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쿠바 그리고 헌법
쿠바 의료진은 아이티에 10년간 6천명이 체류했다
호세 스떼인슬레헤르José Steinsleger 2010.02.05 15:23
매체의 횡포는 거대한 진실 앞에 침묵한다.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12일 지진이 아이티를 휩쓸었을 때 쿠바 의료진은 이미 그곳에서 10년 이상 체류 중이었다. 또한 인류애적 지원이라는 지상 중계쇼의 불빛이 꺼졌을 때도 쿠바 의료진은 그곳에 계속 머무를 것이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아이티에 대한 국제원조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한번 보자. “미국은 단독으로 1990년부터 2003년까지 15억 달러를 지원했다. 베네수엘라와 쿠바는 또한 아이티 경제에 일정한 도움을 줬다.”
게으른 지식인들은 위키피디아가 뭐든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아주 자유롭다고 확신한다. 아이티 정부는 1998년 12월부터 6,094명에 이르는 쿠바의료진이 있다고 밝혔다. 진료 1천 4백만명, 수술 22만5천명 이상, 출산 10만명 이상, 시각이식수술 4만7천 273명, 쿠바 의과대 아이티인 졸업생 570명에 현재 쿠바에서 의과대 수학중인 학생이 541명에 달한다.
이를 대충 환산해보자. 쿠바가 진료비로 10달러씩 받는다치면 1억 4천만 달러가 될 것이고 수술비를 100달러로 치면 2천2백만 달러가 넘는다. 출산비용을 50달러로 치면 5백만 달러가 되고 눈 수술비용을 25달러로 치면 1백만 달러가 되고 의대 졸업까지 수업비를 5천 달러라 하면 5백만 달러에 월 500달러로 11년간의 월급을 계산하면 4천1백만 달러가 된다. 이를 모두 합치면 대략 2억1천5백만 달러가 된다.
그렇다면 쿠바는 2억1천5백만 달러를 남겼는가 아니면 자기가 가지고 있을 것을 나눌 생각이었는가? 2008년 쿠바는 세 차례 연속된 태풍으로 피해를 입었다. 쿠바의 중요 수입원의 하나인 니켈의 국제 가격이 바닥을 쳤다. 미국의 경제봉쇄(이스라엘과 오세아니아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을 제외한 전세계 모든 국가가 결속된)와 1962년부터 1천억 달러 경제적 손실에 이르는 천재지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불안은 피델 이후 쿠바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질문하는 사람들 주위에 맴돌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고전파들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혹은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의 주교들 앞에 맴돌고 있다. 의문이 많은가? 피델 사후 쿠바가 최초의 법령을 한 켠에 놔둔다면 지진과 태풍 없이도 모두의 미래는 아이티의 지진 피해보다 더 황폐한 그림을 끝없이 그리게 될 것이다.
쿠바의 첫 법령은 무엇인가? 에르네스또 봉 마에스뜨레 교수는 아이티로 명명된 상황과 쿠바의 연대전례에 대해 쿠바 헌법이 마르티의 언급에 기초하고 있다는 걸 상시시킨다. 마르티는 “나는 공화국의 최초 법령이 쿠바인들이 인간의 완전한 존엄성에 대해 예찬할 수 있는 의식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낭만주의 관념론자들은 아마도 몇 마디를 덧붙일 것이다. 그러나 1797년 11월 5일 과거 노예이자 마부였던 뚜생 로뵈르투르(아이티 독립의 선구자)는 지도부에게 말을 전하며 프랑스 혁명의 현자들의 말을 빌려왔다. “...노예제로의 그 어떤 후퇴나 원칙에 대한 그 어떤 협약도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자유 선언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당신들은 자유라는 축복을 맛본 사람들이 그것이 짓밟히는 걸 조용히 지켜볼 거라고 생각하는가?”
