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EU FTA 민주당 묵인 속 통과, “야권연합 액세서리”

냉각기 거치겠지만 야 3당 연대구조 유지 될 듯
민주당, 여야정 합의 원죄에 허덕이다 본색 드러내고 실리 못 찾고

4일 밤 11시께 한-EU FTA 비준동의안이 민주당의 묵인 아래 본회의에 상정돼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의원 7명은 본회의 개의 전에 ‘한-EU FTA 반대’ 손 팻말을 들고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의장석을 점거했지만 국회 경위들에게 10여분 만에 밀려났다.


이번 여야정 합의로 본회의 강행처리 명분을 제공했던 민주당은 저녁 9시 께 비공개 최고위원회를 열고 ‘비준안 처리에 반대하지만 한나라당의 강행처리를 막지 않는다’고 결정하고 본회의장에 입장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본회의가 열리는 시각에 국회 예결위에서 의원총회를 열었다. 비준안 처리 반대 당론을 결정했지만 대국민 이미지를 고려해 한나라당의 강행처리를 암묵적으로 동의해 준 셈이다.

민주당 묵인으로 비준안이 통과되자 강상구 진보신당 대변인은 “민주당은 야권 정책연합을 정권 재탈환계획의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한 것 뿐”이라며 “특히 정책연합을 깼다는 사실은 민주당이 선거 이후에 어떤 합의를 지킬 계획도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야권연합 일정한 냉각기 거친 후 야3당 기본구도 될 듯

민주당의 사실상 배신에 따라 진보개혁 진영 야권연합에 미칠 후폭풍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일정한 냉각기를 거치고 나면 민주당-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의 야권연합 구도는 기본적으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진보신당은 지난 노동법 재개정 공동발의에서 빠진 것처럼 사안별 연대 전술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전망은 비준동의안이 통과되고 난 후 본회의장 앞에서 열린 진보양당 의원들의 입장발표에서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민주당 문제를 언급했지만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한나라당의 반서민 법안 강행과 의회독재만 지적하며 민주당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이날 저녁까지 “야권연합에 중대한 결단을 내리겠다”며 민주당을 압박하던 강경한 분위기와는 기류가 달랐다.

권영길 원내대표는 “이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고,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사회며 품격높은 나라냐”며 “우리도 국회를 새롭게 만들기 위해 각 의원별로 반대 토론문을 준비하며 국민에게 이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다수독재로 그것도 막았다. 이명박 정권 심판을 정말 호소드린다”고 말했다.

이정희 대표는 “한-EU FTA가 발효되면 서민의 법은 비참히 무너진다”며 “지난 3년간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이 끌어온 국회는 민주주의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 한나라당 심판만이 방법이다. 1년 뒤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자”고 한나라당을 비난했다.

김선동 의원도 “오늘 다시 한나라당이 서민을 내팽개치고 서민을 죽이는 한-EU FTA가 통과 됐다. 서민의 꿈과 희망을 짓밟는 한나라당을 서민의 손으로 심판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통상관료의 말 놀림에 휘둘려 졸속으로 처리된 FTA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농민과 영세상인이 입을 것”이라며 “한나라당의 일방독주, 민주당의 오락가락이 만들어낸 오늘의 사태에 대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새롭게 방향을 설정하겠다”고 밝혔다.

의원단 입장발표가 끝난 후 강기갑 의원은 ‘민주당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민주당에는 말도 안 나온다. 일을 저질렀으면 마무리도 같이해야 하는데 저렇게 무기력하게 포기해서 되겠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강 의원은 “그러나 한나라당 심판을 위해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우리 생각만 하면 민주당이 맘에 안 들고 엄중하게 심판해야 하지만 한나라당에 고통 받는 민중의 박탈감을 봐야한다. 한나라당을 심판하라는 국민의 명령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은 그거하나 붙잡고 나갈 수밖에 없는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FTA 문제에 가장 강경하게 대응하며 농성장을 지나는 박지원 원내대표가 기자들 앞에서 청한 악수도 거부하던 강 의원의 답변은 한나라당 심판에 역사적 무게감을 둔 것으로 읽힌다.

조승수 대표는 같은 질문에 “앞으로는 민주당과 진보신당과의 관계로 풀어야 한다“며 ”야권연대의 선거공학적 협상과정이 이번 문제로 드러났다. 그동안 진보신당은 가치연대와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일로 정책협상의 비중이 더 커길 것이다. 야권연합의 의미를 따로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다. 이게 이번 과정이 가져온 역설적 의미“라고 설명했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본회의 통과가 끝난 후 민주당을 비판하는 논평을 냈지만 톤은 부드러웠다. 우위영 대변인은 “4.27 재보궐 선거의 승리적 결과에 자만하지 않고 야권연대 정신에서 겸허히 출발해 다른 야당과 충분한 협의를 선행했더라면, 민주당의 패착은 없었을 것”이라며 “야권연대는 자리 나눠 먹기식의 앙상한 후보단일화가 아니다. 서민의 이익과 진보적 가치에 기반한 정책연대야말로 야권연대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하다는 것을 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민주당에 촉구했다.

우위영 대변인은 이어 “민주노동당은 이명박-한나라당 정권의 반서민 통상정책에 끝까지 맞서 나갈 것이며,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이명박-한나라당 정권을 기필코 심판하여 반서민 졸속 통상을 모조리 바로잡고 서민경제를 반드시 바로 세우겠다”고 밝혔다.

