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계속되어야 한다!

[칼럼] 촛불의 진화와 촛불폐인에 대한 찬사

5월초부터 두 달 넘도록 꺼지지 않는 촛불이 지금 정세의 핵이다. 출범 100일이 넘기지도 못한 채 이명박 정권은 사실상 마비상태이다. 5월 30일, 6월 6-8일, 6월 10일, 7월 5-6일을 경과하면서, 새로운 조건에서 87년 6.10투쟁을 재현한 촛불의 위력 앞에, 모든 분석도구와 틀은 현재로선 무의미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운동권’은 실천에서 세련되게 개입(?)했지만, 관념에서 특유의 조급증과 강박을 통해 자신의 허접한 실력을 드러내는 꼴불견을 연이어 연출하고 있다. 가두의 촛불에서 광야의 들불로 번져가는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지식인들의 어설픈 훈수는 명백한 현실을 호도하고 스스로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촛불 승리, 2MB 완패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소고기 촛불은 이미 들불이 되었다. ‘괴담’과 ‘유언비어’ 등 이데올로기 공세와 연이은 관료주의적 협박으로 잠잠해질 줄 알았던 촛불은 꺼지기는커녕, 나름의 발전법칙을 보여주면서 진화하고 있다.

촛불의 존재 자체, 아니 그 확산으로 촛불은 이미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영어몰입교육, 대운하등 정치쇼로 보수정권의 지배체제를 굳히려던 이명박은 대선에 이은 총선의 압도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한미FTA와 노동유연화 공세를 빼면 집권 내내 무기력했던 노무현의 뒤를 충실히 따르게 되었다.

이명박은 칼을 꺼내기도 전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온갖 거짓말로 변명하기에 급급하지만, 약발은 먹히지 않고 있다. 촛불 승리, 이명박 완패! 설사 촛불이 꺼진들, 실추된 이명박의 권위는 그를 청와대 세입자 신세를 유지시켜주면 다행인 형국이 되었다.

남미의 ‘잃어버린 10년’(a lost decade)을 흉내 낸 한나라당의 선거구호는 누가 잃어버린 10년을 단번에 되찾는지 아주 간결하게 보여주는 촛불의 위력 앞에 그 기만성을 드러냈다. 촛불은 부실한 민주화와 신자유주의의 잃어버린 10년을 정권교체(?) 100일 만에 날려버렸다. 촛불 앞에 이명박은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다. 청와대 입주기간만 문제다.


이명박의 대선 승리이후 이명박 정권의 성격과 향후 한국사회의 진로와 전망에 대해 열띠게 토론했던 지식인들의 노고는 촛불이 실천적으로 극복했다. 그 지식인들은 다시 촛불의 성격과 전망으로 토론주제를 바꾸고 있다. 어쨌든, 한국사회의 진로는 이명박이 아니라 촛불에 달렸다.

촛불은 계급투쟁!

한우를 먹는 계급에게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FTA 시대의 요청이자 동시에 한우를 먹을 수 없는 계급에 대한 나름의 배려였다. 정 싫으면 먹지 말고. 그러나 한우 못 먹는 계급이 열 받았다. 투쟁의 전위는 여학생과 열혈 네티즌이었다.

한국사회에서 계급의 선은 여러 가지로 그어지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소고기였다. 과거 집 문제로 유가계급과 무가계급으로 나뉘었던 한국사회는 이제 FTA 시대를 맞아 한우 먹는 계급과 미친소 먹는 계급으로 나뉘게 되었다. 먹든지 말든지. 광우병 걸리는 건 복불복! 물론, 한우 먹기를 포기한 계급이 과연 촛불에 시민권이 있는지에 대한 지적도 있지만.

