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도시빈민탄압

[우리사회의 빈민운동사](7)

미해당자를 중심으로 한 철거투쟁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집권하였다. 오랫동안 군부에 의해 집권되었던 정권이 물러서고 소위 민간정부가 등장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외형적으로는 집회 결사의 자유등 정치적 기본권이 회복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김영삼 정권 임기 내내 공안사건은 끝없이 터져 나왔다.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민주화도 눈에 띄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은 여전히 답보 상태였다. 오히려 노동관계법 개악이 되어 정리해고제 도입 등 노동시장 규제완화를 추진하는 등 노동자들의 고용 상태는 더욱 불안정하게 하고 노동조건은 악화 되어 나갔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주택정책에 대한 거창한 비전을 제시했다. ‘신경제 5개년계획’의 하나로 서민주택을 활성화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해서 주택부문에서 1997년까지 3백만 호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 1993년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계획은 취임 당시와 달리 변경되었고 공공주택의 규모도 130만 호에서 5만 호로 축소했으며 게다가 공공주택 건립을 위한 정부의 부담액을 예산에서 전액 삭감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공공주택 건립비용을 고스란히 지방자치단체에 전가해 놓았다. 즉 서울시 내의 12개 지역에서 건축 중이던 공공임대주택 건립예산을 전액 서울시로 떠넘겼던 것이다. 서울시도 12개 지역의 공공주택 매입에 드는 비용인 총 1조 4천억 원 가운데 겨우 7천억 원만을 마련한 상태였다. 이처럼 턱없이 부족한 예산으로 말미암아 건립될 임대주택을 사들일 비용 확보의 대안도 세우지 못하였다.1)

1990년대에 들어서도 각종 재개발사업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재개발사업의 세입자대책으로서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는 제도로 이어졌으나 여전히 철거 이후부터 공공임대주택이 완료되기까지의 ‘임시거주시설’ 문제와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지 못하는 ‘미 해당자’ 문제가 철거투쟁의 주요쟁점으로서 남아 있었다. 이러한 배경아래 당시의 철거투쟁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봉천6동 투쟁과 인권침해

봉천6동에서는 1992년 7월 14일 사업계획결정 고시 이후 1993년 12월 27일 사업승인을 받고 94년 1월의 조합 총회를 거쳐 재개발조합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조합설립 초반부터 깡패들이 고용되어 공포분위기가 조성되는 등의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94년 3월 14일에는 세입자대책위원회 사무실에 용역반원 1명이 난입하여 주민 5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0월 21일~22일 사이에는 공가철거를 막다가 주민 12명이 부상당하고 이 중 3명이 입원했다. 1994년 6월 22일에는 공가에서 화재가 발생했으나 신고를 접수한 소방서 측이 철거지역이라는 이유로 뒤늦게 출동하자 소방차를 막고 3시간가량 농성을 벌이는 사건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흥분한 주민들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소방서에서 세입자대책위원회 임원 4명을 고소하였는데 이들이 유치장에 억류되자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경찰서 앞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1994년 8월 26일에는 가이주단지 부지선정과 공공임대주택 공증을 요구하기 위해 세대 위가 구청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구청농성을 벌였으나 모두 거부되었다. 구청에서는 사업구역 내 가 이주단지를 불허하는데 그 이유로 구역 내에 부지가 없다는 점과 가 이주단지 자체가 불법건축물이라는 점 등을 내세운 것이었다.

