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파업통신지원단에서 정보인권 지키기로 10년

10주년 맞은 진보네트워크센터

지난 11월 14일 정보인권 단체인 진보네트워크센터(진보넷)는 10주년 기념식을 했다. MB의 인터넷 통제 3대 악법에 맞서 분주한 가운데서도 다른 10년을 준비하기 위한 기념식이었다. 진보넷은 이번 10주년을 맞아 ‘자유와 공유의 연대기’라는 10년 백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진보넷 10주년 홍보물에는 “파업을 하면 서버를 지키며 함께 밤을 샜습니다. 정부의 게시물 삭제 요구에 당당히 거부해 왔습니다.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네트워크“라는 문구가 인상 깊다. 밤을 새며 지켜왔던 독립네트워크 10년을 돌아본다.

총파업통신지원단, 그리고 진보네트워크센터

96년 12월,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맞선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 언론이 없던 시기. 보수언론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을 철저히 왜곡 보도했지만 진실을 알리는 통로는 거의 없었다. 2008년 촛불에 대한 공중파와 보수 언론의 보도에 촛불 시민이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왜곡과 무관심이 있었다. 소위 진보적인 언론은 거의 전무 했던 시절이라 왜곡보도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컸다.

그래서 당시 정보통신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 몇이 뭉쳤다. 이들은 우연히 피시통신 상에서 서로 채팅을 하다 통신지원 활동을 해보자고 했다. 몇몇 단체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통신연대를 중심으로 정보통신운동 활동가와 관심있는 시민이 뭉쳤다. ‘노동악법·안기부법 전면 철회를 위한 총파업통신지원단’은 그렇게 생겨났다. 그리고 통신지원단은 주류 언론이 담지 않는 소식을 각 피시통신에 알려냈다.

통신지원단은 총파업 속보를 각 통신망의 플라자(자유게시판)에 전달하는 역할에서 부터 매일 속보를 정리해 뉴스레터를 발송했다. 홈페이지도 만들고 영문 뉴스레터와 영문 홈페이지도 제작했다. 영문 홈페이지는 수많은 국제 연대의 성과를 일구었다. 당시 해외에서 국내 총파업 소식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통로가 통신지원단 영문 홈페이지가 되었다. 해외 노동 단체들은 통신지원단의 영문 뉴스를 읽고 한국대사관 앞에서 지지 집회를 하기도 했고 연대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다 통신지원단 내에서 현장에 나가 누군가 속보를 올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촛불 시민처럼 자원 활동가들이 모였고 실제 파업현장에 나가 속보를 올렸다. 주류 언론의 기사처럼 정제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의 목소리가 담긴 생생한 뉴스가 통신망을 타고 퍼졌다. 그해 총파업통신지원단은 언론노조로부터 민주언론상을 받았다. 아직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 통신공간에서 지금의 시민기자단 같은 활동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10년 전 진보네트워크센터의 모티브는 이렇게 시작했다.

오병일 진보넷 활동가는 “이렇게 통신지원단의 성과는 97년 말 노동미디어 행사로 이어졌고 미국, 영국 등의 노동넷 활동가들이 오면서 한국에서도 노동넷 같은걸 만들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진보넷 설립의 계기를 설명했다. 그러던 중 당시 피시 통신 참세상을 운영하던 김 모씨가 통신연대 활동가들에게 피시통신 참세상을 기증할 테니 진보네트워크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98년 2월부터 그 제안을 받아 설립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설립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그냥 단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피시통신 참세상이라는 네트워크 상에 여러 사회단체들이 들어와야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인 연대 활동을 하시던 고 김진균 선생께서 적극적으로 나섰다. 98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모임을 갖고 2-3개월 동안 각 단체 운영위 등을 찾아가 독립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정보화 열풍이 불던 때라 많은 단체들이 취지는 공감하지만 독립네트워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감이 없었다. 대부분 단체들이 나우누리나, 천리안 같은 상업 피시 통신망에 CUG(폐쇄이용자그룹/ 현재의 인터넷 카페와 같은)를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단체들은 진보넷이 시스템의 안정성과 서비스의 질을 보장해 줄 수 있는가라는 의구심을 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98년 11월 14일 진보네트워크센터를 설립했다.