한우를 먹는 자는 거리에 나서지 않는다. 경찰력과 정치력, 언론의 공세로 촛불을 끄지 못하느냐 타박할 뿐이다. 이른바 뉴라이트와 극우집단이 지배계급의 파쇼 선봉대로서 힘겹게 촛불에 맞서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이 청와대에 있는 한, 역부족이다. 아무리 조중동의 엄호를 받아도 동력이 없다.

일각에서 촛불의 성격을 규명하기에 급급하다. 다중론자 또는 자율주의자들이 철만난 듯이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이런 성격논쟁은 한가하기 짝이 없다. 촛불 건너편 저들은 철저한 계급적 본능으로 똘똘 뭉쳐 촛불 죽이기에 올인하고 있다. 촛불의 계급성을 부정하는 한가한 논란을 보면서 저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촛불은 새로운 운동권

촛불이 시작되자 이에 대한 전방위적 공세는 시작되었다. 물리력이 동원되고 언론이 융단폭격을 가하고. 끊임없이 촛불의 배후를 언급한다. 그러자 배후가 나서서 밤샘시위에 김밥을 건넨다. 폭발하는 촛불의 해학과 끼는 새로운 투쟁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독재에 맞서, 생존권을 위해 투쟁한 운동권 없이 새로운 운동권이 나올 리 없다. 그들은 일반시민, 네티즌, 다중, 대중 등 뭐라고 이름 붙이든 새로운 운동권이다.

소고기란 촛불의 의제도 의제지만, 직접행동과 민주주의, 자발성은 촛불의 새로운 아이콘이다. 집행부의 의지에 따라 통제되는 집회와 행진, 간혹 벌어지는 대치와 전투 등 기존 운동권의 전술이 갖는 한계를 넘어, 가두진출과 72시간 무박투쟁까지 새로운 다양한 대치전술이 시험되면서 새로운 운동권의 정체성과 새로운 저항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정작 촛불을 화나게 하는 건 촛불이 새로운 운동권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사실은 아니지만, 조갑제나 이문열 등 파쇼 이데올로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운동권의 배후를 반미세력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촛불과 운동권을 분리하는 점에서 일부 운동권 또는 지식인들과 공유하는 정서이다.


촛불과 운동권의 만남, 그 역사적 의미

촛불의 백미는 운동권과 새로운 운동권의 만남이다. 5월초 첫 촛불은 운동권을 경계했다. 촛불은 운동권과는 다른 무엇이라는 강박을 노출했다. 그리고 촛불에 편승하는 세력을 인터넷을 통해 심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촛불은 진화했다. 촛불은 운동권 강박관념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촛불은 새로운 운동권이었다. 소고기는 촛불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로 확장했고, 운동권은 자기 의제를 던졌다. 촛불은 거리에서 하나가 되었다. 이제 촛불과 운동권은 분리된 무엇이 아니라 뒤섞여서 48시간, 72시간을 함께 뛰면서 외치고 토론하는 하나의 그 무엇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광우병대책위가 촛불과 운동권의 만남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대책위는 촛불에 얹혀있을 뿐이다. 대책위는 촛불을 멈출 능력도, 지도할 능력도 없다. 대책위를 다 구속한들 촛불이 멈출 것인가? 대책위의 실수와 한계는 순간순간 노정되고 촛불의 날카로울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그렇다고 촛불과 운동권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단하기 어렵다. 민주노총의 어설픈 대응이나 일부 운동권의 촛불-운동권 이분법은 이 만남의 의미를 축소하고 촛불의 미래에 걸림돌이 된다. 촛불과 운동권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이번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운동으로 확장-진화해야 한다.