  본회의 표결이 끝난 후 진보양당 의원들이 입장발표를 하고 있다.

민주당 배신에 민주노동당 충격파 더 클 것

민주노동당은 공식적으로는 말을 아끼고 있지만 야권연합의 한축인 민주당의 배신에 강한 당혹감을 보이고 있다. 당장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민주당과의 야권연합에 강한 반발이 나올 가능성도 크다. 상대적으로 진보신당은 이미 노조법 재개정 공동입법 발의 과정이나 제주도 영리의료 문제 등에서 민주당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하며 거리를 둬 온 만큼 이후 행보가 자유로울 수 있다.

진보신당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합의 하자 민주노동당은 강한 당혹감이 옅 보일 만큼 ‘저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노조법 재개정에 이어 또 뒤통수를 맞은 것”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또 “사고는 민주당이 치고 기회주의 적으로 쏙 빠지면서 민노당 내 민주당 연합을 주장하는 주류의 입지가 약화 될 것이고, 민주당과 연합에 적극적이던 민주노총도 타격이 클 것”이라고 전망했다.

민주노동당의 한 관계자는 “이번 민주당의 배신으로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민주당과의 연대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터져 나올 것이다. 내부가 복잡하게 됐다”며 “지금은 민주당과 확실히 선을 긋고 민주당의 배신을 정확히 비판해야 민주노동당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유선진당 조차 민주당 밀실야합 비난

이날 의장석에서 10여 분만에 밀려난 진보정당 의원들의 전술은 장시간 반대토론을 통한 합법적인 의사진행방해 전술(필리버스터 filibuster)이었다. 진보양당 의원들은 한 시간이 넘는 반대 토론문을 준비해 왔지만 박희태 국회의장은 이정희 대표, 강기갑 의원의 발언이 끝나자 토론 종결 안건을 표결에 부치고 토론 종결을 선언했다. 토론이 종결되자 박희태 의장은 바로 표결을 강행해 비준동의안은 재석 169인 중 찬성 163인, 반대 1인, 기권 5인으로 의결됐다.

반면 보수야당인 자유선진당은 할 말은 하고 집단 퇴장하는 전술을 택했다. 비준동의안이 상정되자 권선택 자유선진당 의원이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의 유럽순방일정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한나라당이 청와대 거수기를 자임하고 나섰다. 여기에 밀실야합으로 들러리가 된 민주당은 더 한심하다”며 “농수산 대책은 전혀 실효성이 없고, SSM법을 무력화 시키는 법안이다. 밀실야합에 의해 짜인 각본에 자유선진당은 동참할 수 없다”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비난하며 본회의장을 전원 퇴장했다.

애초 야권연대를 선거공학으로만 이해 한 민주당은 끝내 한-EU FTA 여야정 합의 원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4일 오후 의원총회가 끝나고 반대의견으로 분위기가 형성된 사실을 알리는 자리에서도 “제가 아는 농민과 중소상인들이 합의 내용이 좋다고 했다. 이 정도 얻어냈고 수출 없이 먹고살 수 없는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다소 야권 연합에 섭섭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처리해야한다는 개인적 소신을 갖는다. 하지만 의총에서 결정되는 대로 개인의 소신보다는 선당후사의 입장에서 따라가겠다”고 자신의 정당성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박지원 원내대표의 개인 소신으로 인해 민주당은 야원연합의 배신자로 다시 각인 됐고, 모처럼 선거 승리로 인한 지지율 상승 국면에서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 실리조차 챙기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박지원 원내대표가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함께 대표직을 마무리 하며 유종의 미를 거둔다는 애매한 협상 원칙으로 상처만 남긴 꼴이 됐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야3당과 당내 의원들이 협상결과에 반발하자 비공개 의총에서 “이번 한-EU FTA 비준안을 두고 정부 부처 4개 장관을 포함한 여야정 15인 회의를 구성해 협의한 것은 국회와 정부가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며 “우리 민주당의 협상 대표단이 장관 출신이고 경력 있는 분들이라 대단히 훌륭한 협상을 했다”고 강조했다.

박지원 대표는 또 “우리의 요구에 대해 정부가 완강히 버텨서 김무성 대표가 ‘민주당 안대로 해 달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29일 한나라당에서 일방적으로 강행처리 하겠다고 해서 ‘그럼 안 된다. 15인 회의를 계속 가동해 우리가 노력하자’고 했고, 김황식 총리로부터도 약속한다는 두 번의 전화가 있었고 이재오 특임장관도 두번 전화했다”고 합의과정을 설명했다.

박지원 대표의 이런 주장을 두고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15인 회의만 놓고 보면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정부에 큰소리를 치며 박지원 대표의 요구를 90%이상 관철시켰다. 박지원 대표로선 비준안 처리를 반대할 명분이 없다”고 전했다.

박지원 대표는 야권연합을 두고도 상황에 따라 야권 정책연합을 어길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말도 토해냈다. 박 원내대표는 “야권 정책합의문이 다 안 지켜졌을 때 민주당은 아무것도 못할 것인가.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반대하는 선명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민주당은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며 “야권 합의에 민주당이 계속 거기에 머무를 것인가. 저는 연합 연대의 필요성과 정책연합의 필요성을 가장 절감하며 이를 노력하고 추진할 사항이지만 책임있는 민주당으로서 이것은 문제가 있다”고 자신의 생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