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김은숙을 추모하며

[낡은책] 불타는 미국 (김은숙, 아가페, 1988.2.10, 181쪽)

[편집자주] 불타는 미국의 저자 김은숙 씨는 암으로 투병 중 5월 24일 오전 7시 50분 서울에서 운명했다. 이 글은 5월 중순경 작성된 글로, 고인이 암 투병 중에 고인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을 함께 담고 있다. 다시 한번 고인을 추모한다.


투병중인 김은숙 오월어머니상


지난 한 달 동안 ‘김은숙’이란 이름이 두 번이나 언론에 오르내렸다. 김은숙은 지난달 4일 경향신문에 임수경을 통해 암투병 중인 채로 나타났다가 지난 9일엔 한겨레신문에 오월어머니상 수상자로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김은숙의 본적은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2년 3월 18일 5.18의 진짜 주범이 미국임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3.18 부미방’(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다. 우리가 ‘부미방’ 하면 먼저 문부식 김현장을 떠올리는 건 남성 중심의 더러운 문화 탓이다. 실제 부미방의 주인공은 김은숙, 최인순 등 4명의 여성이었다. 그래도 수컷 중심의 권위주의 문화가 몸에 벤 우리 공안당국은 너무도 당연하게 문부식을 주범으로, 김현장을 배후로 지목했다.

김현장은 1982년 봄 부산 대청동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이 사건과는 무관한 사람이다. 문부식은 주범이라기엔 너무도 우스꽝스런 역할을 맡았고 그마저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다. 투병중인 김은숙 씨의 자존감에 어떤 상처를 낼지도 모른 채 모금액까지 적시해가며 쓴 오마이뉴스 기사에 붙은 덧글 중 하나에, 문부식의 부끄러운 행적이 낙인처럼 묻어 있다. 글을 쓴 기자가 그 덧글의 뜻이 뭔지 알기나 하겠나.

5년 8개월 결코 길지 않은 옥살이 뒤에도 김은숙은 인간의 길을 걸었다. 지난해 가을 위암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자녀를 돌보는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했다. 문부식의 길과는 사뭇 달랐다. 대학 때 명세했던 그 길을 쭉 걸어왔다. 29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그이가 꼭 일어나 부미방 30주년 기념일을 맞았으면 한다.


<불타는 미국> 부미방 보고서

이 책 <불타는 미국>은 제목이 상징하는 그대로, 1988년 6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김은숙이 기록한 부미방 보고서다. 저자 김은숙은 1958년생으로 고신대 기독교 교육학과 4년 재학 중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로 1심 무기, 3심서 10년형 확정,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 1983년 5년으로 감형, 1986년 8월15일 가석방됐다.

부미방은 전두환 정권의 말대로 혈기방자한 젊은이들이 저지른 난행이 아니었다. 광주학살에 미국의 책임을 최초로 물었다는 요즘 진보연하는 언론의 지적 수준도 훨씬 뛰어넘었다. 부미방은 80년대초 한미 관계의 난맥상을 정확히 꿰뚫은 화살이었다. 군산복합체의 나라 미국이 당시 한국 같은 제3세계에 저지른 여러 제국주의 침략의 결과물이었다.

김은숙은 이 책 앞부분에 미국의 곡물대기업 코넬과 전두환 정권의 더러운 거래부터 언급한다. 이어 김은숙은 미국 석유재벌 걸프와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추악한 뒷거래도 언급한다.

제국주의 미국과 한국의 군사정권

82년 1월 발생한 ‘미국산 쌀도입 뇌물수수사건’은 미국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미국의 쌀 수출업자 코넬은 81년 당시 국제시세로 톤당 350달러 하는 쌀 10만톤을 톤당 449달러90센트로 한국에 강매해 1천만달러의 폭리를 취하고 그 일부를 한국 전두환 군사정권에게 뇌물로 줬다. 이 혐의로 코넬은 미국 법정에서 재판까지 받았다.

국내에 이 사실이 외신을 타고 보도되자 한국 국회는 특별조사위원을 구성해 논란을 거듭했다. 그러나 쟁점은 “주로 누가 얼마나 받아 처먹었느냐?”였고 결론없이 일단락됐다.

미국 기업이 막대한 이윤을 남긴 뒤 그 이윤의 일부를 자기 기업을 도와준 제3세계 정권에게 정치자금조로 내주는 것은 매우 상습적인 수법이었다. 특히 한국에선 박정희 시절부터 전통 비슷한 것이었다.

