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치를 떠는가?

[낡은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1937)

<동물농장>과 <1984>만 읽으면 조지 오웰을 모른다. 이 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어야만 조지 오웰을 온전히 이해한다. 이 책은 오웰 스스로 실제 탄광촌으로 뛰어들어 현장 노동자과 부대끼며 작성한 한편의 실태조사 보고서다.

회개한 식민주의자

본명이 에릭 아서 블레어인 조지 오웰은 1903년 6월 25일 인도에서 태어났다. 돌이 안 돼 영국으로 왔다. 하급 상류 중산층이었다. 영국 명문 사립 이튼학교를 마치고 명문대학이 아닌 버마로 향한다. 1922년 식민 통치기구인 ‘인도 제국경찰’에 지원해 5년간 일했다. 그 시절을 <버마 시절>(1934)로 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와 1929년까지 런던과 파리에서 자발적 부랑자 생활을 하고 그 체험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로 펴냈다. 1929년 파리에서 영국으로 온 오웰은 잉글랜드 동부의 서포크의 부모 집에서 본격 작가가 됐다. 기고와 교사, 노동자, 감옥을 체험했다. 1934년부터 런던에서 낮에는 헌책방 점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 여기서 아내 아일린 오쇼네시를 만났다.

오웰은 1936년 1월 레프트 북클럽이란 진보단체로부터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 실상을 취재해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두 달간 위건, 리버풀, 셰필드, 반즐리 등 랭커셔와 요크셔 지방의 광부 집이나 싸구려 하숙집에 머물렀다. 이 책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이 나왔다.

원고를 넘긴 오웰은 ‘파시즘에 맞서 싸우러’ 스페인으로 떠났다. 스페인에서 부상을 입고 1937년 6월 영국으로 돌아와 <카탈로니아 찬가>(1938)를 썼다. 기대와 달리 상업적으론 실패작이었다. 1939년 2차 대전 발발 뒤 오웰은 왕성한 언론활동으로 많은 기고를 한다. 시민군에 가입해 활동하다 마침내 BBC 방송에서 문화 선전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3살 아들을 입양해 리처드 호레이쇼 블레어라 부른다. 아내 아일린이 1945년 수술 마취사고로 죽었다.

이후 <동물농장>(1945)과 <1984>(1949)를 쓰면서 폐결핵 판정을 받았고 1950년 1월 46살에 죽었다. <동물농장>은 세계적인 성공작이었다. <1984>는 이 책을 탈고한 1948년의 뒤의 두 숫자를 뒤집은 것이다. 1949년 10월 말년의 병든 오웰은 소니아 브라우넬과 결합해 결혼식을 올렸다.

옮긴이 이한중의 말 : 1936년의 오웰, 2010년의 우리

위건 부두는 원래 진창 같은 운하를 다니는 짐배에 석탄을 싣던 다 쓰러져가는 조그만 나무부두였다. 오웰이 찾아간 1936년 당시 위건 부두는 여러 해 전에 사라진 뒤였고 코미디언의 우스개로만 남아있었다. 오웰은 “산업 지대 살풍경의 상징”으로 꼽히는 작은 탄광촌을 어엿한 강변휴양지로 둔갑시켰다.

저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동안,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세력은 높은 자리에 올라 ‘동물농장’의 돼지들처럼 자기 몫의 우유와 사과를 빼돌려놓을 줄은 알았지만 정작 밑바닥을 보살필 줄은 몰랐다. 이들은 권력의 자리를 빼앗기고 나자마자 자기네는 권력이 아니었다는 듯 행세하고 있다. 오웰 식으로 말하면 진보의 실패가 아니라 ‘진보주의자’의 실패임을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박노자의 추천사

오웰은 자본주의도, 자본주의와 싸우는 시늉만 했던 스탈린주의도 동시에 비판했다. ‘민주적 사회주의’와 ‘비판적 개인’의 독립성 사이에 그 어떤 적대적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웰의 사회주의를 이해하자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필독서다. 오웰은 이 책에서 노동자에게 인간적 존엄성을 허락하지 않는 비참한 노동과 생활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 인간다운 삶을 가져올 사회주의의 요체도 잘 설명한다. 그의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상식적’이다.

책 말미에 “연합해야 할 사람은 사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다.” 각종 ‘이론가’와 ‘정파’들이 오랫동안 티격태격하면서 노동자들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어온 한국과 같은 땅에서 오웰의 이야기는 특히 절실하다.

