여 원래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글에 내재된 빈 공간, 모순, 한계들을 보지 못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광범위한 토론과 논쟁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 진보정당의 강령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긴요한 과정이다. 비록 그들이 ‘바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필자는 금민 씨의 글을 읽으며 ‘민주노동당 사태’, 특히 ‘종북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날카롭게 훈수하면서 정작 ‘사회적 공화주의’로 상징되는 자당의 강령에 내재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왜 그처럼 방어적이고 둔감한 지 의아할 뿐이다. 세간의 전언대로 금민 씨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역작’이었기에, 그리하여 너무 애정이 깊어서 그런 것인가.
어쨌든 금민 씨가 ‘사회적 공화국’과 ‘민주공화국’이 ‘이행의 관계’가 아니라 한다면, 필자는 그것을 하나의 해석으로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기에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무어라고 논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사회당 당원들이나 여타 진보정치에 관심 있는 분들이 한국사회당의 강령과 해설을 보고 판단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민 씨의 말처럼 ‘사회적 공화주의’가 ‘민주공화국’ 그 자체이고 전략이라면, 그리고 아직 현실 속에서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에 이르는 경로를 강령에 반영하는 것은 여전히 당면한 핵심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왜 ‘사회적 공화국’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지, 그 장애를 만드는 역사적인 사회관계들, 그 안에 내재된 권력관계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잘 숙고하여 내용을 풍부히 담아내면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필자가 이전의 글에서 ‘정치’라고 표현한 것이고 이른바 ‘사회적 공화주의’로 상징되는 한국사회당 강령에 비어 있는 가장 커다란 한계로 지적한 사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금민 씨의 반론에서는 정작 이에 관한 그 어떤 주석도 없다. 금민 씨가 필자의 글에 대해 자당의 강령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였다고 평가한 것이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보완과 더 명료한 설명이 이루어진 후에 가능한 것이다.
둘째, 금민 씨는 필자가 대안사회의 구성원리와 그것의 작동매카니즘의 이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자는 양자의 관계를 문제시한 적이 없으며 이와 관련 ‘작동메커니즘’이라는 표현을 쓴 적도 없다. 그리고 필자가 무슨 능력이 있어 미래 사회의 ‘작동메커니즘’을 일일이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필자가 말하고자 한 것은 대안사회의 구성원리로서의 ‘탈배제 운동’의 목표는 ‘꼬뮨’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에 대해 한국사회당의 강령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이를 말하기 위해 최광은 대변인의 글을 인용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필자의 인식은 ‘탈배제운동’을 핵심으로 하는 이른바 ‘탈배제강령’이 결국 ‘꼬뮨’이라는 미래의 상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어떤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만일 금민 씨도 인정하듯이 그것을 ‘꼬뮨’이라고 하든 머라고 하든지 상관이 없다면, 그것을 강령에 명료히 반영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은 채, 단지 ‘탈배제 통합’, ‘탈배제운동’만을 말한다면 그것을 마다할 정치세력들이 이 세상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자유주의정치세력이야말로 지금까지 그런 세상을 누누이 강제해 온 것 아닌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진보를 자임하는 한국사회당의 현 강령이 적절치 못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나아가 금민 씨도 부인하지 않은 것처럼 ‘탈배제운동’의 목표를 ‘꼬뮨’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그 사이 어디에 위치할 ‘사회적 공화주의’, 그것의 실현으로서의 ‘사회적 공화국’의 역사적 성격과 위상, 그것의 실현을 입증항 준거들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 그 ‘사회적 공화국’이 즉각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현실의 정치목표이기에 그렇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탈배제운동’의 극복 대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필자가 그것이 2단계, 3단계, 아니면 긴 하나의 장기과정이 될지 모른다는 단서 아래 ‘이행의 문제’를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런데 금민 씨는 이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행기 국가’라고 필자가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만 집착하여 필자의 혼동을 탓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금민 씨는 필자가 ‘사회적 공화주의’의 추상성을 언급한 것에 대해 필자가 ‘탈배제운동’과 현실의 정치노선으로서의 ‘사회적 공화주의’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라 비판하고 있다. 즉 ‘사회적 공화주의’는 탈배제강령의 한 부분이고 사회경제적인 부분 등 여타 영역에서의 탈배제도 주목하고 있으며 거기에 구체적인 정책들이 존재하는데, 왜 추상적이라고 비판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글 어디에 그런 혼동이 보이는가. 이미 필자는 ‘탈배제운동’이 분열된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은 한국사화당과의 행보와 무관하게 ‘꼬뮨’을 목표로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즉각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현실정치노선으로서의 ‘사회적 공화주의’ 또한 그것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런 필자가 ‘사회적 공화주의’와 ‘탈배제강령’ 사이에 어떤 혼란을 보였다는 것인가.