미국 석유재벌 걸프가 불공정한 조건으로 막대한 이윤을 확보한 뒤 그것을 정치자금조로 내준 것이 1975년 5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에서 폭로된 적이 있다. 당시 걸프는 “전세계 외국정부에 지불한 오백만 달러의 정치자금 중 80%가 한국의 공화당 정권에 지불되었다”고 폭로했다.(‘한국사회의 성격과 운동’ 95쪽)

1인당 1만달러의 소득을 자랑하는 미국이 겨우 1천5백불(82년 당시)에 불과한 나라에서 1천만달러를 울궈갔다. 국회 외미도입 진사이규명 9인 소위원회 증인으로 출석한 신병현 전 경제기획원장관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부끄럼없이 쏟아져 나왔다.

“코넬은 한국의 안보를 들먹이며 협박까지 했다. 10.26때 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한국에 몇 시간 만에 파견한 줄 아냐, 한국의 군사지원을 의회에서 방해할 수 있다. 알래스카 어업 쿼터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는 등의 협박으로 일방적 쌀 도입 계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육사 8기생의 아들 문부식

문부식의 아버지 문경삼과 그의 네 형제 중 세 명은 육사를 나온 군인 집안이다. 아버지 문경삼은 육사 8기로 김종필과 동기였다. 문경삼 씨가 1959년 군대 내부의 점증하는 부조리와 이승만 정권의 부패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군복을 벗지 않았다면 이후 문부식의 삶은 어떠했을까. 대령으로 예편하신 아버지 덕에 문부식은 매우 유복한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문부식과 김은숙이 맨 처음 얼굴을 대면한 것은 77년 초여름. 김은숙이 고신대 기독교 교육학과에 갓 입학해 대학생활을 시작한 지 두세 달 남짓 되었을 때 같은 과의 친구가 “괜찮은 남학생”을 소개해 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약도가 맞지 않아 서로 엇갈렸다. 김은숙은 다음날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신학과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문부식이 신학개론 수업에 들어갔음을 확인한 김은숙은 강의실로 달려갔다. 노닥거리고 있던 문부식을 확인하고 “당신이 문부식이죠, 약도를 그려주려면 똑바로 그려주어야 할 것 아녜요.” 소리를 지르고는 강의실을 나와 버렸다.

20대 청춘의 대학생활

이후 80년 3월까지 둘은 한 번도 얼굴을 부닥치지 않았다. 문부식이 80년 고신대에 복학했을 때 김은숙도 같은 학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김은숙이 졸업반이어야 하지만 그이도 1학년 마치고 1년간 휴학을 했기에 3학년이었다. 김은숙은 당시 영도구 봉래성당에서 주관하던 ‘밀알야학’의 사회선생님이었다.

유승렬은 최인순과 김지희가 미 문화원에 불을 지르던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 같은 시각 유나백화점 4층에서 32절지 유인물 200부를 살포했고, 박원식과 최충언도 국도국장 3층에서 대로를 향해 유인물 200부를 살포했다. 당시 유인물 내용을 다음과 같다.

꼼꼼하게 기획한 부미방의 선전문구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해방후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경제수탈을 위한 것으로 일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소위 우방이라는 명목 하에, 국내 독점자본과 결탁하여 매판문화를 형성함으로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의 지배논리에 순응하도록 강요해왔다. 우리 민중의 염원인 민주화․사회개혁․통일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파쇼 군부정권을 지원해 민족분단을 고정화 시켰다.

“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 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 시민들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 1982. 3. 18”

도피에서 자수까지

방화 후 문부식은 군 입대, 김은숙은 노동현장으로 가기로 했다. 사건이 의외로 커지고 3월 20일 서정화 내무부 장관의 강경한 담화가 발표되자 둘은 일단 도피하기로 결정했다.

김은숙이 먼저 원주로 가자고 제의했다. 원주에는 ‘정의평화구현사제단’을 일으킨 지학순 주교가 계셨다. 둘은 3월 20일 밤차를 타고 21일 원주에 도착, 원주교구에 전화했으나 지 주교는 해외출장중이었다. 원주교육원의 최기식 신부에게 전화했다. 문부식이 지난 겨울 김현장과 함께 합숙했던 원주교육원의 최기식 신부를 떠올렸다.

교육원에 도착한 문부식과 김은숙은 뜻밖에 김현장을 만났다. 김현장은 광주사태 관련자로 수배 중이었다. 만나자 마자 문부식은 김현장에게 방화사실을 털어 놓았다. 수사망이 좁혀지고 있음을 알고 문부식이 3월26일, 김은숙이 3월30일 원주교육원으로 돌아왔다.

문부식의 신앙고백서

문부식은 3월 26일 자수를 속으로 결심하고 자신의 사상과 방화 동기 등을 상세히 적은 신앙고백서를 김수환 추기경 앞으로 써 놓았다. 아래는 그 중 일부다.

