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기획연재] 우리사회의 도시빈민운동사 (1)

들어가며

우리사회에서 도시빈민 운동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전개 되었다. 재개발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철거민운동은 철거가 이루어지기 전후 세입자들의 주거권을 둘러싸고 투쟁이 전개 되었고 노점상들은 생계수단인 손수레와, 포장마차에 대한 직접적인 단속과 과태료 부과에 항의하는 것으로써 투쟁해 왔다. 이들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도시빈민 운동의 한축을 이루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기존의 빈민운동은 2천 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빈곤문제와 반(反)빈곤운동 등 다양한 주체의 시대적인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였다. 작년 용산참사를 겪으면서 빈민운동은 대외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그 대응은 대단히 미흡했으며 현재 각각의 빈민운동단체들은 내부적으로 분화를 겪으면서 심각할 정도로 어려운 상태에 직면해 있다.

  들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민들의 모습 [출처: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이글의 목적은 우리 사회 반(反) 빈곤운동의 주동력이었던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의 흐름을 살펴보고 우리 사회의 변화된 양상과 이 과정 속에서 숨을 거둔 열사들의 희생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글은 지금시기 빈민운동의 평가와 점검이라는 측면이 강하지만 기존의 도시빈민운동의 주요한 영역이었던 철거민과 노점상의 운동을 중심으로 서술이 되어 있으며 필자가 근무한 바 있던 전국빈민연합 그리고 전국노점상총연합의 활동과 그동안 제출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정리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작년 용산참사 이후 추모연대의 요청에 의해 작성된 자료다. 새롭게 원고를 손질하여 참세상에 약 10여 차례 게제를 하도록 하겠다.


일제강점기 빈민들의 생활은 어땠을까?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는 일상생활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민중의 생활 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이들의 삶은 하루를 벌어 하루를 연명하기에도 벅찼으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수준이었다. 수입의 70% 이상은 하루 먹고 소비하는 정도의 식비로 지출되었고 의식주에 들어가는 기본적 비용은 수입 전체의 100%에 가까웠던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따라서 질병에 쉽게 노출되었을 것이고 당연히 의료비도 감당할 수 없었으며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것은 상상 조차할 수 없는 일이었다.1)

하지만 조선총독부에 따르면 빈민의 범주는 자신의 생계를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세민’, 생계가 매우 곤란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궁민’, 또는 부랑자나 걸인 등 다분히 추상적으로 분류를 하였다. 그러나 이미 1920년대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월수입 20원 이하인 자를 빈민으로 간주했는데 이와 같은 기준을 조선에 적용한다면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빈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1930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소작농’의 연간 수입은 205원, ‘세농’은 12원이었다. 당시 소작농 가구가 약 150만 가구에 이르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농민 가운데 절반 정도가 빈민의 범주에 포함되었을 것이고 조선인의 절대 다수는 사실상 빈민으로 분류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의 빈민은 어땠을까? 당시 경성부 사회과 조사에 따르면 1936년 11월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조선인 실업자와 ‘세궁민’은 10만 5천여 명으로 조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에서 빠진 사람들과 걸인까지 합하면 적어도 11만 명 이상을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인구가 60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6명 가운데 1명꼴로 사실상 빈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2)

  토막민의 모습 [출처: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일제강점기 도시빈민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토막민이다. 이들은 농촌과 도시의 빈민들로 경성을 비롯한 각 도시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으며 구체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곳은 하천이나 제방, 산기슭, 다리 밑과 같은 곳에 굴을 파서 그 위에 멍석을 깔고 주위에 짚을 펴서 만든 곳에 거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토막민이 ‘근대적 빈민’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1920년대 초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토막민이라는 용어는 그들의 두드러지는 외양을 이루는 주거 상태에서 연유된다. 공공의 재산 또는 사유재산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의미하는 ‘무단 점거’라는 말을 통해 이들의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불법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를 오늘날의 현실과 대조해서 살펴보면 토막민은 무허가 정착지 주민에 부합하는 개념으로 현재에 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할 것이다 3)