1994년 8월에는 봉천 6동에서는 서울철거민연합회 소속 배이순(여 37세) 씨가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전치 2주의 상처를 입고 강남 고려병원에서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당시 배이순 씨는 밤 7시쯤 봉천6동 재개발지역 세입자들이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행당하고 있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현저동 주민 10여 명과 함께 이 지역에 찾아가 항의하던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배이순 씨에게 30대 남자가 흉기를 휘둘렀다는 것이다.2) 1995년 4월 25일 오전 6시경에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6동 봉천7의 1 재개발지구의 상가건물을 철거하던 J개발 철거반원 10명이 철거민대표 전모(여 40세) 씨 등 4명에게 달려들어 바지를 벗기고 속옷 안에 연탄재를 집어넣는 등의 폭행을 가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철거민들은 이 같은 사실을 바로 경찰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현장에 뒤늦게 출동해서 폭행을 막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3)

- 행당동 투쟁과 성폭행

이 밖에도 행당동 1-2구역에 1995년 11월 23일 재개발사업 시행인가가 떨어지면서 1996년 4월 21일 80여 세대의 세대 위가 결성되었다. 행당동 1-2구역의 쟁점은 사업결정 고시와 사업 시행인가 사이에 있는 무려 8년 8개월이란 시간에 대한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세입자의 90% 이상이 공공임대아파트에 입주 자격이 없는 비해당자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20여 개월 동안 철거용역(적준)과 30여 차례나 충돌을 빚게 되었고 이 기간에 무려 7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천만여 원 이상 치료비가 지출되었다. 특히 9월 30일의 철거에서는 수천만 원의 재산상의 손해를 입기도 했다. 특히 현장에서 팬티와 브래지어만 남긴 채 3명의 부녀자를 성추행하고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재개지역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들이 많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여성관련 단체들이 일제히 항의하는 등의 사회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또한, 행당2동과 금호동 1-6지구 재개발지역에서는 철거를 반대하며 망루 위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철거민 박준배(남 33세) 씨가 망루에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이날의 사고는 이 지역 철거민 50여 명이 철거용역회사인 입산개발과 구청 측 철거반원 등 2백여 명과 대치하던 중에 발생했다. 특히 전경 2개 중대의 2백 40여 명이 출동하자 철거민들이 쌓아둔 폐타이어를 태우고 돌을 던지며 저항하면서 박 씨가 뛰어내렸다고 한다. 4) 이렇듯 철거지역에서의 폭력 사태는 그야말로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고 있었으나 이를 해결할 공권력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불법만행을 수수방관하거나 비호아래 폭력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 수원 2지구, 구갈 철대위, 전농동과 빈민열사

  전농 3동 박순덕 열사의 모습

1963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난 박순덕(여 34세) 씨는 95년 2월경에 전농3동 철거민대책위원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전농3동에 철거민들의 망루가 설치되었고 박순덕 씨는 망루에서 농성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97년 7월 25일 아침부터 망루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한 선경건설의 의뢰를 받은 적준 소속의 용역직원 300여 명은 공권력 600명의 비호 아래 망루에 접근해왔다. 특히 이들은 망루 안으로 기름을 묻힌 타이어를 집어던지고 불을 질렀다. 망루가 화염에 휩싸이자 박순덕 씨를 비롯한 10여 명은 결국 18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목격자에 따르면 뛰어내린 주민들을 용역직원들이 달려가 집단 구타하였고 이들 중 경희의료원으로 옮겨진 박순덕 씨는 뇌사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박 씨는 7월 26일 새벽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밖에도 1958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민병일(남 39세) 씨는 1995년 9월 28일에 경기도 용인시의 구갈철거민대책위원회에 가입하였다. 밤에는 노점상으로 생계를 잇고 낮에는 구갈철대위 조직부장으로 일하던 그는 1997년 2월 2일 단속에서 빼앗긴 노점장사 도구를 찾으러 신갈파출소를 방문하였다. 이후 민병일 씨의 부인은 ‘민병일 씨가 파출소 앞에서 쓰러져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을 신갈파출소에서 받는다. 그는 곧장 영동정형외과로 후송되었으나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다시 남수원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남수원병원에서 민병일 씨는 뇌사로 판정받았는데 의사의 진료소견에 따르면 민병일 씨가 머리를 맞은 것 같다고 하였다. 이후 구갈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신갈파출소를 방문했을 때 파출소장은 ‘미안하다. 우리 직원들과 승강이를 벌이다 떠밀렸다. 그 직원은 용인경찰서에서 조사 중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중에 민병일 씨는 아주대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2월 15일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렇듯 90년대 초 중반 철거지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죽음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점상 회유정책과 문민정부