“아버님께서는 모두 5형제로 그 다섯 분이 모두 육사를 나오셔서 그 중 세분은 대령으로 예편하셨습니다.(앞서 김은숙의 서술과 일치하지 않지만 원문 그대로 옮겼음) 우리 언론은 깡패와 같은 위치의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닙니다. 아무리 외견상으로 형식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백성의 편에 서지 못하는 언론, 일개 장교가 수많은 시민을 죽여도 사실 보도 한마디 전해주지 못하고 이를 응징하는 학생들의 의로운 투쟁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추측보도를 일삼는 언론은 이미 언론도 아니며 역사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문부식은 82년 3월의 우리 언론을 ‘깡패’로 표현했다. 그런 이가 최근엔 조선일보에 기탁해 글을 썼다. ‘깡패’는 여전히 깡패일 뿐인데.

결혼을 약속했던 두 사람

1982년 4월 1일 자수를 두 시간 여 앞두고 문부식과 김은숙은 결혼식에 대신한 예식을 올렸다. 문부식과 김은숙은 입학동기로 3학년 때부터 서로를 이해하게 돼 이성으로 또 동지로 사랑하게 된 사이였다.

두 사람은 최 신부에게 주례를 간청했으나 최 신부는 교회법적으로 사회법적으로 두 사람의 결혼이 성립할 수 없음을 설명해주고 거절했다. 두 사람의 간절한 애원으로 성단관리인 문길환과 원주에서 치악산 서점을 경영하던 김영애와 김현장을 증인으로 세우고 기도를 해 주었다. 그리고 이 예식이 두 당사자 간에는 유효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자수절차에 대해서는 최 신부가 서울 명동성당의 함세웅 신부와 상의했고 정부의 고위 당국자와도 만나서 자수에 따른 법적 이익을 보장하겠다는 약속까지 얻었다. 당시 함세웅 신부와 청와대 수석 비서관과 합의한 자수조건은 아래의 4가지였다.

1. 고문이나 잔혹행위를 하지 않는다.
2. 법률상 이익을 최대한 보장한다.
3. 변호사를 선임하는데 협력한다.
4. 될 수 있는 한 조용히 해결한다.

4월11일 오후 1시 문부식과 김은숙은 서울의 안기부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됐다. 그들이 자수한 하루 뒤 김현장이 검거되었다. 그 역시 자수형식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은 시종일관 “북괴노선 동조, 좌경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단정했고 제도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충실하게 홍보했다.

80년대 공안기관의 조사방식

안기부에 자수한 문부식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거쳐 부산시경에서 조사받았다. 문부식의 고백 : “경찰은 김은숙을 네가 보는 앞에서 여럿이 욕보이겠다고 협박하여 김은숙을 빈방으로 불러내려고까지 하였으므로 김현장을 배후조종자라고 허위로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은숙은 부산시경에서 내외문화사라는 곳에서 조사받았다. 김은숙의 고백 : “7, 8명의 남자가 둘러싸고 옷을 벗기려 달려들기에 스스로 벗었다. 팬티 하나만을 입고 있으라 했다. 옆방에서 박정미를 보았는데 그녀도 알몸인 상태에서 머리가 젖은 채 울고 있었다.”

김지희의 고백 : “거의 강제로 팬티만 입힌 후 움직이지 못하게 손을 뒤로 하여 수갑으로 두 손목을 묶은 채 욕탕 앞에 꿇어 앉히고는 두 명의 형사가 각각 팔뚝 하나씩을 꼭 잡고 또 한명의 형사가 구둣발로 사정없이 무릎을 짓눌렀습니다.”

문부식은 1심 5차 공판 중 변호사의 질문에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없어 우리의 의사를 반영할 길이 없었다. 한국의 언론은 정치권력의 폭력을 합법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해 있다.”고 말했다.

