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철의 기품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구속되면서' 글을 보고

기자는 오늘만큼은 오세철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운영위원장을 존경하기로 했다. 오세철 교수는 17일 구속될 걸 염두에 두고 A4 한 장 분량의 필서를 남겨놓고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갔다. 글에는 사회주의운동의 대중화의 갈망과 지난 20년간 지켜온 운동의 신념이 오롯이 담겨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이번에는 구속될 걸로 보았다. 영장이 재청구된 5명 중 전원은 아니더라도 2-3명은 구속될 거라는 예상이었다. 경찰이 기필코 구속시킨다며 두세 달 공을 들였고, 이명박 정부의 입김도 작용할 거라고 봤다. 촛불 이후 공안탄압 분위기에다 최근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회원 4명이 이미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바 있었고.

염치없지만 오세철 교수가 구속되길 바랬다. 취재 과정에 그가 남긴 필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구속되면서’를 독점해놨기 때문이다. 독점 소스는 취재를 하면서 얻는 일종의 덤인데, 결과적으로 구속되지 않아 안타깝기(아깝기) 그지 없다.


20년이라고 했는데, 따지고 보면 오세철 교수의 운동 경력은 기자와 같다. 오세철 교수는 1987년 6월항쟁을 겪으며 진보운동, 그러니까 사회주의 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943년에 태어나 1975년 경영학의 조직행동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정치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조직행동 이론, 사회심리학, 연구 방법론, 한국 사회변동과 조직 등을 강의했다.

1990년 오세철 교수는 장기표, 김문수, 이재오 등과 민중당을 도모했고, 1992년에는 노원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 민중회의, 민중정치연합, 정치연대, 노동자의힘의 대표를 맡으며 연구자이자 활동가로서 좌파운동의 대표 격으로 활동해왔다. 지난 2004년에는 정년을 5년 앞두고 명예퇴직해 본격적인 활동가로의 삶을 선택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부침과 고비를 겪었겠는가. 오세철 교수의 이력은 지난 시기 좌파운동의 흥망의 세월을 웅변한다. 기자는 오세철 교수의 정치적 행보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1997년 대선 당시 국민승리21의 개입을 통한 전술에 요지부동 반대했고, 2002년 대선 시기에는 공투본-공선본(신자유주의 반대 공동투쟁전선과 공동선거운동본부) 전술을 비판적으로 대했다. 당시 공투본 전술의 성패는 곧 좌파운동이 대중적으로 유의미한 흔적을 남기며 탄력을 받느냐 그렇지 않고 꾀죄죄한 써클운동으로 전락하느냐를 가르는 분기점이 될 것이란 게 중론이었다.

이 즈음 오세철 교수는 대표로 활동하던 노동자의힘을 탈퇴하며 사회주의정치조직 건설을 주창했다. 오세철 교수의 입장에서만 보면 올해 1월 출범한 사노련은 그의 사회주의운동의 성과가 압축된 조직인 셈이다.

사노련 영장재청구와 거듭된 기각. 이 사태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임대환 남대문경찰서 보안과장은 어젯밤 M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야 자신있으니까 한 거지. 충분하다고 보고. 이런 건(사노련) 놔뒀을 때 계속 노동자들이 모이고 조직이 확산되면 국가 변란인데 그때는 늦는 거지”라며 목멘 소리를 했다. 공안 계통에 꽤 실력자로 알려진 그의 체면이 상당히 구겨진 장면이다.

법원의 ‘소명 부족’ 판단은 ‘실질적인 체제 위협이 되지 못하는 조직’임을 거듭 확인한 의미도 없지 않다. 역시 돌아볼 일이다. 4만9천 점이라고는 하나 거품이고, 경찰이 보강 수사에서 주목해 내놓은 껀이라고는 사노련 총회, 사노련 회원의 비정규직공동투쟁단 회의에서의 발언, 사노련 회원의 현대차노조 대의원대회 참가 정도. 심지어 기자가 1차 영장 기각 후 양효식 편집위원장을 인터뷰한 내용조차 범죄사실로 엮어놓았다 하니.