1993년에 출범한 김영삼 정권은 대대적인 사정을 통해 비리척결을 주장하였지만 집권 1년도 안 되는 시점에서 소위 김영삼 정권의 개혁이라는 것은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93년 9월 지역마다 노점단속이 시작되었는데 단속방법은 과거의 군부독재 정권 못지않게 폭력적이며 심지어 교묘하기 까지 했다. 정부와 시 당국은 손수레를 압수해 불태우거나 박살냈고 이를 돌려달라고 항의하면 주소를 확인해서 도로법, 도로교통법, 식품위생법 등에 따라 고발하여 과다한 벌금을 부과하는 등의 탄압을 자행하였다.

1993년 3월 16일에는 15개 지역의 노점상 대표와 간부 150여 명이 청와대를 항의 방문하고 청와대 입구에서 연좌 침묵농성에 돌입하기도 했다. 그러자 김정남 사회문화 수석비서관은 5명의 대표자와 면담을 받아들여 이 자리에서 과잉단속과 생계형 노점상에 대한 단속을 자제하겠다는 약속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나마 무차별 단속이 감소하였더라도 형사고발과 즉심회부 또는 수십만 원의 벌과금 부과 등을 통한 당국의 노점상단속은 실질적으로 더욱더 심해졌다. 이에 전노련은 ‘노점상에 대한 절대·상대 금지구역 철폐 와 합법화 촉구대회’를 개최하여 당국의 노점상단속을 규탄하고, 합리적이고 적극적인 노점상정책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청와대와 내무부, 서울시 등 관계 당국은 노점상단속에 대한 적극적 검토를 약속하면서도 뒤로는 개정 도로법 과 식품위생법, 도로교통법 등을 통해 형사고발과 최고 700만 원까지로 벌금의 상향조정 등의 방법으로 노점상단속을 강화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대응해 전노련에서는 92년부터 실시해온 8인의 국회의원에게 받은 국회의원 청원소개 의견서와 노점상 합법화를 촉구하는 46.900명의 시민이 서명한 서명명부를 국회에 접수했다. 그러나 노점상 자립화·합법화에 대한 청원서는 여당의 반대로 결국 거부당하였으나 위와 같은 청원사업은 결과적으로 합법화 쟁취와 절대·상대 금지구역의 철폐를 위한 투쟁 사업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 시민을 상대로 노점상의 긍정적 기능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노점상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1993년 9월 22일 민자당에서는 이른바 중구지역과 종로지역의 노점상을 대상으로 ‘환경개선협의회’라는 노점상단체를 결성했는데 이들은 노점상의 투쟁을 부정하고 민주세력과의 연대를 단절할 것을 결의하고 나섰다. 이 단체의 실체는 기업형 노점상을 중심으로 해서 결성되었는데 집권 여당인 민자당 당원으로 가입을 하게 되면 단속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식으로 노점상들을 설득했다. 이러한 회유에 일부 노점상들은 기득권을 챙 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셈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회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환경개선협의회’만 가입하면 이제는 단속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 ‘환경개선협의회’는 ‘민자당’의 표몰이단체로 전락했던 것이며 노점상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도 이들에 대한 단속은 단속대로 진행하였던 것이다.

민자당 정권은 집권 5년 동안 35,039개의 노점상을 강제 철거하고 5,662개의 손수레를 파괴했다. 이러한 피해액만 무려 45억 6,449만여 원을 넘었다. 또한 이러한 단속에 낭비된 예산이 수백억 원에 육박한다고 추정된다. 더군다나 한 해에 1천여 명 정도의 노점상이 즉심에 부쳐졌고 1995년 한해만 해도 살인적인 폭력단속으로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남 37세)씨의 분신과 철거민 박균백(남 )씨의 투신과 분신, 이덕인 (남 29세)씨의 의문사로 열사투쟁이 극에 달한 해였다.