탄광 노동자의 생활 체험

아침이면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는 돌 깔린 길을 타박타박 걷는 여공들의 발소리였다. 나는 190센티미터 가까이 된다. 그래서 광부들은 막장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신문외판원 일은 워낙 절망적이고 지독했다. 6주 정기구독권에 당첨돼 2실링어치 우편 주문을 하면 도자기 세트를 ‘거저’ 준다는 식의 속임수였다.

온몸이 시커메진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놀랍도록 힘차고 빠르게 삽을 휘둘러 석탄을 뜬다. ‘휴식’ 시간이란 게 없으니, 그들은 이론상으론 전혀 쉬지 않고 7시간 반을 일한다. 단 실제로는 가져온 도시락을 먹느라 교대하는 동안 15분쯤 시간을 죽이긴 한다. 도시락은 대개 비계 바른 빵 한 덩이와 차가운 차 한 병이 전부다. 나는 막장꾼인 ‘필러’들이 작업하는 광경을 처음 지켜봤다.

빵을 굽는 것부터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게 직간접으로 석탄을 쓰는 것과 상관이 있다. 평화를 위한 모든 수단에 석탄이 필요하고, 전쟁이 터지면 석탄은 더 필요하다. 혁명기에도 광부는 계속 일하러 가야 한다. 아니면 혁명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혁명도 반동도 석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건, 석탄을 파고 퍼담는 작업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 광부가 사실상 집에 가져가서 자기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액수는 주당 2파운드 정도다. 어떤 혁명이건 지도자는 대개 유식한 말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탄광촌 주택

탄광촌의 집을 답사하고 기록한 나의 메모는 많다. 그 중 하나는 월게이트 지구의 주택이다. 뒤가 장님인 타임으로 위에 하나, 아래에 하나. 거실은 가로세로 3.×3미터, 위층의 방은 아래층과 똑같다. 계단 밑 1.5×1.5미터 골방은 식품 저장실이나 부엌방이나 석탄 창고로 쓴다. 창은 열린다. 화장실까지 거리는 45미터다. 집세는 4실링 9페니에 세금 2실링 6페니를 포함해 총 7실링 3페니다.

열 명씩 되는 식구가 작은 방 둘에, 그것도 기껏해야 침대 4개에서 자야만 한다. 어떤 집에서는 장성한 딸 셋이 한 침대를 쓰면서 모두 다른 시간대에 일을 나갔으니, 서로 일어나거나 쉬러 들어올 때 곤하게 자는 사람을 깨워야 했다. 전쟁 이후 집을 구하기가 불가능해진 인구의 일부는 임시 숙소가 되겠거니 하고 고정식 캐러밴으로 마구 몰려들었다. 인구 8만5천명인 위건에는 캐러밴이 200채 정도이고 각각 한 가구가 사니 거주자는 천 명쯤 된다.

버마에 사는 인도 쿨리들의 불결한 사육장 같은 거처를 바로 떠올렸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사정이 그만큼 열악하지 않은데, 영국처럼 살을 에는 습한 추위와 싸울 일이 없는 데다 햇빛에 소독력이 있기 때문이다.

위건의 진창 같은 운하 둑을 따라가노라면 캐러밴들이 쓰레기 버리듯 내동댕이쳐진 황폐한 터들이 나타난다. 대부분 오래된 버스로 바퀴를 떼어내고 나무 버팀대를 댔다. 캐러번 안은 오전 11시에도 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젖은 매트리스가 있었다. 캐러번 거주자들은 일반 주택 못지않은 집세를 내고 있다. 집세가 1주에 10실링이나 된다.

반즐리의 경우 노동계급을 위해 공중목욕탕은 물론이요 적어도 신규 주택 2천채가 필요하다고들 하는데도 최근에 시 청사 신축에 15만 파운드를 썼다. 반즐리의 공중목욕탕 중에 남성용 간이 목욕시설은 19곳이 전부다. 7만 인구의 대부분이 욕실 없는 집에 사는 광부인 이 도시에서. 15만 파운드면 지자체 주택 350채를 짓고 남은 1만 파운드로 시청을 지을 수도 있었다. 지자체 주택이 아무리 최악이어도 슬럼보다는 낫다. 나는 맨체스터의 칙칙한 슬럼가를 걸어 본다. 나는 더딜 가든 노동자의 집에서 정중하고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실업수당으로 사는 사람들

나는 등록된 실업자를 200만 명 정도로 잡고 거기다 극빈층과 이런저런 이유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까지 합하면, 영국에서 제대로 못 먹는 사람의 수가 많아야 500만 명 정도라고 계산하곤 했다. 하지만 이는 엄청난 과소 추정이었다. 직업안정소의 한 관리는 내게 실제로 실업수당에 의존하며 사는 사람의 수는 공식 집계의 3배 이상은 된다고 했다.