비폭력의 정치학

촛불은 처음에 비폭력을 기조로 했다. 그러나 그 비폭력 개념은 상대적이다. 촛불은 진공의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적 공간은 폭력을 수반한다. 국가폭력, 경찰력으로 표현되는 정부의 이른바 공권력은 촛불에 대한 그 본질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른바 정권과 공권력은 단지 새로운 현상과 진압대상에 대한 당혹감으로 흔들렸을 뿐이다. 촛불이 진화하고 커지면서, 경찰은 촛불에 가감 없이 힘을 시험했고, 초기에 가볍게 진압할 수 있으라는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촛불의 완강함에 밀려 후퇴했다. 거대해진 촛불을 무력으로 누르려는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인도의 순수 비폭력 촛불은 거리의 촛불이 되었고, 이후 촛불의 도로점거는 경계를 살짝 넘었다. 전투경찰은 폭력으로 맞섰지만, 비무장 시위대를 진압할 수 없었다. 무박 2일, 무박3일 투쟁은 전투경찰의 체력을 소진시켰고, 보는 눈이 사라지면 무차별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비폭력의 폭력은 한수 위였다. 지난 2달 동안 비폭력의 정치는 가두를 매개로 끊임없이 변화했다. 그 수위는 절묘한 것이었다. 맹목적 비폭력은 넘어서되, 공권력과 미친 언론의 폭력 이데올로기가 힘을 얻지 못할 정도로 수위를 유지하면서, 가두의 국가폭력을 수세로 몰아넣은 전술구사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68혁명과 촛불

일각에서 이번 촛불을 한국판 68혁명으로 표현한다. 양자는 표면적으로 유사성을 갖는다. 단 68혁명을 문화적으로 해석할 때 그렇다. 권력에 대한 조롱, 넘치는 끼와 자발성, 직접행동, 민주주의의 확장 등은 1968년 5월 파리에서 또 프라하의 봄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제도적 권위주의에 맞서 해방의 공간을 창출했을 때 나타났던 특징이다.

그러나 촛불에는 68을 특징짓는 반자본주의, 국제주의는 없다. 비판이 아니라, 맥락이 다르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촛불의 확장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자본주의를 부정, 거부하는 정치세력과 정치적 선전선동이 부재했던 한국의 맥락에서 갑자기 반자본주의가 촛불로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하다.

  68혁명 당시 포스터

촛불은 확실히 한국적이다. 오히려 섣부르게 68을 바로 대입하기보다는 거시적으로 전쟁과 4.19, 유신과 80년 민주화의 봄, 광주항쟁과 87년 6월항쟁, 7-8-9월 노동자대투쟁, 96-97총파업, 1997-98년 IMF 경제위기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역동적 변화과정, 그것을 관통하는 계급투쟁의 발전 속에서, 미시적으로 2000년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정치적 동원(월드컵, 노사모 등)의 정치학을 매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촛불의 과거가 아니다. 일차적으로 촛불의 현재가 중요하고, 미래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촛불은 완벽하지 않다

일각에서 운동권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한탄하지만, 촛불은 완벽한가? 촛불과 운동권이 절묘하게 결합했어도 촛불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대책위는 촛불의 지도부도 아니지만, 그들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명박이 대책이 있을까?

어쨌든, 촛불도 완벽하지 않다. 6.10을 통해 전국적 현상임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촛불은 서울중심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전국적 현상이 된다면? 지방에서 불이 붙으면? 미약하지만, 전국적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데 운동권의 역할은 중요했다. 그러나 갈 길은 불확실하고 여전히 멀다.

촛불이 운동권의 한계를 창조적으로 넘어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촛불이 운동권을 대체하지 못하고, 또 대체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촛불과 운동권의 만남이 어떤 시너지를 만들 것인가와 그 내용이다.

운동권과 지식인의 자학 신드롬

촛불을 어쩌지 못하는 운동권과 지식인들의 훈수는 한마디로 역겹다. 불쾌하다. 촛불을 갖은 개념에 껴 맞추고, 한마디씩 거든다. 물론 뭐라 하던 그들의 자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촛불과 그 실천이지 개념이 아니다.

경찰력과 물리력, 국가기구도 어쩌지 못하는 촛불을 사실상 아무 자원도 수단도 없는 운동 프로페셔널이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말로 조질 뿐이지. 그렇다고 네티즌 운동권이나 촛불이 또 거창한 전략이나 목표가 있나? 없다. 누가 맞는 말을 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실천하는 것이다.

