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공장 담을 넘지 못한 사람들

“아들이 정규직 되면, 판검사도 부럽지 않아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담벼락은 가족과 동지를 둘로 갈라놓았다. 공장으로 들어간 사람들과 밖에 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서로가 간절하다.

공장 밖으로 나온 조합원들은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공장 안으로 남편, 아들을 들여보낸 가족들은 밤잠을 설치고 눈물을 흘린다. 지회 사무실에는 밤낮으로 가족들이 찾아온다. 늦은 새벽, 지회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남편과 연락이 안돼요”라며 눈물을 흘리는 아내도 있다.

“아들이 정규직 되는 날은, 검사 판사 아들도 부럽지 않아요”

20일, 현대차 울산 공장으로 한 조합원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그는 공장 안에 있을 아들을 생각하며 높은 공장 담을 바라보며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생일이었는데... 생일 밥도 못 먹고 새벽에 나갔어요. 그렇게 나가고, 6일째 공장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

한인숙(가명)씨의 아들은 벌써 7일째 1공장에서 점거 농성 중이다. 생일이었던 15일, 아들은 ‘잘 다녀오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한인숙씨는 미역국 한 그릇 먹이지 못한 것이 마음에 사무쳐 눈물을 흘린다.

“잘 있대요. 잘 있다고만 말해요. 그런데 빵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 추운 공장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이 돼요. 다른 사람들은 다치기도 하던데, 그래서 걱정돼서 바로 여기로 왔어요.”

시시때때로 진행되는 사측의 공장 진압 시도로, 조합원들은 계속 실려나간다. 하지만 인터넷도 미숙하고, 따라서 정보를 쉽게 알지 못하는 한인숙씨는 만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무작정 공장 앞으로 찾아왔다. 착한 아들에게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는 것도 이해 할 수 없다. 때문에 한인숙씨는 “가슴이 너무 아파요”라는 말만을 반복 할 수밖에 없다.

“아들은 8년간 비정규직으로 살았어요. 돈은 적고, 더러운 일만 하는데도 대우는 안 좋았어요. 제가 ‘어쩌겠냐, 그래도 참도 일해야지’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참고 8년을 일했는데... 정말 성실하고 착한 아들이었는데... 학교 다닐 때도 모범생이었어요. 군대에서도 모범 군인이었고요. 말썽 한번 안 부린 아들이라 더 마음이 아파요. 속이 많이 상해요.”

혼자 울고 있는 한인숙씨를 발견한 가족대책위 회원들이 다가왔다. 공장에 남편과 아들을 들여보내고, 자신들도 같이 싸움을 하겠다며 모인 가족들이었다. 한인숙씨는 같은 아픔을 가진 그들을 만나고 더욱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한인숙씨는 마지막으로 공장에 있는 아들에게 한 마디를 전했다.

“아들이 정규직이 되는 날에는, 검사 판사 아들도 안 부러울꺼예요. 힘내서, 건강하게 버텨줬으면 좋겠어요.”

쌍둥이 조합원의 투쟁, “공장 안 조합원들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공장 밖에서 공장 점거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4공장의 조미선, 조미애 조합원은 꼭 닮은 쌍둥이다. 현대자동차 공장에 들어온 지는 9년차, 10년차로 동생인 조미애씨가 먼저 입사했다. 같은 4공장 라인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이들은 똑같이 비정규직의 차별을 겪어왔다.


“저희는 차를 만들기 전, 차체 철판에 물새지 않도록 실러를 바르는 일을 하거든요. 1시간에 차 서른 네 대를 만들어요. 2시간 일하고 10분을 쉬죠.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라인을 세우지 못해요. 조장이 와야 화장실을 갈 수 있어요.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는 철야 특근을 해요. 정말 회사에 있을 때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된 것 같아요.

정규직과의 차별도 심하죠. 실러를 바르는 일이 힘들다고 하면, 정규직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요. 그리고 그 자리는 비정규직들로 채워 넣죠. 지금 저희 라인도 그래서 정규직들이 다 빠져나갔어요. 그리고 정규직 연봉이 5000이면, 비정규직은 성과급 포함해서 3000이 안돼요. 성과급 포함 안하면 2000만원이 안되고요.

그리고 사측은 지금 라인에 비정규직조차 빼내려고 혈안이 돼 있어요. 사람을 더 세워도 모자랄 판에 얼마 전에 두 사람을 또 뺐거든요. 그리고 거기에 단기 알바생을 집어넣어요.”


하소연을 하는 조미선씨는 현장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근 투쟁과 촛불 문화제, 이 밖의 투쟁 일정도 빼 놓지 않는다. 15일에는 동생 조미애 씨와 함께 1박 2일간 공장 점거 농성을 소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까지 공장 농성을 하지 못하고 나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그 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정말 끝까지 남으려고 했거든요. 그 때 당시 공장에 1000명 정도의 조합원들이 있었는데, 먹을 것도 부족하고 환경도 열악했어요. 그래서인지 위험할 것 같다고, 우선 공장 밖으로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하는 거예요. 2, 3공장 조합원들이 점거 농성을 확대하기 위해 저희도 함께 나왔는데, 나오기 전에 그 안에 있는 조합원들이 박수 쳐주고, 함께 파업가 불러주고... 정말 눈물이 많이 났어요. 지금도 다리를 못 뻗고 자요. 조합원들만 생각하면 너무 불안하고 걱정돼서요.”

공장 밖으로 나온 쌍둥이 조합원은 곧바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가족대책위를 꾸려 그 속에서 가족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나오기 전, 가족대책위를 꾸려보자는 조합원들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뿐만 아니라 손수 피켓을 만들고, 400장의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처음 공장을 나왔을 때는 정말 많이 울었어요. 할 수 있는 게 집회에 나오는 것밖에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차라리 들어가서 싸우자, 라는 생각도 계속 했는데, 동생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자라고 다시 생각했어요. 우리도 뭔가를 보여주자는 결의도 다졌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적어 피켓을 만들고, 400장의 유인물도 만들었어요. 지금도 제 보물 1호는 피켓이예요. 그리고 가족대책위 또한 맡게 됐구요.”

현장 위원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는 언니는 동생 조미애씨에게 든든한 ‘자매’이자 ‘동지’이다. 쌍둥이 언니를 동지로 둔 소감을 물으니, 의외로 걱정이 많은 듯 했다.

“언니가 굉장히 열심히 해요. 그래서 불안하기도 해요. 조금은 자제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요. 부모님도 저희가 하는 일을 모르시거든요. 어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일부러 얘기 안했어요. 큰 언니도 걱정을 많이 하고요.

그래도 역시 언니가 현장위원이니 힘이 많이 되지 않겠어요? 저희가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아니까요. 꼭 이번 투쟁 승리해서 언니랑 같이 공장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울산=울산노동뉴스,참세상 합동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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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 현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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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멍구야 보고있냐

    멍구야!!

    오늘도 멍멍멍...

    사람답게좀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