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진압으로 물든 유성기업 90년, 2011년 봄

[유성기업 늙은 노동자의 노래](1) “87년,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일어났다”

“공돌이로 그렇게 살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고 우리도 일어났다.”

2011년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또 일어났다. 임금인상과 복지개선을 위해 87년 노동자 대투쟁 파도에 몸을 실었던 노동자들은 이제 40대~50대 후반의 ‘늙은 노동자’가 됐다. 이들은 다시 야간노동을 없애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자의 건강권을 지키자며 ‘주간연속2교대 및 월급제’ 싸움에 나섰다.

두 번의 경찰병력 투입과 전 조합원 연행. 노동자의 목소리로 유성기업 노사관계와 노조의 역사, 늙은 노동자의 진한 한숨을 들어본다.

지옥은 87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70년대 말, 유성기업은 서울 오류동에서 사업을 확장해 부천시 송내동으로 이전했다. 지금 아산, 영동, 대구, 남동, 울산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750여명, 부천공장 당시 350여명이 일하던 규모에 비해 배로 늘었고, 자회사도 여러 개다.

29년째 유성기업에서 일한 김봉수(53세) 씨, 23년째 일한 엄병주(46세) 씨, 29년째 일한 이재윤(57세) 씨 모두 군대 제대하자마자 부천 유성기업에 입사했다. 휴식시간도 없고, 잔업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던 그때. 지옥 같은 삶은 87년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29년째 유성기업에서 일한 김봉수(오른쪽) 씨, 23년째 일한 엄병주(왼쪽) 씨

“노동환경이 굉장히 열악했어요. 87년 이전에는 관리자랑 생산직이 구분되어서 살았지. 그때 관리자의 권력은 막강했어요. 잔업, 조퇴 등은 허락 받을 수도 없었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지. 관리자는 노란색, 생산직은 회색으로 모자색도 달랐어요. 식당도 부장급 이상은 밥을 따로 먹었죠. 지금은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하지만 그때는 새벽 5시에 출근했어요. 공정마다 맞교대 하는 곳도 있었고... 임금은 약했지요. 노조 활동하면서 임금이 올라간 것이지. 칠판에 300원, 250원 적어놓으면 그걸로 임금인상은 끝이었어요.”

당시 노조는 있으나마나, 아니 없는 게 더 나았다. 회사와 노조간 유착이 극에 달했다. 노동자들은 이를 ‘어용’노조라 불렀다. ‘어용’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력자나 권력 기관에 영합하여 줏대 없이 행동하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노조 사무실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라. 노조 자체가 회사랑 유착해서... 노조 선거 때만 위원장 되려고 술 막 사주고, 당선되면 그걸로 끝이지. 당시 박00 위원장이 몇 번 위원장 해 먹었어요. 임금인상도 조합원은 무시하고 회사랑 노조 간부 랑만 합의해 가장 낮은 금액으로 올리고.”

노동자의 삶에도 태양이 비추기 시작한 건 87년 이후다. 유성기업에서 어용노조가 아닌 ‘민주노조’를 세워내기 위한 노동자의 힘은 미약했지만, 노동자들은 깨어나기 시작했다. 김 씨와 엄 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용기 있게 맨 앞에서 민주노조 결성을 이끌었던 동료를 떠올렸다.

“87년 대투쟁 오면서 김동암(현재 고인으로, 84년 유성기업에 입사해 유성기업 민주화 투쟁과 현장성과 투쟁성에 기반을 둔 강력한 노조 건설을 주도해 온 노동운동가)이라는 사람으로 인해 우리가 많이 깨우쳤어. 노조는 이런 거다, 노동자의 권리는 이런 거다 하고 알려줬지. 김동암은 병역특례로 온 사람이었고, 일을 참 잘해서 유성기업으로 오게 됐어요. 그 전에 대학생 3명이 노동운동 한다고 위장취업 해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우리도 그 사람들 잘 몰랐고, 빨갱이라고 배척도 하고 그런 상태였어요.”

90년 봄과 2011년 봄, 두 번의 경찰병력 투입

90년 봄,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을 하자 경찰병력이 투입됐다. 강산이 바뀌었지만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 방식은 변함이 없다. 정부는 당시 파업 10일 만에 경찰병력을 투입해 강제 진압했다. 2011년 봄,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주간조 2시간 부분파업 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회사는 불법 논란인 직장폐쇄를 했고, 정부는 역시 파업 7일 만에 강제 진압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합법파업이었다.

푸름이 진동하던 봄날은, 새벽 5시 여명이 밝아올 무렵 경찰이 강제 진압을 시작하면서 그렇게 붉은 빛으로 변해갔다.


  2011년 5월, 정부는 경찰병력을 투입해 노동자들의 합법 파업을 강제진압했다.

“당시 임금인상을 요구했어요.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2천원 가량의 임금인상을 요구했는데, 그때 우리 슬로건이 '임금인상 한 푼도 못 깍아주겠다’는 것이었어요. 공장 점거 하면서 거기서 밥도 해먹고, 파업했죠. 단전 단수되면서 공장안 생활이 힘들었죠. 굉장히 폭압적으로 경찰병력이 투입됐어요. 최루탄도 많이 쏘고, 창문 깨면서 사다리 타고 내려오고. 머리를 박고 쳐들지 못하게 했죠.”

