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까지 차지한 시장, 무한참여의 장으로!

[IPTV가온다](6)IPTV로 살펴본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대응을 위한 준비

IPTV를 통해 바라본 미디어융합 시대를 전망하며 기획한 특별기획 [IPTV가온다]의 마지막 글은 황규만 진보네트워크 활동가가 작성했다. 민중언론참세상은 산업화만이 존재하는 미디어융합 환경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대중에게 진정한 이해와 분석을 제시함으로써 향후 대중이 중심이 되는 융합미디어운동의 목표와 전략 모색의 초석을 닦고자 했다.

황규만 활동가는 특별기획 [IPTV가온다]의 마지막글 '내 방까지 차지한 시장, 무한참여의 장으로!'에서 "IPTV가 스스로가 가진 가능성의 반에 반만큼이라도 방송의 공공적 기능을 하려면 사회적 합의로서 강제하는 어떤 규제 틀이 필요하다"며 "과거 인터넷이 민중들의 참여와 소통의 무기로 각광받았던 것처럼, IPTV를 비롯한 향후 융합미디어를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미디어로 재전유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융합시대에 걸맞은 실력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밑으로부터의 대중운동을 고민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공의 의제를 재구성하고 흩어진 연대를 복원하여 기구와 법제에 대응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고 지적했다.

특별기획 [IPTV가온다]에 관심을 보여준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린다.

2월 5일(월) - 서론부 : IPTV 소개
2월 12일(월) - 본론부 : 체험사례 ① 'IPTV' 개인정보보호는 어떻게?
2월 13일(화) - 본론부 : 체험사례 ② 11회부터는 500원!?
2월 14일(수) - 본론부 : 체험사례 ③ 'IPTV' 메뉴는 내맘대로?
2월 15일(목) - 본론부 : 체험사례 ④ 장애인 등 소수자권리 무시하는 IPTV
2월 12일(금) - 결론부 : IPTV로 살펴본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대응을 위한 준비

IPTV라는 낯선 신조어

IPTV는 낯선 신조어 때문에 뭔가 신기한 물건인가 싶겠지만, 사실 알고 보면 새로운 것은 별로 없다. IPTV를 통해 선보여질 기술과 컨텐츠는 이미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해서 몇 년 전부터 향유해 오던 것이다. 포털 서비스가 TV속으로 들어온 것으로 이해하면 매우 간단하다. 단순히 변형된 형태의 방송에 불과할 것 같은 IPTV가 최근 논란이 된 것은 현 방송과 통신관련 법제도 내에서 소화되지 않는 제도적인 문제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는 IP라는 인터넷 기술에 기반을 둔 통신서비스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케이블사업자와 같이 방송 컨텐츠를 제공하는 방송사업자라는 중복규정 탓이다. 필연적으로 방송과 통신을 아우르는 새로운 법제도적 정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소란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법률적 혼란을 겪으면서까지 IPTV 서비스를 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영상 홍수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출처: 다음goTV(2006버전) - 메뉴화면(http://www.daum.net)]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미디어 시장의 포화 때문이다. 새로운 시장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IPTV는 전혀 새롭지 않다. IPTV가 새로이 개척하고자 하는 시장은 사실 인터넷에 널리고 널린 불법 동영상 컨텐츠들이다. 이런 컨텐츠를 HD고화질로 포장해 돈을 벌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법 컨텐츠들을 폐쇄적인 공간으로 재포섭하고자 하는 유료 포털 서비스 전략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IPTV 사업에 ‘KT’, ‘하나로’ 같은 대형 통신망 사업자들 외에 ‘다음’과 같은 포탈 사업자가 진출하는 것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런 시장의 욕망이 법제도적 정비를 요구하는 것이다. 3대 지상파 방송사와 케이블 사업자들의 강력한 저항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방송의 공공성 때문이 아니라, 기존 방송사업자로서 선발자적 지위 유지를 위한 텃세에 불과하다. 최근 추진되고 있는 ‘방송통신위원회’ 기구 설치와 관련한 논쟁은 자본의 새로운 시장창출 욕구에 대한 친절한 화답이자, 시장 내 이전투구에 대한 조정자로서의 응대이다.

“그래서? 시장이 원래 그런 거 아니야?” 맞다. 누가 뭐래? 오히려 테돌이인 필자의 입장에선 불법다운로드로 찾아보던 저화질의 일드(일본 드라마)와 미드(미국 드라마)를 HD 고화질로 볼 수 있다는데 당연히 네발 다 치켜세우고 환영할 일이다. 단지 IPTV가 방송의 단점과 포털의 단점이 서로 극대화되어서 결합될까 걱정일 뿐이다.

계급 배제적이고 차별적인 동원 그리고 소통불능의 열성 결합에 의한 괴물

  '미디어융합시대,새로운 미디어 공공성을 말한다'는 주제로 지난 1월 24일 미디액트 대강의실에서 진행된 포럼 사진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방송의 공공성이 애국가 전후에나 잠깐 나오는 공익광고의 화려한 수사로 치장된 거짓말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방송의 공공성은 희소한 공공재인 주파수에 기반하고 있다는 물리적인 전제조건과, 계급·신체·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주체의 접근과 참여 그리고 그만큼이나 다양한 주장이 공존하는 공론장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투쟁과 합의에 기초한 주장이다. 하지만 민중들의 방송 참여는 ‘스타댓글’과 같은 오락물에 한정되거나, <100분토론>의 ‘시민논객’과 같은 제한적이고 조작된 공개성, 그리고 공익성으로 포장된 후일담에 불과한 방송평가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솔직히 방송은 태생부터 소비문화의 스펙터클에 중독되어 붕괴되고, 계량적인 중립성에 관료화된 계급 배제적 공공장에 불과하였다. 군부독재 시대 땡전뉴스나 하던 방송은 태생적으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했다. 인터넷언론 충격에 휩싸였던 2002년 즈음의 미디어시장 변화기에 으로 대변되는 방송저널리즘이 찰나적으로 꽃피웠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요새 누가 보나? <무한도전> 보지.

