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의 좌표를 묻다

[특별기획 : 이명박정부와 진보](10) - 이명박의 인권의 맥락

정부조직 개편안을 둘러싸고 여야 간 신경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명박 당선인과 한나라당은 오늘(14일) '통일부 존치, 국가인권위 독립기구화' 외에는 더 이상 양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독립기구로 두겠다고 하니 다행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수위가 국가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두겠다는 방안을 발표하면서 대한민국의 인권은 그 자체로 심각하게 훼손됐다. 보편적 권리로 다뤄져야 할 인권 문제가 정치 협상의 볼모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동안 권력의 인권침해에 맞서 저항하며 쌓아올린 최소한의 성과마저 흔들어놓았다.
인권활동가들은 8박9일간 명동성당에서 노숙농성을 벌이며 반발했다. 3부 권력의 어디에 속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3부의 정치적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등 한계가 지적되어온 터에, 대통령 직속기구화를 하겠다는 발상 자체부터가 인권에 대한 무지.무시를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홍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는 명동성당 노숙농성을 함께 하며 이명박 시대에 인권이 어떻게 왜곡될 것인지를 감지, "태생부터가 자본 친화적인 삼부의 소속, 그것도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행정부 소속으로 국가인권위원회를 두겠다는 것은 인권을 상황에 따라 폐기가능한 공공성의 개념으로 치환시켜버리는 개발주의적 사고의 전형"이라고 지적한다.
홍지 활동가는 인수위가 삼권분립론을 내세우며 직무의 독립성이나 중립성이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박한다. 이윽고 이명박의 인권에 대해 "맥락(context)은 파괴된 채 오직 문자(text)로만 존재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여야 정치 협상에 휘둘리고 있는 대한민국 인권의 좌표,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편집자 주]


1951년 미국의 경제학자 케너스 애로우(Kenneth J. Arrow)가 발표한 ‘불가능성 정리(Impossibility Theorem)’는 자본주의 경제학이 민주주의에 내린 사망선고였다. 불가능성 정리는 정치적 의사 결정 체제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하는 공공선택이론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애로우는 개인들의 선호의 합인 사회적 선호를 나타내는 사회후생함수를 도출하면서 합리적인 의사 결정 체제는 ‘독재’뿐임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즉, “합리적(효율적)이면서 민주적인 의사 결정 체제는 없다”는 것이 바로 불가능성 정리다.

언뜻 수학에 미친 책상머리의 헛소리처럼 들리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가 ‘수학적으로’ 틀렸음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불도저식 개발경제의 대명사인 이명박 정권의 탄생은 불가능성 정리의 설득력을 더해주는 듯하다.

청계천 개발, 버스노선체계 개편에서부터 대운하, 영어 몰입교육 등 이명박 당선자의 행보를 보면 그에게 민주주의란 ‘장식용 거수기’ 이상의 의미는 없다. 불도저로 밀어붙이면 되는 것 중 하나일 뿐. 그렇다면 불도저 이명박에 동의한 1,100만의 표는 민주주의로 민주주의를 배반한 모순이며, 그 속에서 인권이 거할 곳은 찾기 어렵다. 당선인의 ‘장애아 낙태’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인권은 사회적 총효용의 관점에서 그 좌표가 정해질 무언가가 될 것이다. 경제 환원주의 틀 안에 갇히게 될 인권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무엇보다 개발주의 정책의 부활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 모습은 30년 전 박정희 정권 때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경제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사회적 인프라 구축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경제주체는 정부뿐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 개발의 결과물은 국유화되었고, 어느 정도의 공공성을 담보해야 했다. ‘대운하 경기 부양론’으로 대표되는 이명박 정권의 경제정책은 언뜻 30년 전 개발주의 모델과 닮은 듯하지만, 국가주도가 아닌 자본주도, 즉 신자유주의적 개발정책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보건의료, 사회복지, 공교육 부문에서 공공성 후퇴와 수도, 전기, 가스 등 필수서비스의 사유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FTA라는 전방위적 개방 압력은 향후 이명박 당선인의 발걸음을 더욱 더 가볍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결과 아마도 건강할 권리는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할 권리가 되고, 교육받을 권리는 도처에 테솔(TESOL)을 세우는 것이며, 문화를 향유할 권리는 전소한 숭례문 복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내는 성금과 치환될 것이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가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개인의 지급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인권은 그 자체로 보편타당한 명령이 아닌, 산간지역에 설치되는 전화망처럼 시장에서 효용가치가 인정돼야만 보장되는 ‘공공성’으로 그 지위가 격하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한편으로 국가주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작은 정부’는 복지.공공성 영역에서만 주장될 뿐, FTA 협상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는 시장의 친위대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해체되어 가는 공동체 속에서 국적은 때로 유일한 정체성이기 때문에 국가주의는 손쉽게 동원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설파하는 무한경쟁의 논리는 사람을 분류하고 우열을 매기는 것을 인간의 본능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맥락 속에서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정당화 된다.