자학은 악취미다. 경찰버스에 불 지르려던 실업자를 경찰에 넘기는 옹졸한 준법주의나, 전경의 군화발에 밟힌 서울음대생과 구속된 노동자들에 대해 갖는 은밀한 계급적 이중 잣대에 대한 처절한 자기비판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굳이 말을 거들려면 궁색한 자기변명이나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려는 지혜를 말하라. 아니 그건 안 해도 좋으니, 촛불을 들고 경찰폭력에 맞서라.

새로운 운동권과 운동권을 가르는 지식인과 운동 프로페셔널의 이분법은 촛불의 배후를 운운하면서 반미투쟁으로의 변질을 우려하는 미친 파쇼언론보다 반동적일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허술한 성격논쟁이나 자학이 아니다. 훈수 두는 좌파가 아니라, 촛불과 함께 하는 좌파(座派), 수도의 밤하늘을 지키는 깃발, 촛불폐인이 더 소중하다.

강박을 버리고 즐겨라!

촛불은 이미 승리했다. ‘잃어버린 10년’의 반동적 공세는 시동도 걸지 못한 채 꺼졌다. 반란은 학습된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은 꺼뜨릴 수 없다. 촛불은 꺼지더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촛불이 아닐 수도 있다.


촛불이 한국사회와 정치에, 아니 운동권에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다. 일부에서 촛불을 일회성으로 바라보는 ‘구좌파’스런 의혹과 자격지심이 읽힌다. 그러나 촛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최근 종교계의 가세로 촛불정세가 긴급해지고, 소고기의 공범인 자유주의세력도 은근히 머리를 디밀고 있다. 촛불의 정치력이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촛불은 계속된다. 설사 꺼지더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촛불이 꺼지지 않는 만큼, 민주주의와 해방의 유토피아는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한우가 특정한 계급에 독점되지 않는 그날까지, 미국의 소들이 잔혹한 사육으로부터 해방되는 날까지, 모두가 한우를 돈에 구애받지 않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계급이 폐절되는 날까지 촛불의 진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덧붙이는 말

원영수 님은 진보평론 편집위원입니다. 이 글은 <미디어충청>과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

운동권 , 촛불집회 , 68혁명 , 비폭력 , 이명박 , 쇠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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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u

    푸헐, 미국소와 한국소 사이의 계급은 언제 철폐됩니까?

  • 머리가 맑아지는

    좋은 글 입니다. 촛불에 대한 자화자찬에도 질렸거니와 철부지 같은 대책위의 자충우돌에도 지치고 피곤했는데, 좋은 글이 시야를 넓혀 주는 군요.

  • 푸헐아

    내용에 문제가 있거든 알기 쉽게 비판해서 독자들도 좀 깨우쳐다오. 소울음 소리만 내지말고..딸딸이는 집에 가서 치거라

  • 덜덜덜

    앞에는 뭐 제목부터 찬사라고 했으니 별 내용없는건 당연하다고 치고 마지막 문장 개그 입니까? 누구나 한우 먹을 수있도록 계급 이 폐절되는 그날까지? -_- 먹는 것의 윤리문제 우리가 뭘 먹는가가 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이 문제는 무조건 계급이라는 말만 끼워넣으면 되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빠지는군요. 이건 지구인적 각성의 문제이며 그러므로 국제주의적일 수 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대체 뭐가 좋은 글이라는건지 이해할수 없습니다. 대체 계급과 촛불/ 운동권과 촛불/ 비폭력과 촛불이라는 문제에서 제대로 설명한게 있는지. 그냥 만났다. 그냥 이것 계급성 문제다. 비폭력/ 폭력의 구분의 경계를 잘 타고 있다. 이딴 소린데. 이거에 대한 그럴듯한 논증도 없고... 분석도 없고.. 뭐 그냥 본인 취향대로 쓰는거 아니신지.. 특히 계급... 이부분을 꼭 쓰고 싶어서 안달이었던거 같은데. 뭐 그닥 설득력있다는 생각은 안들지 않나요? 본인도? 그러니까 그런 논의가 안먹히지. 무조건 계급이라고 붙이면 좋은건가. 차라리 자율주의자들과 제대로 한판붙던지.. 이건 계급투쟁문제야라고 그냥 선언하고 안도 하고 싶었던거 뿐인지요?