스코틀랜드의 의사이자 생물학자이인 존 오어 경(1880-1971)은 그 수가 2천만 명을 넘는다고 말한다. 경은 영양에 대한 연구와 유엔 식량농업기구 사무총장으로 일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직업센터는 실업자들을 잠잠히 있게 만들고 실업자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데일리 워커>만 읽어도 직업센터는 들어가자마자 역겨운 YMCA 분위기가 느껴진다. <데일리 워커>는 영국 공산당이 1930년에 창간한 일간지로 1966년 <모닝 스타>로 개명했다. 실업자들을 위해 단연 가장 나은 활동을 하는 곳은 ‘전국 실업노동자 운동(NUWM)이다. 이 단체는 실업자들을 단합시키고 실업자들이 파업을 방해하는 세력이 되는 것을 막고 실업자들에게 ’자산 조사‘에 대한 법적 조언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혁명적 조직이다.

노동계급 가정의 거실 풍경

큰 산업 도시에서 가장 가난한 거주지의 사망률과 유아 사망률이 부유층 거주지에 비해 언제나 두 배쯤 높다. 위건에선 집에서 사용할 석탄을 구하기 위해 탄광 쓰레기 열차를 터는 일은 겨울에도 매일 벌어졌다.

셰필드는 인구 50만의 도시이면서도 동부의 평범한 마을 500곳을 합친 것보다 번듯한 건물 수가 적다. 노동계급의 가정에서는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따스하고 건전하고 인간적인 공기가 있다.

(위건지역 실태조사는 여기서 끝난다. 다음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이란 제2부인데, 오웰은 여기서 거친 표현을 동원해 좌우를 모두 공격한다.)

학교에서 익힌 편견

내가 살았던 버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마지막 왕도였던 만달레이에서 위건까지 가는 길은 멀다. 내가 그 실을 택한 이유는 당장은 분명치 않다. 나는 랭커셔와 요크셔 일대의 탄광지대에서 본 다양한 것들을 다소 단편적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처음으로 계급 차별을 알 것은 기껏해야 6살 때였다. 그때까지 나의 영웅은 주로 노동계급 사람들이었다. 중요한 일은 모두 그들이 하는 듯했다. 어부나 대장장이나 벽돌공이 그런 사람이었다.

영국 노동계급은 소름끼칠 정도로 급속히 비굴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업이라는 무시무시한 무기에 주눅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로 자란 유럽인은 자칭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몹시 애쓰지 않는 한 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다. 평균의 중산층 사람이 노동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죽은 영국의 문학평론가이자 에든버러 대학 교수였던 세인츠버리(1845-1933)는 “실업보험은 게으른 밥벌레들을 먹여 살리는 데 기여할 뿐이고, 모든 노동조합운동은 일종의 조직적 구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세인츠버리는 “안전하고 건전한 노동시스템의 비밀 그 자체이자 안전밸브는 ‘비정규’ 노동이 아닐까? ... 산업과 상업이 복잡하게 발달한 국가에서는 정기적으로 임금을 받는 상시고용을 보장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실업자들에게 임금 비슷한 실업수당을 받고 살게 해준다는 것은 우선은 사람을 나태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스크랩북> 마지막 권)

‘진보적 중산층’은 어떨까? 그들은 세인츠버리 같은 사람과 얼마나 다를까? 중산층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하자. 그래서 달라지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그는 계속해서 돈벌이를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어느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를 봐도 그렇다. 이를테면 영국 공산당의 아무개 동지나 <유아를 위한 맑시즘>의 저자를 보라. 공교롭게도 아무개 동지는 이튼 출신이다. 그는 이론상으로는 바리케이드에서 죽을 각오가 돼 있지만 그는 프롤레타리아를 이상시하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자기 계급을 비판하는 장광설을 늘어놔도, 그라 프롤레타리아의 식탁 예절을 익힌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모든 미덕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왜 아직도 수프를 소래 내지 않고 마시려고 용을 쓰는가? 이들은 노동계급을 혐오하고 두려워하고 무시하도록 배운 어린 시절의 교육에 아직도 반응하고 있다.