로뵈르투르 역시 스페인 식민지 최초의 해방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이티의 완전한 독립을 열망하지는 않았다. 이는 나중에 이뤄졌다. 급진적인 나폴레옹이 식민지와 유럽 제국에 노예제를 부활시켰을 때(미국 민주주의가 태생되는 시기와 함께) 아이티 혁명가들을 질식시키고 분리시킨 차별을 즉각적으로 없애버린 이후에 말이다.
위키피디아 세대의 젊은이들을 위해 다른 내용을 한 번 보자. 아메리카 식민지의 노예 노동은 유럽의 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다. 18세기 말 노예 노동의 생산량은 유럽 상권의 3분의 1일 차지했다. 당연히 문명의 세력자들은 이를 포기하는 데 그 어떤 관심도 없었다.
자유와 평등, 우애는 오직 백인을 위한 것이었다. 로뵈르투르는 프랑스 혁명의 보편적인 이상을 조국에 널리 퍼트리고자 하는 열망을 접었다. 자본주의 최후에 노예제 생산양식을 포기한 건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티 노예들의 정치적 반란은 권력에 저항하는 피착취민중들의 집합체가 되었다.
아이티인들은 신체적 지형적 열외라는 이유로 그간 사상과 가치의 관점에서 배제되어왔다. 인종주의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가난과 개발도상국가라는 아이티의 역사적 원인, 그 진정한 이유가 있다. 또한 바로 여기에 쿠바와 아이티간의 합당한 연대가 있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1770-1850)는 ‘뚜생 로뵈르투르에게’라는 찬가에서 아이티 비극의 모든 걸 엿보았다. 우리에게 아이티에 가능한 유일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저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너를 쓰러뜨리더라도 살아라. 그리고 기운내라. 네 뒤엔 너를 위해 일할 힘들이 남아있으니까. 공기, 땅 그리고 하늘. 그 어떤 바람 한 줄기도 너를 잊을 수 없을 거다. 넌 아주 거대한 동맹군이 있다. 네 친구들은 환희이며 열망이며 사랑 그리고 인간의 정복할 수 없는 정신이다.”
[출처] 라호르나다La Jornada
http://www.jornada.unam.mx/2010/02/03/index.php?section=opinion&article=019a1pol
[원제] Haití, Cuba y la ley primera (2010.2.4)
[번역] 조현제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아이티에 대한 국제원조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한번 보자. “미국은 단독으로 1990년부터 2003년까지 15억 달러를 지원했다. 베네수엘라와 쿠바는 또한 아이티 경제에 일정한 도움을 줬다.”
게으른 지식인들은 위키피디아가 뭐든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아주 자유롭다고 확신한다. 아이티 정부는 1998년 12월부터 6,094명에 이르는 쿠바의료진이 있다고 밝혔다. 진료 1천 4백만명, 수술 22만5천명 이상, 출산 10만명 이상, 시각이식수술 4만7천 273명, 쿠바 의과대 아이티인 졸업생 570명에 현재 쿠바에서 의과대 수학중인 학생이 541명에 달한다.
이를 대충 환산해보자. 쿠바가 진료비로 10달러씩 받는다치면 1억 4천만 달러가 될 것이고 수술비를 100달러로 치면 2천2백만 달러가 넘는다. 출산비용을 50달러로 치면 5백만 달러가 되고 눈 수술비용을 25달러로 치면 1백만 달러가 되고 의대 졸업까지 수업비를 5천 달러라 하면 5백만 달러에 월 500달러로 11년간의 월급을 계산하면 4천1백만 달러가 된다. 이를 모두 합치면 대략 2억1천5백만 달러가 된다.