1927년 무렵 서울의 토막민은 3천여 명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빠르게 증가하여, 1938년 1만 6,600여명, 가뭄피해가 컸던 1939년 이후에는 더욱 늘어나서 1939년 2만 911명, 1940년 말에는 약 3만 6천 명에 이르렀다. 10여 년 사이에 1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토막민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용노동자이거나 삯짐을 져서 근근이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 1938년 말 조선총독부가 서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664명의 토막민 가운데 직업이 있는 사람은 938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82%가 일용노동자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일용노동자의 1년 평균 실업일수가 140일이었으므로 이들 대부분은 1년 가운데 절반 이상을 일정한 수입 없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이들은 안정적 수입 없이 불안정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침략 전쟁기 일용노동자에 대해 강제저축이 강요되고 각종 ‘국방헌금’ 등이 강제로 징수된 점등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도시빈민의 삶은 더욱 열악해졌을 것이라고 짐작된다.4)

  화전민의 모습 [출처: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다음으로 살펴볼 대상은 화전민이다. 화전민의 출현은 일제하 조선 농촌에서 수탈적 농업정책이 진행됨에 따라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지주는 자작농 겸 소작인으로, 소작인은 남의 집 행랑 칸을 빌어 농사하는 막실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힘든 생활고를 견뎌내기 어려워 결국 산속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다. 이마저도 조선총독부는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산불이 번질 우려와 죄를 짓고 도피처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화전금지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통제아래 두려 하였다. 화전은 산림에 불을 지르고 그곳을 경작해서 감자, 보리, 조,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것으로서 대체로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었다. 조선후기 파악된 화전민은 도합 235결 이었으며 1928년 9,806호로 전체 54134명으로 집계되고 있다.5)

화전민의 식생활은 더욱 열악했다. 저장해둔 곡식은 초봄이면 바닥나서 그 다음부터는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이들의 주거형태에 대하여 함경남도 장진군 신남면 일대의 화전지대를 답사하고「고해순례」를 쓴 최용환은 화전민의 집을 보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양지바른 산비탈에는 거의 빈틈없이 연접된 화전이 있고 물 흐르는 좁은 골짜기 마다 ‘틀거리’ 의집이 있으니 그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온 채 별로 다듬지도 않고 네 귀를 맞추어 덧놓고 덧놓아 기둥도 일없이 지은 집이다. 그 틀거리 사이에 바람을 막기 위하여 흙을 엷게 바르고 한편에 들고나는 문이 있으니 이것이 곧 순화전민들이 일시 우거하는 안식처라 한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방안에 온돌은 있으나 방과 부엌에 바람벽도 없이 화통하였고 어느 해에나 창호지를 하였는지 더럽다 못하여 검고 절어서 방안에서 햇빛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이 되었다.6)

농촌에서 쫓겨난 이들은 척박한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어찌 보면 간섭받지 않고 화전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음 편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화전금지정책’을 위반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잡혀간다 한들 감옥에서는 먹여주고 입혀주기 때문에 오히려 화전을 경작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으므로 형벌을 두려워하거나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리 없었다.7)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모습 [출처: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빈민의 범주에는 이들 외에도 근대적 규모와 시설을 갖춘 공장에 들어가 직공으로 일하던 이들도 1930년대 중반 한 달 수입이 겨우 16, 17원에 지나지 않았다. 가족 수가 4~5명인 경우 최소 27원의 수입은 있어야 한 달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빈곤에 있어서 공장노동자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8) 공장노동자가 확대 되면서 이른바 ‘노동빈민’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들은 도시의 잉여 노동력으로서 대규모 공사현장에 투입되어 노동빈민으로 활용되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일제의 수탈적 정책으로 빈농층이 늘어났으며 조선 민중의 대부분이 이에 포함된다. 즉 월 수입액을 기준으로 하면 그 외연은 기존에 일제강점기 3대 빈민층으로 지목된 농촌의 광범위한 빈농층, 도시의 토막민, 화전민은 물론이고 근대적 시설에 고용되었던 다수의 공장노동자를 포함한 이른바 ‘노동빈민’에게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운명은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에는 전쟁에 휘말려 갔다. 바로 전쟁노동력으로 동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민중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동력 수탈의 직접적 피해자가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노동력으로 동원되어 가혹한 노동조건과 군사적 노동통제 하에서 다행히 살아남았더라도 광복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빈민들은 다시금 실업과 폭등하는 물가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날그날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열악한 처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9)