제국 경찰에서 부랑자로

내가 비싼 이튼 사립학교에 간 것은 순전히 어쩌다 받은 장학금 덕분이었다. 1차 세계대전 전쟁 당시 청년층은 희생을 했으나, 노년층은 지금 시점에 봐도 끔찍할 정도로 비겁했다. 말하자면 노년층은 아들들이 독일군 기관총 앞에 짚단 쓰러지듯 픽픽 넘어가는 동안에 안전한 곳에서 단호하게 애국을 요구했다. 당시의 젊은이들 사이엔 ‘노인네들’에 대한 묘한 혐오의 풍조가 있었다. ‘반정부적’인 것을 자연스러웠다.

내가 다닌 이튼학교의 한 영문학 선생이 “살아 있는 위인을 적어라”는 주문을 했는데 우리 반 16명 중 15명이 레닌을 꼽았다. 17~18살 때의 나는 속물인 동시에 혁명주의자였다. 내 자신을 막연히 사회주의자로 정의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절말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고, 노동 계급이 인간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책 같은 매개를 통해서나 그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잭 런던의 <심연의 사람들>이 대표 사례다. 전쟁 직후인 당시는 영국의 노동계급이 상당히 전투적인 자세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굵직한 탄광 파업들이 일어났다.

나는 나이 스물이 안 돼 버마에 갔고 거기서 ‘인도 제국 경찰’의 일원으로 일했다. 대부분의 몽골 인종이 대부분의 백임보다 훨씬 나은 신체를 갖고 있다. 몽골 인종은 골격이 미끈하며 나이가 들어도 몸매가 젊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5년 동안 인도제국 경찰 소속이었는데 그만둘 무렵엔 내가 섬기던 제국주의에 딱히 뭐라 설명하기 힘든 염증을 느꼈다.

1927년 휴가를 받아 본국으로 돌아온 나는 직장을 때려치울 결심을 했고 실행했다. 나는 5년 동안 압제의 일원으로 복무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이 컸다. 잊혀 지지 않는 숱한 얼굴들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나는 노동계급의 처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나는 적당히 변장하고서 런던의 라임하우스나 화이트채플 같은 곳으로 가서 간이 숙박소에 묵으며 부두 노동자나 행상인, 노숙자, 걸인, 가능하면 범죄자 같은 이들과 어울려 보기로 했다.

모두가 공손하고 친절했고 나를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였다. 나는 그 임시 숙박소에서 2-3일을 묵었고 몇 주 뒤엔 극빈자들의 습성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를 습득한 뒤 처음으로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그 경험을 전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 묘사했다. 나는 아일랜드인 방랑자 하나와 런던 북부 외곽일대를 떠돌았다.

건너기 힘든 계급의 강

안타깝게도 부랑자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계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자신의 계급적 편견을 어느 정도 없앨 수 있을 뿐이다.

압제와 불의에 맞서 싸우는 패배자들의 옹호자로 출발한 소설가이자 희곡가인 존 골즈워디가 끝에 가서는 <은 스푼>에서 경제적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노동계급이 가축 무리처럼 식민지에 끌려가도 좋다는 주장을 한다. 그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아마 파시즘에 도달했을 것이다. 좌파 지식인라면 누구나 당연히 반제국주의자다. 그러나 영국인치고 대영 제국이 해체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25살 때는 열렬한 사회주의자이던 중산층 사람이 35살 때는 거만한 보수주의자가 되는 한심한 현상을 목격한다.

왜 사회주의가 지지 받지 못하는가

전형적인 사회주의자는 두려움으로 덜덜 뜨는 노부인들의 상상과는 달리 기름투성이 작업복에 목소리가 걸걸하며 인상 험악한 노동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5년 뒤면 부잣집 딸과 결혼하고 가톨릭교도로 개종할 가능성이 다분한 젊고 속물적인 과격파다. 절대 잃을 생각이 없는 사회적 지위를 지녔고 은근히 금주주의자인 데다 종종 채식주의자인 경향이 있으며 사무직 종사자인 작고 깐깐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은 이론적으로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해 애쓰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사회적 위신에 악착같이 매달린다. 나는 런던에서 열린 독립노동당의 한 지회에 처음 참석했다가 맛본 소름끼치는 충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따위’ 쩨쩨한 것들이 노동 계급을 위해 싸우는 투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우월감 가득한 거만한 중산층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쁜 성흔(聖痕)을 지닌 이들이었다.