그렇다면 쿠바는 2억1천5백만 달러를 남겼는가 아니면 자기가 가지고 있을 것을 나눌 생각이었는가? 2008년 쿠바는 세 차례 연속된 태풍으로 피해를 입었다. 쿠바의 중요 수입원의 하나인 니켈의 국제 가격이 바닥을 쳤다. 미국의 경제봉쇄(이스라엘과 오세아니아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을 제외한 전세계 모든 국가가 결속된)와 1962년부터 1천억 달러 경제적 손실에 이르는 천재지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불안은 피델 이후 쿠바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질문하는 사람들 주위에 맴돌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고전파들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혹은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의 주교들 앞에 맴돌고 있다. 의문이 많은가? 피델 사후 쿠바가 최초의 법령을 한 켠에 놔둔다면 지진과 태풍 없이도 모두의 미래는 아이티의 지진 피해보다 더 황폐한 그림을 끝없이 그리게 될 것이다.
쿠바의 첫 법령은 무엇인가? 에르네스또 봉 마에스뜨레 교수는 아이티로 명명된 상황과 쿠바의 연대전례에 대해 쿠바 헌법이 마르티의 언급에 기초하고 있다는 걸 상시시킨다. 마르티는 “나는 공화국의 최초 법령이 쿠바인들이 인간의 완전한 존엄성에 대해 예찬할 수 있는 의식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낭만주의 관념론자들은 아마도 몇 마디를 덧붙일 것이다. 그러나 1797년 11월 5일 과거 노예이자 마부였던 뚜생 로뵈르투르(아이티 독립의 선구자)는 지도부에게 말을 전하며 프랑스 혁명의 현자들의 말을 빌려왔다. “...노예제로의 그 어떤 후퇴나 원칙에 대한 그 어떤 협약도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자유 선언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당신들은 자유라는 축복을 맛본 사람들이 그것이 짓밟히는 걸 조용히 지켜볼 거라고 생각하는가?”
로뵈르투르 역시 스페인 식민지 최초의 해방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이티의 완전한 독립을 열망하지는 않았다. 이는 나중에 이뤄졌다. 급진적인 나폴레옹이 식민지와 유럽 제국에 노예제를 부활시켰을 때(미국 민주주의가 태생되는 시기와 함께) 아이티 혁명가들을 질식시키고 분리시킨 차별을 즉각적으로 없애버린 이후에 말이다.
위키피디아 세대의 젊은이들을 위해 다른 내용을 한 번 보자. 아메리카 식민지의 노예 노동은 유럽의 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다. 18세기 말 노예 노동의 생산량은 유럽 상권의 3분의 1일 차지했다. 당연히 문명의 세력자들은 이를 포기하는 데 그 어떤 관심도 없었다.
자유와 평등, 우애는 오직 백인을 위한 것이었다. 로뵈르투르는 프랑스 혁명의 보편적인 이상을 조국에 널리 퍼트리고자 하는 열망을 접었다. 자본주의 최후에 노예제 생산양식을 포기한 건 경제적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티 노예들의 정치적 반란은 권력에 저항하는 피착취민중들의 집합체가 되었다.
아이티인들은 신체적 지형적 열외라는 이유로 그간 사상과 가치의 관점에서 배제되어왔다. 인종주의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가난과 개발도상국가라는 아이티의 역사적 원인, 그 진정한 이유가 있다. 또한 바로 여기에 쿠바와 아이티간의 합당한 연대가 있는 것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1770-1850)는 ‘뚜생 로뵈르투르에게’라는 찬가에서 아이티 비극의 모든 걸 엿보았다. 우리에게 아이티에 가능한 유일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저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너를 쓰러뜨리더라도 살아라. 그리고 기운내라. 네 뒤엔 너를 위해 일할 힘들이 남아있으니까. 공기, 땅 그리고 하늘. 그 어떤 바람 한 줄기도 너를 잊을 수 없을 거다. 넌 아주 거대한 동맹군이 있다. 네 친구들은 환희이며 열망이며 사랑 그리고 인간의 정복할 수 없는 정신이다.”
[출처] 라호르나다La Jornada
http://www.jornada.unam.mx/2010/02/03/index.php?section=opinion&article=019a1pol
[원제] Haití, Cuba y la ley primera (2010.2.4)
[번역] 조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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