전 조합원이 경찰병력에 끌려가는 사이, 당시 노조 집행부는 회사와 직권조인 하고 ‘도망’갔다. 조합원들은 경찰서에서 풀려나는 즉시 시민운동장에 모여 바로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다음날 회사로 들어갔다. 노조 사무실은 엉망이 되었고, 조합원들은 회사 강당에 모여 비상대책위를 중심으로 다음 투쟁 계획을 잡아나갔다. 어용과 다름없었던 노조 집행부를 대신해 자발적인 힘을 모아 간 것이다.

“직권조인 했던 집행부들이 도망갔다가 3명이 회사로 들어왔어요. 뭐가 잘했다고 배 째라는 식이었죠. 노동자들의 욕구가 충족이 안 된 상태에서 노조 간부가 회사랑 짜고 직권 조인하니까 반발이 만만치 않았죠. 경찰병력 투입 전날, 내가 당시 부서대표라 노조 간부들이랑 저녁에 만났는데, 간부들은 경찰병력 투입 안 되니 걱정 말라고 해 놓고, 다음날 새벽 경찰병력이 투입되니까 싹 빠져버렸죠.”

노동자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파업, 구속자 면회 투쟁, 회사 사과 요구 등 계속 현장에서 투쟁했다. 투쟁이 계속되자 회사 공장장이 부서별로 다니며 경찰병력 투입과 현 사태에 대해 조합원들에게 일일이 사과하며 다니기도 했다.

“경찰병력이 투입됐지만 회사가 보기에도 별 소득이 없었어요. 현장에서 후유증이 오래갔지요. 노동자들이 느끼는 회사에 대한 배신감은 상당했어요. 현장이 엄청 혼란스러우니까 노동자들은 더욱 민주노조의 필요성을 느꼈죠. 그때부터 노동자들은 노조를 믿게 됐고, 노조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어요. 당시 우리는 민주노조로 뭉쳤고, 새로운 노조 간부를 선출해서 뽑았죠.”

1990년 당시 정부는,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여름 장대비처럼 줄기차게 퍼붓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잠재워야 했고, 노동(조합)운동 탄압의 본보기로 유성기업에 경찰병력을 투입했다.

“노동운동 탄압은 ‘이렇게 해야 한다’ 시범케이스로 정부는 유성기업에 경찰병력을 투입했죠. 노동자들의 투쟁을 공권력으로 막겠다고 정부가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예요.”

우리는 ‘연대’로 성장했다

경찰병력 투입 이후 노동자들은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사회 부조리를 깨닫기 시작했고, 전국 곳곳을 다니며 연대했다. 민주노총의 전신 전노협 산하 부천노동조합협의희를 중심으로 사업장의 투쟁을 넘어 지역 투쟁을 만들어갔다. 당시 유성기업, 대흥기계, 동양엘리베이터, 경원세기 등은 공동 투쟁을 했다.

유성기업노조 93년 9월 노조 임원 선거는 민주노조가 현장을 장악한 결정적인 선거였다. 당시 선거는 3파전으로 치러졌고, 70%가 넘는 찬성으로 당선된 이재윤 위원장(현 유성기업지회 비대위원, 단식농성 중)은 한국노총 탈퇴와 전노협 가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임금이 인상되고, 근로조건이 개선되고,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매년 매년 투쟁했죠. 지역에서 4개 회사 노조가 주도적으로 단일 요구안을 만들고 매일 지역, 전국으로 연대 투쟁을 다녔어요. 경희대학교 크라운관에서 열린 전노협 정기대대(94년 1월)에서 유성기업노조가 공로패도 받기도 했죠.”

“93년 들어 급속하게 현장에서 활동가들이 만들어졌다. 지금 오랫동안 노조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들이다. 정부와 회사에 대한 분노로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민주노조의 필요성을 자각해나갔다.”

“당시 노조 위원장이었던 이재윤 씨는 한국통신 파업으로 95년 구속되기도 했는데, 노조 위원장이면서 민주노총 건설 준비위원회 부천시흥 대표였다. 지역 공동투쟁위원회 의장이기도 했어요. 같은해 지역 투쟁은 불붙었고, 매일 싸웠어요. 대흥기계 파업에 연대했는데, 대흥기계 노조 지도부 3명이 구속되었죠.”


  노동자들은 경찰병력의 강제 진압에 투쟁으로 맞섰다.

95년 한국통신 경찰병력 투입 때도, 유성기업노조는 지역에서 가두 투쟁을 했다. 96년 노동법개악에 맞서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했고, 26일 전면파업과 2일 부분파업으로 투쟁 대열 맨 앞에 섰다.

“96년 노개투 파업때 맨날 명동, 종로 일대에서 돌맹이, 화염병 던지고 최루탄 맞으며 정부에 맞서 싸웠죠. 정년을 앞둔 선배들이 꾸역꾸역 집회에 다녔죠.”

“이재윤 씨가 유성기업노조 위원장하면서 96~98년 금속연맹(산별노조인 전국금속노조의 전신) 부위원장을 같이 했어요. 94년 이후를 회고해보면, 2000년 아산으로 내려오기 전까지가 유성기업 민주노조 운동의 절정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 전국과 지역의 연대투쟁을 경험하고, 그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공세적인 연대투쟁 속에서 우리는 성장해 왔습니다. 이 동력으로 충남 아산지역에 와서도 연대투쟁을 열심히 했죠.”

“98년 IMF 경제위기 때 22여일 전면파업 했어요. 당시 회사는 단체협약을 전면 개악하려고 했죠. 임금은 동결했고, 단체협상을 1년에서 2년마다 한 번씩 맺는 걸로 바꾸였죠. 두 개 정도 내 주었는데, 국가공휴일이 없어지면서 한글날과 국군의날 못 쉬게 됐죠.”
(기사제휴=미디어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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