이명박 당선인은 앞서 언급한 ‘장애아 낙태’ 발언 이외에 ‘마사지 걸’ 발언 등 우리 사회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어를 거침없이 내뱉어 왔다. 단지 한 순간의 말실수였을까? 저렴한 노동력 공급과 공공 지원 축소를 위해 조장되는 구조적 차별은 당연하다는 당선인의 신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이명박 시대의 인권은 국가와 자본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로 제 기능하기 힘들다. 무언가를 위해(그 대부분은 ‘경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올 것이다.) 끊임없이 희생되거나, 포기해야 하는 것이 될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국가주의의 본질이다.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발표에서 비롯된 국가인권위원회 대통령 직속기구화 논란은 이명박 시대에 인권이 어떻게 왜곡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시험지일 뿐이다. 태생부터가 자본 친화적인 삼부의 소속, 그것도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행정부 소속으로 국가인권위원회를 두겠다는 것은 인권을 상황에 따라 폐기가능한 공공성의 개념으로 치환시켜버리는 개발주의적 사고의 전형을 보여준다. 국가주의의 강화나 소수자 인권 침해는 말해 무엇 할까.

이러한 우려와 비판에 대한 인수위의 답변은 ‘삼권분립론’이었다. 인수위는 헌법재판소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처럼 헌법이 별도로 정하지 않는 한 모든 국가기관은 입법, 행정, 사법 그 어느 하나의 조직에 들어가야 하며, 때문에 현재 무소속 상태의 국가인권위원회는 ‘위헌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가 대통령 직속기구가 되더라도 직무의 독립성이나 중립성은 훼손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삼권분립 즉, 권력분립제도란 본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것이다. 입법-사법-행정권에 맞춰 모든 국가기구를 열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 국가 조직이 서로 견제하도록 하여, 어느 한 쪽에 힘이 실려 국민의 기본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을 막는 것이 권력분립제도의 본래취지이다. 즉, 삼권분립과 인권보장이라는 두 가지 규범 중 상위규범은 인권보장이다. 때문에 인권보장을 위한 국제적인 규준(파리원칙, UN GA Resolution 48/134)에 따라 만들어진 인권위의 존재를 하위규범인 삼권분립으로 부정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사고방식이다.

게다가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이 현재 많은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권력분립원칙이지만, 로크가 주창한 입법과 행정의 분리 즉, 이권분립제도를 따르는 영국과 같은 나라도 있다. 대만의 경우 오권분립(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감찰권, 고시권)에 이르기까지 한다. 때문에 삼권분립이란 용어에서 강조해서 봐야 하는 것은 ‘삼권에 따른 정렬’이 아니라 ‘분립에 의한 견제’의 원칙이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독립적’으로 만든 이유는 헌법의 권력분립원칙에 의해서도 ‘분립에 의한 견제’가 잘 이뤄지지 않는 현실적인 고려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면서 인수위가 주장하는 존재방식의 위헌성까지 극복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삼부를 제외한 국가업무를 규정하지 않은 우리 헌법의 한계 상, 양자택일이 필요했다. 그리고 반세기 가까운 개발독재 시절, 삼부가 초헌법적인 방식으로 국민의 인권을 유린해왔던 한국 사회의 역사적 경험은 형식적인 위헌성 탈피보다 독립성 보장이 올바른 선택임을 증명해 주었다.