오세철 교수는 17일 기자회견에서 “지난 기각 이후 현장 결합도 강화했고, 신문도 발간하는 등 더 열심히 싸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사법부는 대한민국의 사회주의운동이 체제를 위협할 수준이 아니라는 판단을 거듭한 셈이다. 사노련에 대한 판단이 이러하다면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유사한 단체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을 지다.

물론 그렇게 볼 일만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상식에 한참 모자라 중구난방 탄압을 일삼기는 하지만, 부르주아민주주의 발전에 따른 사법부의 최소한의 독립적 기능, 그리고 사회주의를 하나의 이념과 정치적 경향으로 보고 포용하는 시민사회의 성숙 등이 맞물려 빚어낸 시대적 자화상의 의미도 있는 거니까.

본론으로 돌아가서, 기자는 오늘만큼은 오세철 교수를 존경하기로 했다고 썼다. 17일 기자회견 후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서울중앙지검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기자는 오세철 교수와 동행했다. 오세철 교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경향신문을 말아넣은 손가방 하나 달랑 들고 있었다. 담담한, 의연한. 그렇게 구속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기품(아우라)이 있는 것이다.

오세철 교수는 사노련공대위 집행위원회에 구속을 예비하고 필서를 남겨놓았다. 어쩜 이렇게도 거시적이고 총체적이고 군더더기가 없을까. 글은 격문이라 잔잔한 감동을 주지는 않으나, 공권력의 폭력 바로 앞에 서서 조금도 움츠린 기색 없는, 초연하게 자신의 신념을 유포하는 배짱. 고집을 꺾지 않는 사회주의운동 20년의 관록이 배어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좌파나 우파나 할 것 없이 실리 하나 따내는 걸 실력으로 치환하는 운동 풍토를 고려하면 유쾌상쾌한 글이 아닐 수 없겠다.

오세철 교수는 “작은 실천이나마 열심히 해왔고, 그 길만이 우리 사회를 노동해방의 희망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해왔다”고 했다. 지난 영장 기각 후에도 사회주의적 실천을 열심히 했다고 썼다. 계속해서 “저희들은 몸이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감옥 안에서 열심히 사회주의 투쟁을 할 것”이니 “밖에서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하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보다 전면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실천을 가열차게 해주시기를” 호소했다.

필서에서 보여준 오세철 교수의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적 실천에 대한 신념, 기자는 진심으로 존중하고 존경하기로 했다. 그런데 존중과 존경이 곧 오세철 교수의 활동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뢰, 그것은 오세철 교수가 표방하는 사회주의적 실천이 시민사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도달할 때, 우리 사회의 급진적 발전을 추동하는 동기를 부여할 때, 그 때 가서야 비로소 생기기 마련이다.

영장재청구를 한 검경에 맞서며 오세철 교수와 사노련 회원들이 열어놓은 사회주의적 실천의 작은 지평, 당대 활동가 모두의 자산으로 삼아 마땅한, 흐뭇한 일이다.

오세철 교수의 허락을 받아 글을 공개한다.

  17일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영장재청구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오세철 교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구속되면서

오늘 저는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동지들과 나란히 부르주아권력의 하수인인 검찰과 사법부의 손에 구속됩니다. 맑스 이후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권력에 의해 체포,구금되고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암살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투쟁과 혁명의 주체가 되는 노동자들을 억압, 착취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하는 야만의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가 해방되고 궁극적으로 인간이 해방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지난 160여 년 동안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은 투쟁하는 노동자계급과 함께 온 몸을 받쳐 싸웠고 앞으로도 싸울 것입니다.