오래된 상거래 행위 노점상

  엿을 파는 노점상 아이 [출처: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다음은 노점상에 대한 이야기다. 노점상은 오래된 상거래 행위로서 그 형성 시기를 정확히 가늠하기 어렵다. 이미 조선시대 이전부터 저소득층이라고 할 수 있는 천민이나 상민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방편이자 경제활동의 기초 단위로서의 노점상이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중앙 정부에 그 지방의 특산물과 농?어물, 공산품들을 상납하였으므로 이 시기는 지방 나름의 특정 상품은 발전을 거듭하지만 타지방과의 상품 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각 지방 단위에서 한정된 물품만을 마을 장터에서 유통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정 품목에 따라서는 지방마다 가격이나 가치는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이후 마을 장터에서 여러 지방의 특산물이나 농작물, 약간의 공산품들이 활발하게 유통되기 시작했고, 점차 도시가 발달하면서 장터도 함께 발전하였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중앙정부는 각종 세금을 쌀로만 단일화해서 부과하면서 지방의 특산물을 손쉽게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중앙정부는 직접 또는 지방관청을 통하여 지방 특산물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의 유통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생겨났고 국가에서 그들에게 일부 품목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하면서 그들은 이러한 독점권을 바탕으로 한 자본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잉여자본을 통해 그동안 특정한 지방에 국한되었던 상품들이 여러 지방으로 유통되었다. 더군다나 교통이 비교적 발달하면서 이전보다 더 폭넓게 상품들이 유통되는 환경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른바 독점자본의 형태가 생겨났고 이러한 독점자본은 전국적 유통망을 확보하면서 사재기를 통하여 더욱더 큰 이익을 보며 급속도로 성장해 갔다. 이러한 모습은 양반과 상민의 계급적 제도가 붕괴하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더욱 급속히 확대되었다.

  거리의 노점상의 모습 [출처: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이전까지의 천민이나 상민들의 생존을 위한 방편과 기초적인 유통 상거래 행위에서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화된 시장은 크게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진 독점자본으로 변해갔다. 이들 가운데 자신의 육체노동을 이용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중추적인 유통기능을 담당했던 보부상들이 있었으며 상업을 본업으로 삼고 특정 장터에 국한되어 상행위를 했던 상인(현재의 대리점 형태)들이 있었다. 이밖에 상업을 본업으로 하지는 않은 채 소작농을 겸하여 부분적으로 상행위를 통해 생계를 의존했던 노점상들로 크게 세부류로 나뉘게 된다.

조선시대 무렵부터 노점상은 소작농이나 저소득 상인, 천민들의 생계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현재의 노점상들은 과거 보부상이나 소작농을 겸하던 조선 중후기 노점상들의 명맥을 잇는, 이들의 현대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계급구조가 파괴되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이제 유통시장은 특정한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각처의 문물들을 유입되는 복합적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30년대 노점상의 수는 약 11만 3천 명으로서 전체 상업인구의 23.8%나 차지했다. 이를 다시 남녀별로 보면 남성은 물품 판매업주, 노점행상 등의 순으로 구성된 데 비해 여성은 접객업과 노점이나 행상이 상업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선인 상업 인구는 접객업과 노점행상 및 군소 상점주가 절반 이상이 훨씬 넘는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다.10) 이 시기의 시장은 지속적인 장터보다는 일정 기간을 정하여 형성되는 시장인 5일장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5일장은 주로 대도시보다는 지방 중소도시에서 형성되었는데 일정한 기간을 둠으로써 보부상 노점상들의 활동 반경은 더욱 커지게 되었고 더욱더 큰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소작농, 농업노예, 극빈 계층들은 도시로 유입되면서 난전과 노점상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한편 노점 거리가 형성되었던 곳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장소로 기능을 하였다. 마을의 시장이나 장터는 민중의 억울함과 분노를 토로하는 토론장이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진정한 삶의 현장이었다. 시장과 노점 거리가 형성된 곳에서는 세간의 정보가 유통되고 집회가 벌어지면서, 이곳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거나 전국적인 시위나 항일투쟁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일제는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1944년 조선 구호령이란 것을 제정하였는데, 조선 구호령의 적용 대상은 65세 이상의 노쇠자와 13세 이하의 유아, 임산부, 불구, 폐질, 질병, 상병 기타 정신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해 노동에 지장이 있는 자로 정했다. 조선 구호령에 따른 구호 대상에는 65세 이상의 노쇠자와 13세 이하의 유아, 임산부, 불구, 폐질, 질병, 상병 기타 정신 또는 신체장애로 인해 노동에 지장이 있는 자들이 해당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른 급여 내용으로는 생활부조, 의료부조, 조산부조, 생업부조 등이 있으며 구호는 신청주의, 자산조사 규정, 거택보호 등을 원칙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형식적으로나마 근대적 의미의 공공부조제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긴 했으나 실제로는 빈민의 기본적 생존권보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안정적 식민통치를 위한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이었다.11)