오래전부터 사회운동진영에서 주장해왔던 민중이 직접 제작하고 참여하는 퍼블릭엑세스 컨텐츠에 대한 편성과 채널의 확대 주장은 멍청한 한량들 ‘방송위원회’ 탓인지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고난하다.

반면 초창기 인터넷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구호아래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발전해 왔다. 쌍방향적이고 익명에 기초한 인터넷의 특성은 초창기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를 만들어낼 대안미디어로써 각광받아왔다. 그리하여 한때 신자유주의 개혁세력들의 개혁의제와 맞물려 '오마이뉴스'등의 인터넷언론 부흥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신문이 체제 내 지원과 규제 품으로 안착하고 인터넷이 포탈에 의해 독과점 된 이후, 인터넷은 다시 주류미디어의 그려놓은 아젠다 안에서 대중 동원 기재로 전락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만나는 대중은 더 이상 대안사회를 같이 꿈꾸는 동지가 아니라, 소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욕망과 성차별적인 내면을 가감 없이 표출하고 때로는 짐승 같은 폭력을 드러내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더불어 정보의 대량 수집과 시장의 독점은 결과적으로 정부와 자본 스스로에 의한 검열과 감시가 용이하게 하였다.

우리는 새로 등장하는 IPTV가 과거 방송과 인터넷의 소비문화의 스펙터클과 계급 배제적이고 차별적인 동원 그리고 소통불능의 열성 결합에 의한 괴물이 탄생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 중심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방송의 공공성을 위한 기구로 자리매김 하게 하는 것 우리의 저항과 실천의 몫

방송과 인터넷에서 극복하고 쟁취해야 할 진보적 의제들이 아직 산적해 있는 우리에게, 방송통신위원회란 국가기구의 급작스런 재편과, 대표적 융합서비스인 IPTV의 홀연한 등장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렇듯 머리털 쥐어 싸매게 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마음을 가다듬고 먼저 할 일은 올바른 질문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사실 답에 거의 근접한 것일 테니 말이다. 이 글은 바로 올바른 질문을 던지기 위한 사전답사 같은 것이다.

앞에서 시장 편향적으로 흐르는 미디어 환경과 그에 조응하는 국가기구 재편 속에서 과거의 문제들로부터 미래에 닥칠 문제들을 나름대로 예상해 보았지만, 사실 “근데 그것이 왜 문제야?”란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한다. 답은 역시나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잘 적응해야한다” 라는 수동적인 필요 너머로, “미디어란 이러해야한다”라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한 사회의 공공재이자 공론장이다. 마트 가서 구매하고 소비하면 사라지는 상품이 아니라 다수가 공유할수록 그리고 재가공 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공공의 문화자산이자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다. 따라서 누구나 참여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감시하고 통제되어야 할 상품이 아니라, 생산주체이자 향유주체로서 교육받고 장려되어야 할, 그래서 보호되어야 할 주체이다.

그러한 미디어는 아래로부터의 참여와 다양성이 그 생명이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참여가 배제된 곳에서는 파시즘과 통제만이 난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간단해진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융합미디어에서 시청자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지 않으면서도 참여와 표현 그리고 향유의 자유가 보장되고, 다양성이 보장되도록 하는 방법은?”

이 때, 쥐어 뜯겨진 머리털 사이로 몇 가지 아이디어가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다.

IPTV는 기술적으로 인터넷과 동일하고 거의 무제한의 채널을 가진 미디어이다. 따라서 기존의 방송사처럼 편성 제약을 이유로 전문 방송제작자들이 제작한 컨텐츠 중심으로 방송할 이유가 전혀 없다. 즉 무한한 시청자 참여가 가능한 미디어가 IPTV이다. “돈 좀 벌려면 이 정도 차별성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당연히 되어야 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왜 IPTV는 대자본만 사업자만 서비스해야 하는가? 인터넷에는 포털이외에도 자기생명력을 가진 다양하고 무수한 실험들이 이루어지듯이, IPTV도 시장지배적인 영리 사업자 이외에도 비영리 서비스도 허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IPTV는 기존 방송보다 기술적으로 더 많은 가능성이 있는 미디어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방송의 공공적 역할을 황금알에 눈 먼 민영방송사업자들이 자발적으로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IPTV가 스스로가 가진 가능성의 반에 반만큼이라도 방송의 공공적 기능을 하려면 사회적 합의로서 강제하는 어떤 규제 틀이 필요하다. 따라서 새로 출범할 방송통신위원회는 소비자의 선택권 증대만이 공공의 선인 양, 그래서 경쟁만을 도입하기위해 새 사업자를 끌어들이는 것만이 만병통치인 것처럼 시장 환원론에 갇히지 말고, 방송을 공공재로서 그리고 민주주의의 공론장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을 먼저 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과거 방송위원회나 정보통신부가 저질렀던 수많은 만행을 돌이켜 보건데, 이런 요구 역시 정부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는 절대 기대하지 않는다. 새로 출범할 국가기구가 시장 중심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방송의 공공성을 위한 기구로 자리매김 하게 하는 것 우리의 저항과 실천의 몫이다.

과거 인터넷이 민중들의 참여와 소통의 무기로 각광받았던 것처럼, IPTV를 비롯한 향후 융합미디어를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미디어로 재전유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융합시대에 걸맞은 실력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밑으로부터의 대중운동을 고민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공의 의제를 재구성하고 흩어진 연대를 복원하여 기구와 법제에 대응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덧붙이는 말

황규만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