나는 직업적인 연사인 한 공사주의자가 노동 계급인 청중 앞에서 한 연설을 기억한다. 그의 언어는 흔히 볼 수 있는 딱딱한 문어(文語)로 긴 문장과 삽입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나 ‘설령 그럴지언정’ 같은 말이 가득할 뿐더러 ‘이데올로기’니 ‘계급의식’이니 ‘프롤레타리아의 연대’ 같은 전문어 투성이었다. 노동 계급 ‘출신’ 이면서 이론적으로 딱딱한 문어를 구사하는 유형도 많다. 문단의 인텔리가 돼 중산층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유형이거나 노동당 하원의원 또는 고위 노조 간부가 되는 유형인 것이다. 이 유형은 세상에 비할 데가 없는 꼴불견이다. 공산주의와 가톨릭주의가 비슷한 점 하나는 ‘배운’ 사람들만이 완전한 정통파라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주의자를 보면 도대체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곤 한다. 평생 사회주의자로 지낸 버나드 쇼의 희곡들을 보자. 노동 계급의 생활에 이해나 자각이 얼마나 많이 드러나던가? 쇼 자신은 노동자를 무대에 올리는 게 “연민의 대상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 그는 노동자를 그런 역할로도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 단지 우스꽝스러운 인물로만 무대에 올렸다. 그의 태도는 기껏해야 <펀치>처럼 키득거리는 것이고 그보다 심각한 경우에는 그들에게서 경멸스럽거나 역겨운 점만 발견한다.

내가 본 부르주아를 곯려먹는 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좋은 예는 미르스키의 <영국의 인텔리겐치아>다. 이 책은 아주 흥미롭고 잘 쓴 작품으로, 파시즘의 발흥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미르스키는 영국으로 망명온 백계 러시아인으로 수년 동안 런던대학에서 그르쳤다. 나중에 그는 공산주의로 전향해 러시아로 돌아갔고 거기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영국의 인텔리에 대한 일종의 ‘폭로’로 이 책을 냈다. 그는 D H 로렌스를 ‘적나라한 포르노’로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는 단서를 전부 지우는데 성공한 인물이라고 했다. 미르스키가 참 안쓰럽다.

사회주의는 어떻게 파시즘을 키웠는가

노동자와 단 한 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는 상류계급 출신 문인이 있고 그가 같은 부르주아 계급을 향해 독기 가득한 비방을 퍼붓고 있다. 우리는 다시 공산주의와 가톨릭주의가 희한하게 닮았다는 사실과 마주친다. 둘은 서로 다른 말을 하지만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둘은 상당히 비슷하다.

책으로 훈련 받은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부르주아를 규탄하고 맥주에 물을 타자는 개혁가들이다. 지금은 대유행이라 공산주의자지만 5년 뒤엔 파시스트가 되어 있을 운동권과 문단의 눈치 빠르고 젊은 신분 상승자들이 그들이다. 사회주의가 성장하는 것을 막는 것은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며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소위 선봉에 선 자들이다. 책과 이론에 기준을 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억압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사회주의자임을 오웰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막연한 표지로만 사용했을 뿐이다. 입센, 졸라, 아나톨 프랑스, 버나드 쇼, 바르뷔스, 업튼 싱클레어, 월리엄 모리스, 왈도 프랭크 등이 그들이다.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인용하기 좋아하는 확신에 찬 이들을 혐오한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단을 가진 듯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회주의는 적어도 이 섬나라 영국에서는 더 이상 혁명의 냄새를, 압제자 타도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괴팍스러움과 기계 숭배, 미련한 러시아 숭배의 냄새를 풍긴다. 그런 냄새를 한시 빨리 지우지 못한다면 파시즘이 승리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야 할 일

나는 이 책 1부에서 우리가 어떤 난국에 처했는지 설명했다. 2부에선 내가 보기에 왜 정상적이고 지각 있는 많은 사람들이 유일한 치유책인 사회주의에 치를 떠는지 설명해보려고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얼까?