일제로 부터의 해방과 한국전쟁이후의 도시빈민

해방 이후의 기쁨도 잠시일 뿐 민중들에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 악순환의 사회구조는 더욱 심화하여갔으며 항일투쟁가들을 탄압하던 경찰을 비롯한 관료들과 일제에 빌붙어 조국을 배신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겼다. 나아가 자본가들은 해방 이후에도 더욱 당당하게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화하고 부를 축적해 갔다.

해방 후 곧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은 민중들의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맞았을 때 90만 명이던 서울의 인구는 급속도로 인구가 팽창되어 한국전쟁 직전 170만 명에 이르렀고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9.1%에 달했다.12) 북한 주민들 가운데 64만여 명이 월남을 했다. 또한, 전체 250만여 명으로 추정되던, 귀환한 재외동포의 상당수는 그들의 고향으로 되돌아갔지만 농촌지역에 연고가 없는 일부 재외동포들과 월남민 대다수와 함께 도시로 유입되기 시작했다.13)

도시 지역에 새로운 거처와 일자리를 찾는 인구는 이처럼 폭증했지만 일본과의 교역이 단절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지역 간·산업간 분업체계는 거의 와해되었다. 따라서 도시 지역은 물자수급의 불균형 등의 문제까지 겹치면서 극심한 실업난과 식량난을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도시로 몰려든 다수의 해외동포와 월남민들은 안정된 일자리와 거주지를 구하지 못한 채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도시는 총 주택의 30%가 파괴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이들을 수용할 만한 기반이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14) 그 결과 도시빈민들은 시가지 안팎의 유휴지에 미군들이 쓰고 남은 각종 건자재를 이용해서 판잣집을 짓고 노점상이나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토막집과 화전민과는 달리 판잣집 이란 말의 유래는 어디서부터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8.15해방이후 그리고 한국 전쟁을 거치며 피난민들이 임시 거주지로 사용하고자 미군들이 진주시 가지고 들어온 나왕, 미송 등의 목재조각과 루핑, 깡통, 등을 이용하여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말이 판자 집일 것이라고 추측을 할뿐이다. 일제 강점시대에는 토막민이 도시빈민의 원형을 이루었다면 1950년대 중반 이후의 농촌에서 벗어나 도시로 인구가 유입이 되고 이로 인해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판자촌들이 확산되었다. 특히 한국 전쟁은 많은 주택을 잿더미로 만들어 거주공간이 턱 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피난민까지 겹쳐 국공유지나 사유지를 막론하고 무허가 주택이 마구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이를 지칭하는 판잣집, 천막집, 방공호, 토굴 등이 정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들어서기 시작했다. 1955년 영등포의 삼구시장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을 계기로 도시 미관을 저해하거나 무허가라는 이유로 1955년 5월 7일부터 9월까지 무허가 판잣집의 철거가 시작되어 자진 철거된 수는 무려 2,400호나 되었다 15) 그럼에도 시 외곽의 산허리를 중심으로 하천변에는 판자 집이 끈질기게 고래 심줄처럼 늘어만 갔다.