  • laron

    촛불은 계속되어야 한다!
    -청운 초등학교 4학년 2반 김초롬

    촛불은 건전하다.
    촛불을 기존 운동권/지식인의 잣대로 평하지 말라.
    촛불을 타오르게 해야 한다.
    촛불은 계급투쟁이다. 이명박 집권계급에 맞서자.



    아주 훌륭한 창작시입니다. 2008년의 촛불을 어린이의 시심을 담아 담백하고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선생님은 별 네 개를 주고 싶어요. 참 잘했어요.

  • won

    제대로 오바하고 있군.

  • n

    X맨인가요? 낄 때 안 낄 때 낄 데 안 낄 데 못 가리고 계급 따위로 규정짓고 나서니까 조갑제 따위가 계속 행세하는 거다 싶네요.

  • 호오

    계급이라면 이를 가는 분들이 이외로 많군요. 유행이 지난 것들에도 진실이 있는 법..

  • 어휴

    계급이라면 이를 가는거라고 받아들인다는건 이 글에 문제를 전혀 못는낀다는것? 계급 중요하죠. 근데 이글에서 계급이 쓰인맥락도 우습고 슬프다는것뿐..

  • 아덜떨어진새끼

    누가 계급얘기에 이를 간다고 그러냐? 계급을 한우먹는 사람과 미국소 먹는 사람 이렇게 나누는게 어처구니 없으니 그러는거 아냐? 세상 어느 좌파가 소비 수준, 그것도 소고기 하나 가지고 계급을 나누디?

    촛불에는 비계급적인 모습과 계급적인 모습이 마구 뒤섞여 있는데 이걸 계급투쟁이라고 억지로 규정하려니까 한우 가지고 계급 나누는 억지를 부리게 되는거 아닌가? 영양가 없다

  • 바보들

    바보들아. 왜 계급 투쟁이라고 하면서 "fta시대"라고 했는지, 한국사회에서 정세적으로 "계급의 선"이 어떻게 그어졌는지에 대한 의미를 알고 떠들어대는 말인가. 으이구. 천박한 문제제기 하곤.

  • 우와

    2MB의 생각은 국민들이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먹었으면 좋겠다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문제가 됐는데, 이 분의 깊은 뜻은 국민들이 값싸고 질좋은 한우를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계급폐절을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한국에서의 소 생산량을 대폭 늘려야한다는 얘기. 잔혹한 사육은 안되니까 미국식 공장형 축산 직전까지만 늘리고. 곡물사료 수입도 대폭 늘리고. 음, 지구반대편 기아인구도 조금 늘어나겠네요. GM작물은 늘고. 열대우림은 줄고. 그래도 계급폐절을 위해서라면, 아.. 깊은 뜻. @.@

  • -_-

    자율주의자들의 난동은 경계대상인건 확실이지

  • -_-

    그리고 이게 계급 문제지 누구 문제인가? 이건희 손자애들도 촛불시위 나와? 결국 촛불시위 나오는건 시민이라는 외피를 두른 노동자 자영업자 농민 아닌가?

  • 꼬미

    촛불과 현상황에 대해 비교적 잘 정리한 글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문구가 딱 걸리네요.."모두가 한우를 돈에 구애받지 않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라는 말 말이에요.. 그것도 넘어서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 때, 실제 계급철폐의 길이 더 가까울 것이란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