-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

최정환 씨는 1급 중증 장애인으로서 어릴 때부터 척수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고아원을 전전하며 껌 장사, 수세미 장사 등으로 생활을 연명하였다. 열심히 살아보자던 최정환씨의 희망은 중도에 당한 교통사고로 여지없이 깨져버리고 법적으로 존재하는 아버지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조차 되지 못해 1994년부터 방배역 근처에서 휠체어에 좌판을 차려놓고 노래테이프를 팔던 노점상이었다. 그러다 1995년 3월 서초구청의 노점단속에 항의하며 자신의 빼앗긴 스피커와 배터리를 돌려줄 것을 애원하였다. 그러나 되돌아온 곳은 싸늘한 냉대와 무시였다. 최정환씨는 3월 5일 분신자살을 결행했다.

김영삼 정권 들어 최정환씨의 분신은 수많은 장애인과 노점상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곧바로 민중운동 진영은 비상대책위를 구성해서 투쟁에 돌입한다. 1995년 3월 16일 종묘에서 살인단속 분쇄 및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사건에 대한 규탄대회를 열었고 여기에 2천여 명이 참여해 투쟁을 전개한다. 이날 새벽에는 행당동 철거민 박균백 씨의 분신 투신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김영삼 정권의 재개발정책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3월 21일에는 비상대책위가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씨의 빈민장례위원회로 전환되면서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자 투쟁의 확산을 우려한 정부와 경찰당국은 시신을 탈취해버렸고 이에 대항해 4월 25일 연세대에서는 3천여 명이 참석하여 장례식과 영결식 및 규탄대회가 열어 시신 탈취와 장례행렬 봉쇄에 대해 항의하면서 화염병을 투척하는 등 투쟁이 전개되었다.

최정환 씨의 분신사건은 김영삼 정부의 장애인 정책이 가지는 한계를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때 제정된 '장애인고용 촉진 등에 관한 법률'에서는 3백 인 이상 기업체는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2% 이상 고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업의 대부분은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으면서 벌금만 납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시행 2년 만에 약 400억여 원을 거둬들였다. 그러면서 장애인고용 비율을 2%에서 1%로 하향 조정할 것을 검토하는 과정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점상과 장애인이 공동의 투쟁을 전개했으며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씨의 분신과 장례 투쟁을 함께하면서 장애인과 노점상은 모두 억압받는 기층민중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 이덕인 열사의 의문사 투쟁

  인천의 아암도에서 발견된 이덕인 열사의 시신

위와 같은 공동투쟁의 성과를 기반으로 ‘전국 장애인 한 가족 협회(이하 전장협)’과 전노련은 장애인 대다수가 특별한 일자리를 같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노점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방편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일상적인 연대의 틀을 공고히 하고자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이하 장자추)’를 결성하게 된다. 노점상과 장애인들이 공동의 장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해 6월과 8월 각각 청계천과 인천의 연수동에서 전노련 산하 인천시 아암도 지부 결성식 및 ‘장애인자립 발대식’을 개최하게 된다. 그러나 서울의 청계천을 중심으로 진행된 장자추 사업은 단속으로 인해 8월 24일에만 무려 13명의 노점상들이 연행되는 사태를 맞이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인천 연수동의 노점상도 마찬가지 였다. 급기야 11월 28일 오전 10시 30분에 인천시 연수구에 있는 아암도 앞바다에서 한 구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그 시신은 24일부터 공권력과 철거용역 깡패 2천여 명이 투입되어 진행된 아암도 노점상의 강제철거 과정에서 25일 저녁 8시경 철탑에서 내려가고 나서 실종되었던 4급 지체장애인 이덕인씨 였다.