설립당시 진보넷은 피시통신 참세상을 기반으로 동호회 개설, 이용자 가입처리, 정보변경, 게시판 개설의 운영에 많이 매달렸다. 주로 통신 서비스사업이 활동의 주를 이뤘다. 당시 참세상 이용료가 3,300원 이었고 총 이용자 700여 명 중 유료이용자는 300여 명이었다.

초기에는 네트워크로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이 중요한 사업이었다. 99년 초 민주노총이 CUG를 나우누리에서 피시통신 참세상으로 옮기면서 99년 말에 이용자가 2천 명 수준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2000년을 전후로 나우누리, 하이텔 등 피시 통신에서 다음이나 프리챌 같은 인터넷으로 전환이 시작된다. 초고속 인터넷 망의 급속확산으로 인터넷이 보편화되자 피시통신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진보넷도 2000년 11월 14일 피시통신에서 웹 기반으로 넘어가게 된다. 지금의 www.jinbo.net(진보넷 메인 홈페이지)은 이때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2004년 진보포털 전략, 열악한 재정과 빠른 인터넷 환경 변화, 그리고 독립네트워크

진보넷은 2004년 본격적으로 진보 포털 전략을 세운다. 그러나 오병일 활동가는 진보 포털 전략이 절반의 성공만 거뒀다고 말했다. 그 이전까지는 진보넷으로 사람들을 모으기 보다는 기본적인 서비스와 진보진영의 보안, 인터넷 검열 문제 등에 집중했다.

“포털처럼 사람들이 모여 담론이 형성 되는 지점이 있다. 우리가 그런 광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을 놓쳐 왔다. 그때 진보 포털 전략을 세웠다. 당시 웹 메일과 개인이 쓸 수 있는 메신저 등을 기본으로 제공하고, 사회운동 정보가 특화된 검색서비스를 계획했다. 또한 미디어 참세상으로 뉴스.영상 콘텐츠 전략을 세웠다. 이 세 가지 축으로 계획 했으나 절반의 성공이었다”

절반만 성공인 이유는 뭘까. 우선 검색 같은 경우 많은 자본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작은 검색을 하는데도 검색 엔진이 수 천 만원이 필요해 무산됐고 메신저 역시 개발하다 포기했다. 결국 그 전략에서 남은 것은 진보블로그다. 진보포털 전략은 2005년 블로그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 전략으로 바꾸는 것으로 결론 났다.

“지금 평가 해보면 우리가 어떤 기획을 세상의 변화에 맞게 바꾸면서 방향은 나름 잘 세웠는데 그걸 뒷받침할 기술적·재정적 역량의 한계가 있었다. 돈이 없어 자체 기술로 개발하는데 2-3년 걸리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했지만 많은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많은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진보넷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진보넷 메일링리스트와 웹메일, 호스팅 등의 진보적인 공동체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기술적 성과다. 특히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정보 제공 요청에 진보넷은 협조하지 않는다. 2002년 발전 파업때는 서버 압수수색에 맞서 막아내기도 하고 수배된 노동자들이 포털 싸이트의 이메일 접속시 위치가 파악되는 것과는 별개로 진보넷 메일은 경찰 수사에 자의적으로 협조하지 않음으로써 안전했다. 진보운동에서 진보넷의 기술력은 자본의 기술력에 비해 인력과 재정의 한계로 많이 부족했지만 그 역할을 인정받기도 했다.