전쟁 통에 피난민으로서 생활하기 위해 노점만한 것이 없었다. 현실적으로 노점만이 그들의 생존을 이어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때부터 노점상들은 극히 한정된 자원 가운데 자신만의 독특한 물품을 개발하여 경쟁력을 높여갔으므로 어쩌면 이 시기는 노점상이 질적으로 발전하고 변화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노점상들의 유통구조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다름 아니라 미군부대의 물품들이 시장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황폐했던 유통구조에서 미군부대 물품은 그 시대의 중요한 품목 중의 하나로 급부상하였고 이것들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노점상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최근까지 부산의 국제시장과 청계천 주변 이태원, 용산전자상가 등의 전신이 바로 그것이었다.16)

한국전쟁 이후의 1955년의 1인당 국민소득이 65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국민 대다수가 절대적 빈곤 상태에 처해 있었다. 당시의 도시빈민들은 극심한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궁핍한 상태로 전락한 것이었고 전통사회의 신분과 계층구조가 무너지고 사회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는 이행국면에 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빈곤한 처지에서 탈출하여 중간층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었다. 이러한 희망이 있었던 점은 1960년대 이후의 도시빈민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한편 8.15해방 이후 미군정 3년간의 구호사업은 월남한 피난민과 국내거주 빈민에 대한 식량과 의료 및 주택 공급에 치중하였다. 즉 미군정은 1945년 미군법령 18호에 의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를 보건후생부로 변경하고 사변재해의 구제와 기아의 방지, 최소한의 서민생계 유지, 보건위생 및 치료, 응급주택 공급 등에 중점을 둔 정책을 펼쳤으나 획기적인 사업을 추진하거나 장기적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 남한정부는 보건후생부와 노동부를 통합했고 이를 사회부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제헌헌법 19조에서 ‘노령, 질병 기타 노동능력 상실로 인해 생활유지의 능력이 없는 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공적 부조와 관련된 정책은 외국의 민간 원조단체가 주축이 되어 보육원, 양로원 등 수용보호시설을 세우는 등의 미국식 사회사업 개념이 도입된 것이었지만 새로운 공적 부조 제도는 조성되지 않았다.17)

한편, 노동복지 분야에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그리고 노동위원회법 제정이 추진되었고 1953년에 이것들이 공포되기도 했다.18)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법들은 유명무실한 것이었고 실제 거의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각주)-----------------

1) 곽건홍, 일제하의 빈민 : 토막민. 화전민,『역사와 비평 통권 46호』1999년 p.169
2) 곽건홍의 글 pp.166-167
3) 한국사회연구회, “일제하 도시빈민층의 형성”,『한국의 사회신분과 사회계층』(문학과 지성사 1986년) p.205
4) 곽건홍, 일제하의 빈민 : 토막민. 화전민『역사와 비평 통권 46호』1999년 pp168-172
5) 강만길.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창작사. 1987년 p123
6) 강만길.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창작사. 1987년 p210
7) 곽건홍의 글 p.170
8) 곽건홍의 글 p.170
9) 곽건홍의 글 p.173
10) 한국사회연구회, ‘일제하 도시빈민층의 형성’『한국의 사회신분과 사회계층』 (문학과 지성사 1986년) p239
11) 김기원, 『공공부조론』“한국의 공공부조역사” (학지사 2000년) p175
12) 차종천, 유홍준, 이정환, “서울시 계층별 주거지역 분포의 역사적 변천” (백산서당 2004년) p58
13) 정건화, “한국도시빈민의 형성과 존재형태”『한국사회연구』(제 5집 한길사 1986년) pp263-267
14) 인권상황실태조사, 『사회적 배제의 관점에서 본 빈곤층 실태 연구』(국가인권 위원회 2004년) p40
15) 서울특별시 1983년「서울백년역사, 제 5권」, pp722-724
16) 최인기, “우리 시대 노점상현황과 실태” 『해방수레를 끌며 8호』 (전노련 2006년) pp127-130
17) 김기원, "한국의 공공부조역사" 『공공부조론』(학지사 2000년) p175
18) 김영종, 『복지행정론』(형설 2002년) p70
태그

도시빈민 , 일제강점기 , 토막민 , 판자촌 , 화전민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최인기(빈민활동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