경찰과 철거용역 깡패 2천여 명은 11월 24일 인천시 연수구 아암도 주변에 망루를 쌓고 농성을 벌이던 장애인과 노점상들에게 11월 24일 폭력적인 행정대집행에 들어갔었고 굴착기를 동원하여 유일한 생계 수단인 포장마차들을 무참히 철거하였다. 이에 생존권을 지키고자 장애인 노점상들은 인근 철탑 위로 올라가 농성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경찰들은 한겨울에 소방차의 물대포를 쏘아 대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살을 에는 추운 날씨 속에 농성에 참여하며 추위에 떨던 이덕인 씨가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망루에서 내려가 실종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덕인 씨가 망루에서 내려가 실종되었을 때 망루의 주변에는 전경 2백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경찰은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자 반경 4km 일대에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시신이 발견되자 유족들은 정확한 사인의 규명을 위해 시신을 중앙 길병원으로 옮겼다. 이에 다급해진 경찰은 시신에 대한 영장을 발부하여 11월 29일 새벽 4시경 공권력 천여 명을 길병원 영안실에 투입했고 시신을 지키던 대학생들을 무참히 짓밟으면서 시신을 탈취해 가버렸다. 경찰은 가족이 입회를 거부하는데도 이들을 강제 입회시켜 시신을 부검하고 나서 이를 유가족에게 되돌려 주었다. 결국, 이를 통해 오직 공권력과 철거 깡패들의 폭력으로만 대응하는 김영삼 정권이 얼마나 반민중적이고 반인륜적인 정권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5)

김영삼 정권시기 빈민운동

김영삼 정권 들어서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많은 희생자들이 속출 하였다. 철거지역의 신연숙, 민병일, 박순덕 열사와 노점상인 최정환, 양승진, 이덕인, 열사 등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도시빈민의 존재조건을 주목 받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나 운동의 외곽에서는 철거민과 노점상의 도시빈민 투쟁을 집단이익단체로 매도하거나 부분적으로 고립된 채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특히 노점상 가운데 장애인 노점상들의 희생은 컸다. 최정환, 이덕인 열사는 장애인이면서 노점상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려 있었던 것이다.

노점상으로부터 비롯된 투쟁이었으나 이시기 장애인문제가 새로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장애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밖에도 정치적 민주화가 조금은 진전되면서 시민들의 정치적 기본권의 확장으로 인해 시민운동은 눈에 띄게 활성화 되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발전하지는 못했기에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빈곤을 둘러싼 의제들이 제시되었다. 특히 노태우 정권 때부터 공론화 된 토지공개념은 김영삼 정권으로 넘어오면서 현실적 도입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당시 토지공개념을 주장했던 경실련 등의 단체들은 주목을 받았지만 헌법에 삽입되지는 못했고 실질적으로 집행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분당 택지개발사업을 시작으로 도시는 남쪽으로 점차 확장되어 갔으며 그에 따라 철거민들도 늘어났다. 분당 세입자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1992년 10월 24일 경원대학교에서 경기도 철거민협의회(이하 경철협)가 결성됐다. 경철협은 1993년 6월 28일 서울과 인천, 부산 등 전국에 흩어진 철거단체들을 다시 결집하여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전국철거민협의회(이하 전철협) 창립기념대회를 열었다. 곧이어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이 결성되었고 1994년 6월 21일에 서울 종로구 종묘공원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비슷한 시기에 두 철거민단체가 결성된 원인은 전철연은 철거민의 구성원이 대부분 노동자라는 것을 들어 철거민을 사회변혁을 위한 주체로 파악했다. 투쟁방식에서도 생존권사수를 위한 망루 농성을 비롯하여 대단히 적극적인 방법을 택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70여 개 지부를 거느리던 전철연은 영구임대주택의 쟁취와 가수용 단지 쟁취 그리고 순환식 개발을 주장하며 적극적인 민중연대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면서 전국노점상연합 등의 전빈련과 연대활동을 전개하거나 민중운동 진영과의 학생연대를 강화해 나갔다. 특히 이러한 선명한 노선은 학생들의 현장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거나 학생들의 활발한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철협은 철거민이 생존권을 쟁취하는 데 있어서 유연하고 타협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면서 대책과 관련해서 다양한 각계각층, 특히 기존의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 대한 로비를 통해 철거민의 이해와 이익을 관철하면 된다는 식의 실리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5년 후 매입할 수 있는 국민임대아파트와 가이주 단지를 제공해 달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폭력적·비타협의 노선보다는 대화를 통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 했다. 전철협은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에 가입하고 ‘성경적 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과 함께 ‘토지정의실천시민연대’에 참여했으며 토지공사-주택공사의 개혁 촉구 등의 활동을 펼치면서 민주당 등과 연대를 강화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철거민 운동에 있어서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6)