야만의 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를 몰아넣은 자본주의는 상승기를 마감하고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며, 그 이후 1929년 세계 대공황과 파시즘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라는 또 한번의 살육과 야만의 시대를 겪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전쟁 복구와 국가 부채를 통한 20여 년간의 일시적 부흥이 있었지만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 만으로, 자본의 이윤증식 만으로 체제를 유지하려는 21세기 자본주의는 인류를 가난과 생태적 재앙 그리고 전쟁으로 몰아넣으며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고 노동자와 민중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 오직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위기로 시작된 자본주의의 위기가 실물 경제와 소비를 위축시켜 대공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은 세계 경제의 위기나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 문명의 총체적 위기입니다.

우리 나라도 이러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명박 정권이 등장한 후 노동자에게 온갖 고통을 떠넘기고 자본가와 특권층만을 위한 국가 운영과 정책만을 양산하는 지금의 상황은 우리 사회를 암흑과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과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세계사적 인식과 문명사적 인식을 가지고 인류의 희망인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그 사상을 기반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은 실천이나마 열심히 해왔고 그 길만이 우리 사회를 노동해방의 희망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지난 번 영장이 기각된 이후에도 그러한 사회주의 실천을 열심히 했습니다.

대다수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향상시키려는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자들을 철폐되어야 하는 최대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으로 탄압하려는 이명박 정권과 공안기관은, 몇 사람의 사회주의자들을 구속하고 가둘지라도, 인류의 염원인 사회주의 사상과 그에 기반한 노동자의 투쟁을 결코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몸이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감옥 안에서 열심히 사회주의 투쟁을 할 것이며 밖에서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 하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보다 전면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실천을 가열차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정치사상의 자유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촛불 대중과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사회주의 승리 만세. 전 세계 노동자계급 단결 만세

2008년 11월 17일 오세철
태그

국가보안법 , 자본주의 , 6월항쟁 , 오세철 , 노동해방 , 사노련 , 사회주의 , 민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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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의회

    존경합니다. 동지의 지치지 않는 열정에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보여주는 실천을 따르겠습니다. 사회주의 승리 만세! 전 세계 노동자계급 단결 만세! 투쟁!

  • 투쟁!

    오교수님과 사노련의 영장기각을 보면서 사회주의운동의 전진을 예감합니다. 희망과 자신감을 주는 사건이고, 이 어려운 시기에 오세철님의 기품이 우리 노동자들의 가슴에 한 줄기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계속 당당히 투쟁해 주시기 바랍니다.

  • 스머프

    유영주 기자님! 독점취재 하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저 역시 오세철 교수의 활동과정을 돌이켜보니 기자님하고 비슷하네요. 그 역경의 세월 굽히지 않은 뚝심으로 여기까지 온것은 존경해 마지 않고, 독점취재가 빛을 발하지 못(?)해 안타깝지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그리고 기자의 글 쓰는 폼이 맛깔스러워 잘 읽고 간다는 인사를 남기고 갑니다..^^

  • 길남이

    오교수님의 사상과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신념을 가지고 지키고 실천하는 한 인간으로서, 견실한 노사회주의자의 기백과 절도를 느낍니다. 존경을 담은 인사를 보냅니다.

  • 영명한 판사께도 박수

    괜한 시비로 고초를 겪으신 오세철 교수님과 동지분들께 위로와 존경을 표합니다.

    경찰과 검찰의 끈질긴 잡아넣기 모략에도 불구하고 영명한 판단으로 억울한 희생자를 구한 판사께도 존경을 표합니다.

    우리나라 법무부 정말 답답하고 꼴보기싫은 기관이죠. 이렇게 소신 넘치는 판사님들이 그나마 땅에 떨어진 법무부의 위신을 받치고 서계신 것 같습니다.


    이참에 한마디, 소신있고 분명하고 영명한 판사님들이 보다 많이(되도록이면 전원 다 이길) 나오길 바라며,

    법무부는 이런 훌륭한 판사들께서 <시지프스>와 같은 헛고생 하지 않도록 대대적으로 각성하고 바로 서길 권하고 또 권합니다.

  • 노동자

    기백과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