방화와 무관했던 김현장

1950년 당시 강진군의 부농이던 김동균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강진군 제일의 유지 집안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강진군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전쟁이 끝나고 점차 몰락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억만장자였는데 연세대를 지을 무렵 땅 7만평을 희사하고 강진농고를 건립했다. 김현장은 1966년 강진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1973년 2월까지 연탄장사, 맥주홀의 종업원 겸 색소폰 연주자, 공사장 인부 심지어 탄광 광부의 생활도 했다. 각각 2년 터울인 동생 김백훈, 김상호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73년 4월로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두 동생의 학비와 생활비로 고민하다가 강도짓을 했다. “떨어진 식량으로 2주 이상을 끼니를 건너뛰면서 견디었다. 동생들은 하루를 아침에 먹은 반조각 라면으로 견디다가 집에 오면 쓰러져 눕기 일쑤였다. 나는 정신을 잃고 백주에 뛰어나가 미친 듯이 돌아다니다가 강도짓을 벌였다.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의 교통경찰에게 자수하고 처벌을 받았다. 내가 연탄장수 시절 단골 아주머니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재판부에 용서를 탄원했다. 강도상해 죄목을 2년에 5년이라는 집행유예로 낮춰 나는 석방됐다. 배고프다는 이유로 강도질을 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르포작가였던 김현장

김현장은 78년 2월 조선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인천의 한국기계와 일신제강 두 군데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길을 걸었다. 졸업 후 만 2년간 농촌문제와 여성문제, 올바른 종교관을 다루는 논문과 기사, 르포물을 쓰면서 이 땅의 고통을 폭로하는데 전력했다. (김현장은 자유기고가로 월간잡지 ‘뿌리깊은 나무’에 여러 차례 르포물을 기고했다.)

김현장은 광주항쟁 때 <전두환 살육작전>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직접 만들어 2만부를 복사해 전주 등에 살포했다. 광주학살은 김현장의 일생에 충격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김현장은 부끄럽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그를 엄습했다. 이후 광주학살 관련자로 수배돼 80년 5월 말 최기식 신부가 있는 원주교육원에 의탁했다. 원주에서 김현장의 대부로 나선 이가 한국교회사회사업선교회(산선)의 회계 일을 하던 이창복이었다. 이창복은 후에 김현장의 배후로 조작돼 수난을 당했다.

김현장은 “81년 12월 28일 부산을 방문한 것을 사실이나 그것은 평소 수집하던 ‘관광기생의 실태조사’에 관한 자료를 찾으려 했던 목적이었다. 우리나라 매춘관광의 실태는 심각했기에 이미 그에 관한 르뽀기사를 <뿌리깊은 나무> 등 월간지에 투고한 바도 있다. 이 부산행에서 문부식군의 자취방에 여장을 풀었다.”

실제 김현장은 <뿌리깊은 나무> 1979년 5월에 ‘이윽고 관광 기생이 되고야 만 이 처녀들’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1981년 12월의 부산 방문은 그 후속 취재를 위한 것이었다.

20살의 의대생 박원식

박원식은 1982년 사건 당시 만 20살로 고신대 의예과 3학년이었다. 부미방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뒤 1983년 12월에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박원식은 1982년 8월 부산지법에서 1심 재판 때 이렇게 발언했다. “법정에서 여학생 누나들이 고문받았다고 진술할 때 검찰 측이 이해 못할 웃음을 지었다. 나는 고문 사실을 아는 검찰 측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교육을 받은 자가, 이 나라의 인권을 지켜야 할 검찰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고문 사실을 알고, 고문을 지휘한 검찰은 내 동포를 향해 용공주의자, 테러리스트, 파괴주의자란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김은숙이 기록한 사건 관련자들의 1988년 근황

1986년 8.15 특사로 김은숙, 이미옥(고신대 의대2, 당시 20살), 최인순(부산대 약대3, 당시 20살), 김지희(부산여대 국교3, 당시 21살) 등 4명의 여성은 풀려났다. 김현장(당시 32)과 문부식(당시 23)은 청주와 대구교도소에 여전히 수감중이다. 유승렬(부산대 공대3, 당시 20살)과 박원식(고신대 의대3, 당시 20살), 최충언(고신대 의대3, 당시 19살), 최기식(39)신부는 83년 8월11일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1983년 김현장은 문부식 김은숙을 도피시킨 혐의로 구속되었던 원주 치악서점 주인 김영애(당시 25살)와 옥중에서 혼인신고를 해 부부가 됐다. 요즘(1988년)은 김영애가 한 달에 한 번 꼴로 면회를 가고 있다.

문부식의 아버지 문경삼은 86년 3월 부인과 함께 서울서 내려와 아들이 수감돼 있는 대구 근교 구미시에 정착해 식당을 하고 있다. 최인순은 부산 천주교 사회운동부산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 간사로 일하고 있다. 이미옥(고신대 의대2, 20)은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김지희는 부산 집에 머물고 있다. 박정미는 87년에, 최충언은 84년에 복학해 학생이다. 박원식(고신대 의대3, 20)은 수사과정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학교를 중단한 채 고생하고 있다.

중요한 사족 하나, 내가 아는 사건 당사자들은 모두 1982년 봄 부산 미국 문화원에서 공부하던 동아대 학생의 죽음에 속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