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의 탄생, 그리고 60년

[경계를 넘어] 폐기되어야 할 냉전의 부산물, 나토(1)

올해 4월 4일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가 창설된 지 60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난 4월 3일과 4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와 독일의 켈, 바덴바덴에서는 나토의 창설 60주년을 기념하고 나토의 정책을 논의하는 정상회담이 열렸고, 나토 회원국 정상들이 모여 아프가니스탄 증파와 나토 관할 영역의 확대 등을 논의하는 동안 회담장 주변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시위와 농성을 벌이고 나토의 해체를 요구하였다. [경계를 넘어]에서는 3회에 걸쳐 ① 나토의 역사와 현재, ② 21세기 나토의 군사행동과 팽창 전략의 의미, ③ 나토가 벌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주제로 한 글들을 통해, 나토가 미국의 군사동맹체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전쟁과 점령의 또다른 주체로서의 패권구도와 반전,반점령 운동에 있어서 왜 나토를 주목해야 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나토를 역사 속으로! [출처: 경계를넘어]
나토는 1949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북미 국가들과 서유럽 국가들이 맺은 군사동맹체제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미국과 소련이 주축이 된 냉전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미국은 서유럽을, 소련은 동유럽을 중심으로 정치와 경제적 지원을 통해 각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특히 군사력 경쟁에서 두드러졌는데,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나누어져 벌어진 냉전 하의 군사적 긴장은 유럽의 국가들이 안보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군사력에 기반한 국력 신장과 방위능력 키우기에 몰두하도록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력을 거의 소진한 상태였던 서유럽 국가들은 개별국가들이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만한 능력이 되지 못했고, 여러 국가들이 공동으로 방어를 책임 질 수 있는 군사동맹의 필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5개국은 1948년에 브뤼셀에서 조약을 맺고 서유럽 내 공동방위기구를 설립하게 되었다. 브뤼셀 조약의 핵심은 가입국 중 한 국가라도 무력 공격을 받게 될 경우에 다른 회원 국가들이 군사적인 지원과 그 외 다른 원조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브뤼셀 조약 가입국들은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소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 즉 미국과 손을 잡아야 했다. 미국 소련에 맞서 군사적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필요했고, 이듬 해인 1949년 브뤼셀 조약 가입 5개국과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이태리, 포르투갈,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이 워싱턴에서 군사 동맹을 맺고 나토를 창설했다. 나토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미국과 서유럽의 군사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나토 가입국들에게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갖게 하였고 나토의 동맹국들이 더 강력한 군사력과 방어계획을 갖추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토는 즉시 장기방어계획을 세우고 1952년 9월에 200개 군함과 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첫 대규모 합동 해상훈련을 실시했다.

  냉전시기와 냉전 후 나토 가입국 [출처: 경계를넘어]
나토가 적극적인 방어 체계를 갖추며 군사동맹체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하자 1954년에 소련이 나토에 가입하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소련이 밝힌 가입 이유는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토에 소련이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토는 소련의 가입 의도가 나토의 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함이라고 판단하고 소련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리고 나토는 1955년 5월 9일에 미국이 관할하고 있던 서독을 나토에 가입시켰다. 이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더욱 자극시켰고,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나토에 대응하는 군사동맹을 구성하는데 더 박차를 가했다. 곧이어 1955년 5월 14일에 소련과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아르메니아, 동독이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나토와 바르샤바조약이 양 축이 되어 냉전 시대 군사력 경쟁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다행히 냉전기간 동안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직접적으로 군사적인 충돌을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군사적 대립은-냉전 그 자체가 그러했지만- 언제나 전쟁의 위협을 서로에게 가했고 무리한 군비경쟁을 이끌었다. 유럽 전 지역에 서로를 겨냥하는 핵무기를 포함한 대규모 미사일 시설이 배치되었고 언제라도 지도자 몇 사람의 판단 하에 미사일이 발사될 수 있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긴장은 1991년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위기로 냉전이 막을 내리고 바르샤바 조약이 사실상 폐기되면서 역사의 한 장으로 묻혀버리는 듯 하였다. 하지만 나토는 오히려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에 속해있던 국가들까지 나토에 가입시키면서 유럽 전체로 영역을 확대해나갔다. 또한 비가입국의 분쟁에까지 개입하면서 나토의 성격과 목적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1993년부터 나토가 유고슬라비아에 경제제재와 무기거래금지조치를 취하고, 이후 발칸 분쟁에 적극 개입하여 1999년에 11주 동안 대규모 공습 작전을 벌인 것은 냉전 이후 새로운 나토의 첫 시도였다. 심지어 미국과 영국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토 가입국들은 발칸 분쟁의 개입과 같이 나토가 군사작전을 벌일 때 UN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에 한 목소리를 내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동맹체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설정하고 있다.

여기에 2001년에 발생한 9.11 사건은 "가입국 중 한 국가에 대한 공격은 모든 가입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나토의 공동 방위 목적을 크게 환기시켰다. 이후 나토 가입국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문제를 두고 또 한번 강하게 결집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2003년 4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과 함께 전투를 벌이는 다국적군인 국제안보지원군(ISAF, International Security Assistance Force)의 지휘권을 나토가 갖는 것에 모든 가입국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나토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나토가 유럽 밖에서 벌이는 첫 번째 군사작전이며, 또한 나토가 미군으로부터 이양 받은 작전 지휘권이 2006년에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나토 창설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군사작전이기도 하다.

  2009년 4월 3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반나토,반전 시위 [출처: 경계를넘어]

나토 60주년 정상회담장 밖에서 나토의 해체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외쳤던 주요 구호들 중 하나는 "나토를 역사로 만들어 버리자!"였다. 나토의 탄생과 그 동안 나토가 걸어온 길 자체가 왜 나토가 하루빨리 사라져야 하는 존재인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반 세기가 넘도록 냉전의 부산물로서 군비 경쟁의 도구로, 패권의 유지와 확장의 도구로, 안보의 논리로 모든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왔고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군사동맹체 나토. 나토가 더 큰 괴물로 자라나기 전에 나토의 존재를 역사 속의 한 페이지 속으로 가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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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 나토 , 냉전 , NATO , 경계를넘어 , 북대서양조약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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