때문에 인수위가 단서로 달았던 소속과 직무의 이분법은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궤변이다. 우선, 대통령 직속기구가 된다는 것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업무에 대해 대통령이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사형제 존치를 주장하는 당선인이 사형제 폐지를 천명한 국가인권위원회를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가? 재벌그룹의 CEO였던 당선인이 국가인권위원회의 비정규직 법안 수정 권고를 받아들이기라도 할 것인가? 또한, 인수위가 그토록 강조하는 권력분립원칙에 따라 대통령 직속, 즉 행정부 소속의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입법부)나 법원(사법부)에 어떠한 권고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헌이 된다. 권력분립원칙에 의해 행정부 소속이 된 국가인권위원회의 독립적 직무가 오히려 그 원칙을 훼손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국가인권위원회 대통령 직속기구화 논란은 인권의 구체적인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개발지상주의 자들의 기계적인 형식논리일 뿐이거나, 오직 권력집단의 이익을 위한 가감승제(加減乘除)의 계산에 불과할 뿐이다. 인수위가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직속기구화 계획을 발표한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를 북한 인권 전담기구로 만들겠다”는 한나라당의 논평은 새 정권에서 인권을 어떤 정치적 시각에서 보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명박 정권이 말하는 인권은 맥락(context)은 파괴된 채 오직 문자(text)로만 존재할 것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에게 인권은 인간이기에 누리는 권리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마다의 “물적 좌표에 따라 바둑판처럼 짜일” 그 ‘무엇’일 뿐이다. 물론, 인권이란 용어가 파편화되고 비틀어진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닐 것이며, 이명박 당선자가 그 모든 왜곡의 장본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명박 시대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존재가 확인시켜준 우리 사회의 망탈리테(mentalites) 때문이다. 금융자본주의 시대, 이제 그 정체도 애매모호해진 경제 성장을 위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할 수 있다는 그 망탈리테. 그 결과 국가주의는 점점 강화되어 사회적 소수자들이 발 디딜 곳은 더욱 찾기 힘들어질 것이다. 개발주의 광풍에 인권뿐만 아니라, 공공성마저 뿌리 채 뽑혀나갈 수 있다.

이기적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독재일 뿐이라는 애로우의 증명이 이명박 개인의 신념을 넘어, 우리 사회의 신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이명박 반대’라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 전에 경제 환원주의로 파편화된 인권의 언어를 한 데 모으는 연대가, 비틀어진 인권의 뜻을 바로 알리기 위한 투쟁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인권을 ‘그들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로 자리매김 시켜야 한다. 인권은 x-y축으로 나눠진 사분면 어딘가에 명시적인 좌표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난망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가 국내 한 일간지와 가진 인터뷰를 음미해보는 것이 그 첫걸음일 수도 있겠다.

장영준 : 많은 사람들이 교수님의 두 가지 이력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즉 언어학자인 교수님이 어떻게 그렇게도 강력한 사회비평가가 되었는가, 혹은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촘스키 : 그 문제에 관해 자주 질문을 받습니다. 저는 아직도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장교수가 만일 목수라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닌가요. 목수는 목수 일만 해야 하고 인권에는 관심을 가지면 안 될까요. 언어학자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닌가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학 훈련을 받은 사람만 정치적 언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아일보, 2000. 1. 4.)
덧붙이는 말

홍지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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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 진보 , 공공성 , 개발주의 ,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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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돈휘

    존경.홍지.홍지문은 불타지말아야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