정보인권 지키기 10년, 새로운 10년을 위한 고민중

진보넷은 초기 사회운동 단체들의 정보화에 대한 교육과 서비스 업무를 주로 하면서 활동가들은 자기 정체성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주로 하는 일이 전화 받고, 서비스를 개설하거나 이용자의 문의를 해결해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단체들과 활동가들 역시 상당부분 진보넷을 서비스 업체로 인식 하곤 했다. 2000년에 진보넷은 운동단체로의 성격강화를 위해 정책국을 신설하고 본격적인 검열, 통제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또한 다른 축으로는 미디어 운동의 한 진지로서의 역할도 해나간다.

미디어 운동은 참세상 방송국을 통해 시작된다. 2001년 4월 10일 대우자동차 구조조정 저지에 나선 노동자들이 경찰 기동대의 방패와 군홧발에 처참하게 짓밟힌다. 이날 경찰의 폭력 행위는 언론의 무관심으로 묻힐 뻔 했다. 그러나 진보넷 참세상 방송국이 함께 했던 ‘2001 대우차 총파업 투쟁 영상중계단’(http://dwtubon.nodong.net)은 이 영상을 찍었고 동영상은 삽시간에 퍼졌다. 단지 글과 사진으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잔인했던 경찰 폭력은 김대중 정부의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이 사건은 독립적인 미디어 활동이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과 결합하면서 미디어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었다. 96년 총파업 통신지원단처럼 노동자 민중의 소식을 전하고 정권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역할은 이렇게 진보넷이 가진 미디어 운동적 성격으로 이어졌다.

진보넷은 그리고 2002년을 거치면서 다시 기술적으로도 노동 사회운동진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많은 단체와 노동조합의 서버를 호스팅 하면서 노동자 파업시 진보넷이라는 독립네트워크의 장점이 나타난 것이다. 경찰의 무분별한 정보제공 요구와 게시물 삭제요구에 맞서 싸우며 노동자들의 정당한 목소리가 네트워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싸웠다.

정보운동과 독립네트워크, 새로운 10년을 위해

독립네트워크 10년, 그리고 수많은 정보인권 이슈에 맞서 싸웠던 10년이지만 진보넷은 앞으로에 대한 고민이 더욱 크다. 이미 2004년 진보포털 전략이 절반의 실패였다는 것은 독립네트워크 전략의 절반의 실패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촛불 집회당시 많은 네티즌들이 자본이 만든 네트워크에서 민주주의의 광장을 만들었지만 상대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진보넷은 조용했다. 논쟁과 소통을 얘기한 진보넷이라는 독립적 공간에서 대중적 접점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촛불로 인해 역설적으로 독립네트워크의 필요성이 절실하기도 하다. “오히려 지금은 아고라에 있던 사람들이 독립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나오는 시점이다. 그래서 한토마나 민주주의 2.0등 검열로부터 자유로운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거기서 진보넷은 대안으로 인식이 안 되고 있다” 아직 대안으로 인식이 안 되는 진보넷의 고민은 앞으로 새로운 10년에 어떻게 담아 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좀 더 대중적인 네트워크가 되겠다라고 한다면 거기에 맞는 조직체계, 재정, 기술력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운영시스템 자체가 달라진다. 네트워크가 커질수록 독립성이 약화 될 수도 있다. 반면 대중적인 네트워크가 아니라 다른 문화를 가진 운동사회 소통을 위한 독립적인 네트워크로 남겠다 이런 설정을 할 수도 있다”

일단 진보넷은 지금 하고 있는 촛불과 관련한 인터넷 통제 법안 대응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오병일 활동가는 “내년 총회에서 단순히 2009년 계획이 아니라 향후 몇 년을 바라보고 장기적으로 활동과 조직의 전망 잡아 가겠다”면서 “현재 상황에서 진보넷의 역할과 필요한 부분 등을 고민하고 미디어, 서비스, 정책 등의 구분도 평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재정구조, 활동가 충원, 재생산 문제 등을 어떻게 풀어갈지도 고민”이라고 밝혔다. 모든 전망을 열어 놓고 다 뒤집어서 평가하며 새로운 10년을 준비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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