- 철거용역반원에 대한공동 대응

실질적으로 노점상 단속과 철거지역에서 단속반이나 철거반원이 폭력을 휘두르다 처벌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1996년 4월에 서울시 종암경찰서는 철거작업을 방해한 재개발지역 주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나채복(남 34세)씨 등의 3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신 모 씨(남 33세)등 2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7) 는 기사 자료만 찾을 수 있었다. 이들과 같은 이른바 용역깡패들에 의해 인권이 유린당하고 이로 수많은 철거민과 노점상의 희생자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이들을 고용하는 경비업법과 행정대집행법의 결함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빈민운동 진영은 각각의 노선에 따른 활동을 전개해나갔지만 철거용역반원에 대항해서는 폭넓은 연대 기구를 구성하여 공동의 사업들을 추진해나갔다.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도시빈민층의 경제적인 조건과 생활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개발사업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려는 일방적인 개발 사업은 세입자뿐 아니라 때로는 가옥 주들까지 저항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이에 따라 현행법상으로 철거민을 퇴거시키기 위해서는 법원을 통한 명도소송 절차를 거쳐야 하고 그래도 자발적으로 퇴거하지 않는 경우 행정대집행 절차를 밟게 되어있으며 몇 차례의 계고를 통해서 철거를 집행하는 과정을 밟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현행법상 철거용역반원이 고용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철거업체 직원의 폭력에 대해서 또는 법적 자격이 없는 철거업체가 경비업체의 업무를 수행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법적 규제가 없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아래 재개발지역에서 벌어지는 대대적인 철거는 전쟁 같은 충돌과 폭력의 악순환으로 최근까지 전개되고 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와 같은 민주화 운동은 아니 였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확보와 민주주의 심화를 위해 대 정부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소위 김영삼 정권 들어서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은 과거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직 우리사회는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우리 사회의 전반적 민주화, 실질적 민주화가 되지는 못했다. 민간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정권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는 일부 시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며 한편으로는 민중운동진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빈민운동도 주변화 되거나 고립되어 전개 되었다.


각주)-----------------
1) 전국철거민연합,『철거민 투쟁사』p13-14
2) 조선일보, 1994년 8월 10일
3) 동아일보, 1995년 4월 26일
4) 동아일보, 1995년 4월 11일
5) 최인기, “핏빗아암도”『누리하제』 (노나메기 2004년) pp 22-24
6) 길윤형, ‘두 개의 길, 전철협과 전철연’『한겨레 21 제558호』
7) 조선일보, 1996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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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민 , 세입자 , 빈민운동 , 빈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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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정환 열사 연세대 관련 내용 중 날짜 오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4월 25일 -> 3월 25일

  • 최인기

    제가 맞습니다. 95년 3월 8일 오후 9시 30분경 분신하시고, 3월 21일 오전 1시 50분에 운명을 하셨으며 4월 25일 연세대에서 장례식을 갖게됩니다.

  • 수리눈

    3월 25일 장례식 예정이었는데,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갔고, 연세에서 시신이 없이 장례가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