가장 긴급한 일은 파시즘이 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지각 있는 사람들을 붙드는 것이다. 어떤 기치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를 효과적인 방식으로 퍼뜨리는 일이다. 어떤 전쟁도 모든 나라의 산업화를 동시에 쓸어버리지 못한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할 일은 사회주의를 인간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2천만 영국인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파시즘이 유럽의 절반을 장악한 ‘지금’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지금 우리는 모든 좌파가 견해 차이를 잊고 일단 단결할 필요가 있는 절박한 순간에 와 있다. 운동을 전면에 내세울 때 본질만 지킨다면 절대 엉뚱한 사람들과 제휴하는 위험은 없을 것이다. 노동계급 사회주의자는 노동계급 가톨릭신자처럼 교의에 약하고 입만 벙긋하면 이단을 범하기 십상이지만, 핵심을 잃지는 않는다. 그는 사회주의가 압제의 타도를 뜻한다는 핵심을 이해하며 변증법적인 유물론에 관한 어떤 유식한 논문보다도 그를 위해 번역된 ‘라마르세예즈’의 가사에 마음이 끌린다. 사회주의 운동은 변증접적 유물론자들의 리그가 될 여유가 없다. 그것은 압제자에 맞서 싸우는 피압제자의 리그가 되어야 한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본질을 희생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외관은 크게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와 금주주의자와 위선자를 1920년대에 조성된 이상적인 뉴타운 ‘웰윈 가든시티’로 보내 조용히 요가나 하고 지내게 할 수만 있다는 얼마나 좋을까.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구사하는 끔찍한 전문용어도 문제다. 대중은 그런 말을 들으면 영감을 받는 게 아니라 정나미가 떨어질 뿐이다.

중산층이 몰락해 최악의 빈곤층으로 떨어져도 반 노동계급적 감정은 남아 있기 마련이다. 분명히 사회주의 운동은 너무 늦기 전에 피착취 중산층을 포섭해야 한다. 특히 숫자가 워낙 많아서 단결할 줄만 알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사무직 종사자들을 포섭해야 한다.

사회주의 선전에 쓰이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다소 신화적인 인물이 설정됐는데, 이는 근육질이면서 기름때 절은 작업복 차림의 짓밟히는 인간상이다. 영국 같은 나라엔 인구의 4분의 1이 자본가와 이런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있다. ‘자본가’나 ‘프롤레타리아’란 말은 덜 쓰고 약탈자나 피약탈자란 말을 더 쓰면서 일을 해나가야 한다.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계급끼리 협력은 있을 수 없다. 자본가는 프롤레타리아와 협력할 수 없다. 이해관계가 같은 계급의 협력은 언제나 가능하다. 우리가 연합할 사람들은 사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다. 소규모 자작농이 공장 노동자와 연합하고, 타자수가 광부와, 학교장이 자동차 정비공과 연합해야 한다.

여기 있는 나는 중산층 출신이면서 아무리 해봤자 소득이 한 주에 3파운드밖에 안 된다. 내 처지만 보면 나는 파시스트 편이 되느니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게 낫다. 그러나 누가 나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계속 비난한다면 나는 반감을 품게 될 수밖에 없다. 경제적으로 나는 광부나 건설 인부나 농장 인부와 한 배를 타고 있다. 나에게 그런 사실을 일깨워보라. 해고당하는 꿈을 자주 꾸는 모든 은행원은 파산 직전을 오가는 모든 가게 주인은 본질적으로 같은 처지다.

신성한 세 자매, 정반합은 언급하지도 말고 ‘계급의식’이니 ‘프롤레타리아 연대’니 하는 말은 줄이고 정의와 자유, 실업자들의 곤경을 더 자주 이야기하는 게 좋다. 모든 피착취 인민의 이해관계는 같다. 사회주의는 상식적인 양식과 조화를 이룬다. 무엇보다 근육질의 노동자를 상징으로 내세우는 계급 타파 투쟁을 그만둬야 한다.

툭하면 굶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나 케임브리지 출신 실업자, 탈 배가 없는 해군사관, 사무원, 공무원, 출장 판매원, 포목상 등 우리 중산층은 더 이상 발버둥 칠 것 없이 우리가 속한 노동계급 속으로 내려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