오히려 혼란을 일으킨 것은 금민 씨이다. 필자는 한국사회당 강령에서 말하는 국가와 정치역역에서의 탈배제 이외에 사회경제적 영역 등에서의 탈배제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금민 씨가 주장하고 있듯이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이 없다고 비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정책은 있으나 정치가 빈곤하다는 비판을 하였을 뿐이다. 역사적 사회관계, 권력관계에 천착하지 않는 정책만이 있기에 그것을 추상적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렇다면 금민 씨는 먼저 이에 대해 대답해야 할 것인데, 다시 강령 속의 정책들을 나열하면서 그것을 구체성의 증거로 들며 필자에게 반론을 펴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언제 정책의 빈곤을 문제시한 적이 있으며 그것에 답변하라고 한 적이 있는가. 애석하게도 ‘모자이크식 강령’이라는 필자의 주장에 대한 반비판도 이러한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넷째, 금민 씨는 ‘사회적 공화주의’와 ‘급진민주주의’는 별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필자가 지나가듯 말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에게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진보정치의 주체로서 한국사회당을 평가하는 필자의 인식을 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금민 씨는 민주주의에 대한 상이한 발상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다수의 지배’는 필자의 민주주의 이해와는 거리가 있다. 필자는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들, 그 안에 내재된 권력관계를 해소, 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그것은 결국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라는 자기지배의 원리를 향한 민주주의운동을 다른 한 면으로 하여 자신을 계속 구성해 나가는 운동으로서 존재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꼬뮨’과 민주주의가 결국 하나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급진민주주의’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다양한 영역에서 비대칭적, 억압적 사회관계를 매개로 벌어지는 ‘탈배제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이며 한국사회당의 강령이 지닌 현 단계에서의 긍정성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운동의 과정은 바로 ‘공적인 것의 확대’라는 공화주의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것이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 관계가 없는가. 이런 필자의 인식과 무관하게 금민 씨가 자당의 강령에서 그것들이 서로 별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바, 거기에 대해 필자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불안정 노동자인 필자는 그냥 지나가며 허튼 소리로 여백이나 채울 정도로 그렇게 한가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이상 그 무엇을 말하겠는가.
다만 금민 씨가 말한 대로 ‘급진민주주의’와 탈배제운동의 즉각적 현실 목표로서의 ‘사회적 공화주의’가 무관하다면, 이것은 이전의 기고글에서 필자가 우려하며 언급한 바대로 필자가 ‘사회적 공화주의’로 상징되는 한국사회당의 강령에 대해 너무 과잉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그것도 ‘사회적 공화주의’의 작성자로 인식되고 있는 금민 씨에 의한 확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필자에게는 애석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회적 공화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한국사회당의 ‘탈배제강령’은 필자에게는 더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필자는 ‘탈배제운동’, ‘사회적 공화주의’, 그리고 ‘꼬뮨’의 맥락에서 한국사회당의 성격과 위상을 나름대로 평가하였고 그런 맥락에서 한국사회당을 진보정치세력의 주요한 역사적 주체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 ‘탈배제운동’이 ‘제도 안의 정당’에 의해 가능할까라는 회의를 하면서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금민 씨는 ‘사회적 공화주의’가 ‘진보의 재구성’에 장애가 되느냐고 물었다. 필자는 장애가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진보를 재구성하는데, ‘사회적 공화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하였을 뿐이다. 오히려 필자는 그것을 재검토하면서 한국사회당이 자신을 새로이 다시 세울 때, 진보정치의 재구성에 긍정적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미 밝혔듯이 필자는 그 동안 한국사회당의 강령을 과잉평가해 왔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긍정성 또한 과잉평가해 왔다. 지금 그것이 확인된 이상 필자가 한국사회당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른바 ‘탈배제 강령’의 내용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성찰하는가에 따라 진보의 내용을 구성하는데 장애가 될 수도,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금민 씨와 필자가 나누는 이런 대화처럼 말이다. 미리 예측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는 아니지만, 아마도 금민 씨가 그와 같은 이분법의 질문을 하게 된 이유는 자신은 달을 가리키는데, ‘바보’인 필자가 손가락을 보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으로부터 추출할 수 있을 듯하다. 이에 대해 필자가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만 필자는 금민 씨가 좀 더 여유를 갖고 이런저런 비판에 더 귀 기울이기를 바랄 뿐이다. 과거를 회고하며 ‘이미 우리가 먼저 제기한 문제들인데..’라며 분개하는 것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
금민 씨가 길게 반론을 펼쳤지만, 필자가 제기한 핵심 문제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만족할만한 답변을 하였다고 생각지 않는다. 거기에는 ‘탈배제강령’의 해석과 관련, 지난 대선에서 보인 창조한국당에 대한 한국사회당의 태도도 포함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필자에 대한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사회당 안에서 우선 이루어지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금민 씨는 ‘지식인’이면서 공당의 대표와 대선후보를 지낸 책임 있는 현실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금민 씨의 손가락이 가리킨 달이 달무리로 인해 명확하지 않다면, 필자를 포함한 ‘바보들’은 자꾸 그 손가락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바보’를 탓하기 이전에 그것을 볼 수 있게끔 ‘희미한 달무리’를 걷어 내주는 것도 금민 씨와 같은 ‘현자’, ‘철인정치인들’이 할 역할이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금민 씨가 ‘바보같은 현자, 현자같은 바보’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보다 큰 현실정치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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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일 님은 성공회대 정치학 연구자로 민주자료관 부관장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